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빈느 페르지 | 꿈 실은, 4대 스노우글로브 마이스터

낮이든 밤이든 조용한 비엔나, 그 속엔 버스 기사부터 바텐더에 이르기까지 묵묵하게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마이스터’의 정신이 일렁이는 듯했다. 100년의 스노우 글로브 가업을 이어받을 4대 보스 사빈느 페르지도 마찬가지였다. 신비와 로망을 품은 스노우 글로브의 미래를, 작지만 야무진 자신의 손으로 이어나가면서.

* 편집자 주 : < 까짓것, 백 년밖에 안된 가게 바로가기 > 를 미리 탐독하면, 기사 이해도가 백 배 증가합니다.

비엔나 오리지널 스노우글로브 Original Viennese snowglobe는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대표 공예품이자 기념품이다. 잡티 없이 투명한 유리를 만드는 제조 공정이나 알프스 산맥의 청정수를 넣고 플레이크를 띄우는 스노우글로브의 제작 과정 모두 비공개일 만큼 엄격한 보안을 자랑한다. 그 철두철미한 보안이 드리운 가게는 갤러리이자 작업실로 활용되고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군데군데 낡아 보이는 탁자와 기계가 1백 년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

우리 가업이 시작한 연도는 1900년이에요. 현재 1백 년은 족히 넘었죠. 증조부 때부터 시작되었죠. 여기에서 3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서 스노우글로브가 탄생했어요. 따지면 이 거리에 쭉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여긴 제가 갓 테어날 때부터 늘 있었던 곳이에요. 아버지(에르빈 페르지 Erwin Perzi)가 만든 스노우글로브를 보면서, 많은 손님이 스노우글로브에 감탄하는 것을 보며 자랐죠. 제 모든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곳이에요. 지금은 직장이 되었네요.

숍 한켠에 마련된 작은 스노우글로브 박물관, 그곳에 걸려있는 사진들 속엔 건장한 체격을 가진 무뚝뚝한 표정의 남자들이 가득했다. 굳게 다문 입술에는 장인의 긍지를 넘어 절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게르만족 특유의 의지가 묻어 나왔다. 사진 속 주인공은 지난 100년간 스노우글로브를 만들고 가업을 이끌어 온 사빈느의 할아버지들과 아버지였다. 강인해 보이는 그들과는 달리, 그녀는 서글서글한 성격처럼 보였다. 단, 그녀의 손은 서글서글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작하고 5년 간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어요. 지금은 직접 스노우글로브를 만드는데 참여해요. 하지만,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죠. 차근차근 배우고 있어요. 여기 보이는 작은 스노우글로브들은 제가 직접 만든 거에요. 일을 즐기면서 하고 있어요. 하나하나 배울 때마다 보람을 느끼죠. 아직은 모든 게 재미있어요.

스노우글로브 하나하나 확신에 찬 어투로 설명하는 그녀에겐 강한 자부심이 절로 나왔다.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우리와는 달리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녀에게도 말 못할 사정이 있었으니∙∙∙.

저도 원래 다른 꿈이 있었어요. 연극과 뮤지컬, 영화 분야에 상당히 관심이 많거든요. 제가 직접 연출하고, 무대에도 서고 싶었죠. 음악과 연기, 화려한 무대∙∙∙지금도 여전하지만, 어릴 땐 상상만으로도 설렜어요.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기보다는 아버지는 늘 어릴 적부터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는 새로운 보스가 될 거야, 우리 딸은 나를 잇는 장인이 될 거야.”란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제가 당연히 이어나가야 할 가업이란 생각을 확고히 하셨던 거죠.

그녀의 표정에서 약간의 복잡한 감정이 읽혔다. 스노우글로브가 과연 그녀의 인생 전체를 바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일까? 자신의 꿈을 버리고 가업을 잊는 것이 억울하진 않을까? 어쩔 수 없는 운명을 택하려고 하는 걸까?

저영화나 연극, 뮤지컬은 지금도 관심 가는 분야에요. 하나의 공연은 많은 이에게 큰 감동을 주고, 여운도 크잖아요. 하지만 스노우글로브의 매력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엄청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스노우글로브를 우선순위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 세상에 같은 내용의 공연과 영화는 많지만, 이 세상에 똑같은 스노우글로브는 단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스노우글로브가 가장 좋아요. 스노우글로브는 제게 특별한 의미죠.

갈등의 순간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빈느의 진지한 표정에서 보스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1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어온 가업이 앞으로도 100년 이상 이어져 가려면, 그녀의 징검다리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다.

사실 이 근처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장인과 가게가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명맥을 잇지 못해 없어진 가게가 상당히 많죠.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가업을 잇는다는 게 상당히 부담되죠. 저 역시 그렇고요. 하지만, 보스로서 제가 반드시 이겨내야 할 부분이기도 해요.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좁지만 강렬한 아우라가 뿜어 나오는 스노우글로브의 성지에서 한 왕조를 이끌어가는 여왕의 모습이 느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예다웠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다면, 가업을 잇게 할 생각인지, 아닌지.

글쎄요. 아직 결혼하기에는 좀 어린 나이라서∙∙∙ 그런데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인 것 같아요. 저도 결국 제 의지대로 이 길을 택했고, 따지고 보면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처음 스노우글로브를 세상에 알린 증조할아버지도 다 스스로 선택한 거잖아요. 강요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분명히 스노우글로브를 좋아할 아이가 있지 않을까요?

비엔나의 한적한 골목길을 굽이굽이 발품 팔아 걷다 보면, 그 흔하디 흔한 입간판도 없는 100년 넘은 스노우글로브 가게가 있다. 그곳에 가면 시종일관 밝은 미소로 조근조근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과거와 미래를 이을 또 한 명의 ‘마이스터’, 사빈느를 만날 수 있다.

더 열심히 스노우글로브를 연구해서 아버지만큼 훌륭한 장인이 되고 싶어요. 스노우글로브를 아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으면 해요. 한국에 계신 여러분, 오스트리아에 올 일이 있다면 잊지 말고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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