기억은 흘러 역사가 되고, 로베르 르빠주 <887>

마법 같은 로베르 르빠주의 1인극. 그는 무심히 손을 뻗어 자신의 기억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다. 관객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의 기억 네 모퉁이를 모두 돌아본다. 공연이 끝난 후, 르빠주가 내민 단서를 따라 보다 깊이 그의 작품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진 제공_LG아트센터


무대 위에 등장시킨 아파트 미니어처. 르빠주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으로, 이곳엔 그의 개성 넘치는 이웃들이 산다.

“잠시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거장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가 12년 만에 <887>로 내한했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연출가가 아닌 연기자 르빠주를 처음 보여준 기회였다. <달의 저편>, <안데르센 프로젝트>, <바늘과 아편>뿐만 아니라 ‘태양의 서커스 ’,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등을 탄생시킨 세계적인 연출가 르빠주는 그의 작품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관객을 단숨에 사로잡는 무대 연출로 이름났다. 최근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 <887>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가벼운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선 르빠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 한 편을 외우는 일에 골몰하면서 말이다. 관객석의 조명도 그대로 켜진 상태에서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연극 제목 <887>은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퀘백 머레이가 887’ 주소를 뜻한다. 여섯 가족이 살기엔 좁았던 집, 그리고 개성 있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다. 관객석의 조명은 서서히 암전되고, 르빠주는 무대 중앙으로 어린 시절 살았던 아파트 미니어처를 가져온다. 이로써 관객은 그와 함께 기억으로의 여정을 떠난다. 이 여정 속에서 경계는 허물어지고, 그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된다.


연극의 아름다움을 처음 알게 된 어린 날 그의 2층 침대. 몽환적인 그림자극이 그 시작이었다.

르빠주의 노스탤지어

“<887>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작품의 중요 테마에 아버지가 등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말재주가 좋고 유머 감각이 좋은 어머니와 닮았지, 과묵하고 겸손한 아버지 같지 않다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흥미롭게도 <887>을 쓰다 보니 묻혀있던 아버지에 대한 향수가 점점 나타났고, 어느새 연극 전반에 걸치는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됐습니다.” – 로베르 르빠주 ‘관객과의 대화’ 중

르빠주의 기억은 많은 부분 아버지와 연결되어있다. 젊은 시절 가장 멋지고 잘생겼던 아버지, 군인으로 수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과묵하고 겸손했던 그의 아버지는 퇴역 후 일곱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새도록 택시를 몰았다. 어린 시절의 향수는 무대 위 미니어처 세트를 들여다보는 르빠주의 카메라를 통해 전해진다. 이제는 너무 커버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의 뱃속처럼, 르빠주와 관객들은 작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화면에 의지해 그 시절을 살펴본다. 동시에 관객들은 르빠주 가족의 가장 파란만장했던 기억과 마주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는 아버지, 할머니에게 방을 내어주고 여동생과 이층 침대를 쓴 어린 르빠주, 하지만 그 시절은 무대 위에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소환된다. 르빠주 인생 첫 연극이 시작된 바로 그 이층 침대가 등장하는 장면은 타인의 경험에 공감하도록 관객의 감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연극은 타인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예술이고, 르빠주는 그 형식을 가장 극대화해 보여주는 것이다.


어릴 적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미니어처 모형을 통해 르빠주는 관객에게 기억의 여정을 선사한다.

무대 장치의 미학

“저는 거대한 공연장보다 중소규모 공연장을 선호합니다.” – 로베르 르빠주 ‘관객과의 대화’ 중

<887>은 르빠주가 퀘백의 중요한 행사인 ‘시의 밤’ 행사에서 낭독할 시를 외워야 하는 현재와 과거의 어린 시절 기억이 교차되며 전개된다. 어릴 적 외운 전화번호는 잘 기억하면서 지금 시 한 편조차 외우지 못하는 르빠주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다르지 않다. 여기에 그가 보여주는 무대 장치들은 이야기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미니어처 소품부터 거대한 무대장치까지, 하나하나가 작가의 의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장치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린 시절 이모부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바로 미니어처 링컨 자동차였다. 이모부는 이를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 타는 차’라고 하며, 르빠주에게 성공한 사람이 되려면 사립학교에 가야 한다고 한다. 이에 영향을 받은 르빠주는 사립학교 입학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만, 아버지가 학비 부담을 느낄 택시 운전사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에 나타난 아버지의 택시는 자신의 아버지가 절대 실패한 사람이 아님을, 링컨은 타지 못했을지언정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임을 이야기한다. 손톱만한 미니어처 링컨 자동차와 무대를 가득 채운 택시는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또 어린 시절 보았던 불꽃놀이는 머릿속 시냅스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지고, 점점 기능하지 않는 시냅스는 알츠하이머를 앓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반면 어린 시절 뒷마당에서 한 불꽃놀이는 분리독립운동으로 위태롭던 퀘백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르빠주 개인의 기억은 퀘백의 기억이라는 집단의 기억으로 확장되며 우리는 그 기억을 공유한다.

기억은 흘러 역사가 되고

“기억은 정치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887>은 정치를 더 시적이고 순진한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저에게 기억이란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는 것은 사실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에요. 기억이 반드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죠.”- 로베르 르빠주 ‘관객과의 대화’ 중

연극을 보기 전 팜플렛을 꼼꼼히 읽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어린 르빠주의 기억은 당시 시대 상황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기억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왜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까? 그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60년대 퀘백의 객관적인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봤던 어렸을 때의 기억이다. 역사는 객관적이지 않고, 모든 개인에게 스며들어 집단의 기억이 된다. 어린 르빠주의 눈으로 본 혼란했던 퀘백의 상황은 다시 그의 공연을 본 한국 관객 개인의 경험이 되어 기억으로 남았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뜻밖의 만남은 다름 아닌 ‘퀘백의 기억’이었다. 르빠주 개인의 기억 속으로 떠난 여정은 우리를 혼란했던 60년대 퀘백에 데려다 놓았다. 퀘백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기억은 공유된다. 연극을 보다 이런 상상을 해봤다. 한 국가가 지닌 특정 시대의 역사를 데이터로 만들어 클라우드에 올리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 전달해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식은 어떨까? 르빠주는 2시간 만에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12살 아이에게 총을 겨누고 검열하는 군인의 발밑에서 우리나라 관객들은 어떤 기억을 공유한다. 그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기억은 흐르고 흘러, 시공간을 넘어 역사를 만든다. 그렇게 마침 6월이 되었다. 30년 전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시민들을 떠올리게 하는 <887>은 마법처럼 집단의 기억을 공유하게 한다. 이 기억은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이어질 것 같다.

LG Social Challenger 177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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