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진┃ 지금 행함의 위대함

사진 전경미/제16기 학생 기자(중앙대학교 국문학과)

인터뷰를 위한 통화에서의 익숙함은 깊게 주름이 자리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생경함으로 다가왔다. 강산이 네 번도 더 변한 시기 동안 목소리로 한 자리를 지켰건만, 그는 지겹다고 하기는커녕 계속 ‘행하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하지만 그 누구보다 빛나는 주인공으로서.

자기 가슴이 말하는 ‘끌림’이 길을 만든다

46년이라니까 미안하네요. 너무 오래 해서

40년이 훌쩍 넘는 그의 성우 생활에 대해 묻자 그는 멋쩍은 듯 웃었다. 1964년 TBC 공채 1기로 성우의 길에 들어선 그는 당시 TV 드라마보다 훨씬 인기를 끌었던 라디오 드라마로 이름, 아니 목소리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벤허>, <007>, <로마의 휴일>, <슈퍼맨> 등 내로라하는 명작 외화의 주인공을 연기하며 ‘스타 성우’의 반열에 올랐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의 왕국>의 내레이션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 이렇게 수많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익숙해진 목소리, 그 시작은 대학 시절 연극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대학생 때 연극을 좀 했어요.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하고 그랬죠.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흥미로워서 시작했는데,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것도 한번 해볼 만하다.’, ‘도전해볼 만 하다.’라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방송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게 또 매력적이더라고요. 당시에는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가 지금 TV 드라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어요. 퇴근길에 직장인들이 전파상에 들러서 라디오 드라마를 듣고 귀가했죠. 그런 점에서 방송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방송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의 방송은 곧 라디오를 뜻하던 시절이었다. ‘그림’ 없이 소리로 모든 것을 전달해야 했던 시대. 그 소리를 전달하는 사람은 뉴스를 맡은 아나운서와 라디오 드라마와 같은 오락적 요소를 맡은 성우였다. 그는 이 두 갈래의 길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처음에는 선배들이 방송할 거면 아나운서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나운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당시의 제 생각이 아나운서는 뭔가 제한적이었어요. 지금은 다르지만요. 반면, 성우는 라디오 드라마에서 여러 가지 일, 갖가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었죠. 그래서 성우가 더 끌렸고, 택했어요

길이 흐트러지지 않으려면, 철저한 원칙을 지킨다

이전에 학교 수업에서 내레이션을 해본 기억이 있었다. 10분 정도의 짧은 다큐멘터리였는데, 발음을 분명히 하는 것에서부터 내용에 맞게 억양을 조절하는 것까지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표정과 행동 자체가 보이지 않기에,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가 느끼는 그 익숙함은 우리말과 작품에 대한 그의 철저한 연구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냥 대본을 읽는 게 아니라 이 역할을 어떻게 하겠다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죠. 가령 사극에서 왕을 맡았는데, 그건 내가 살아보지 않은 세계라 모르잖아요. 배우들은 눈에 보이는 상황이라도 있지만, 성우는 스튜디오 안에서 보이는 게 벽, 엔지니어, 기계 이런 것밖에 없어요. 그러면 내 머릿속에 그려야죠. 머리 속에 내가 보는 현 상황의 시야가 아니라 머리 속에 있는 그림을, 내 캐릭터의 상황을 그려 넣어야죠. 현대극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살아보지 않은 세계를 구현해야 하는 거니까.


변희봉, 나문희, 전원주 등 드라마나 영화에서 활약하는 성우 출신 배우들이 많다. 그 역시도 여러 번의 TV 출연을 제의받으며 구체적으로 연기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고사했다.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나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원칙을 바탕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목소리로 그려진 이상형과 실제로 보는 이미지는 절대로 맞을 수가 없어요. 물론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려야 하는 시대이지만, 일단 성우를 평생 직업으로 생각했으니까. 제 소리를 좋아하는 분의 이상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얼굴을 드러내지 말자는 원칙을 지키고 있죠.

오랜 경력에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 일단 행하라

한 가지 직업으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말이다. 굵고 분명한 목소리만큼이나 견고해 보이는 그의 인생에서 삶의 궤적이 다른 그림을 그린 적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젊은 시절의 무모함에 대한 질문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방송이 좋아서 들어왔다가 잠깐 다른 일을 하기도 했어요. 젊었을 때 완구사업을 좀 했죠.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었는데, 실패해서 돈도 좀 잃었고.(웃음) 옛날에 만화영화 더빙을 했는데, 그러다 완구 쪽에 관심이 생겨서 외도한 거예요. 결국 그런 요소가 ‘내가 태만했구나.’, ‘노력이 부족했구나.’ 깨닫게 된 계기였죠. 다시 돌아와서 열심히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쓰디쓴 실패에서 얻은 값진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하는 법을 익힌 동시에 성우의 길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최선을 다하기’.

성우도 운동선수하고 비슷해요. 야구를 예로 들면 3할 타자가 매일 홈런을 치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날은 연타석 삼진을 당할 때도 있는 거죠. 저도 지금껏 방송했는데도 제 계산대로 안될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가.’에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에게 20대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지금보다 더 잘하는 성우”라고 잘라 말하곤 미소를 지었다. 부러웠다. 그 미소에서 걸어온 길에 대한 확신과 진정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즐거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남보다 조금 먼저 길을 찾았고, 잠시 다른 일을 하며 그의 소중함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그 길의 정점에 선 그는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젊은이에게 말한다. ‘무엇이 최선인가?’라고 끊임없이 물어보기보다 일단 행하라고. 머리 속에서 속단하지 말고 일단 몸으로 부딪쳐 보라고. 이 말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잠언이나 금언에 비하면 너무나도 당연해서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평범하고 당연하다는 이유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고 산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이 당연함의 위대함처럼 말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상황만 탓하면 나중에 후회밖에 하지 않게 돼요. 어떤 일이든 ‘이건 내가 도전해볼 것이다.’, ‘이건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세요.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후회는 안할 겁니다.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세요.

BGM – 최창국(kook~*) < Serenity(Jazz ver.)>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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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수현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자! 요즘들어 더 와닿는 말인거 같습니다!
  • 엄PD

    "최선을 다한 후에는 최소한 후회는 하지 않는다."는 이 말을 항상 새기고 사는 1인 입니다. 흐트러진 제 결심을 익숙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경종을 울려주시네요~ 멋지십니다^^
  • 박상영

    아..지금보다 더 잘하는 성우,라니. 인생을 걸만한 일을 찾아, 그것에 삶을 바쳐온 자 특유의 자부심이랄까 그런게 느껴지네요. 부럽고 두렵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 으헣

    참... 소박한 것 같으면서도 위대한 것 같으면서도 잔잔한 멋이 있으신 분이네요 ^^
  • 조세퐁

    @황덕현 기자. 저도 예전에 TV로 <더 록> 많이 봤지요. 요즘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같은 프로그램이 사라져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조세퐁

    @황태진 기자. 흔히들 동물의 왕국 내래이션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것 말고도 정말 많은 작품을 하셨지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한 인터뷰, 재미 있었습니다.
  • 황선진

    아이쿠, 좋아하는 숀커너리 목소리인 유강진 선생님을 만나고 오셨군요^^ 너무 좋죠!
  • 황태진

    동물의 왕국에서 들리던 그 침착함이 느껴지는 안정적인 목소리가 바로 이 분이셨군요!!
    주어진 여건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잘 읽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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