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은밀한 유희 ‘훌짓’


글, 사진

‘간판’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지만, ‘학교 줄 세우기’ 만큼은 금기로
통한다. 자칫 간판 가지고 사람 무시했다가는 인격을 의심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금기도 오프라인에선 스포츠가 된지
오래다. 이 금지된 유희를 즐기는 자, ‘훌리’들이다. 영국
축구의 성난 관중을 일컫는 ‘훌리건’에서 유래된 ‘훌리’는 AC
밀란, 리버풀FC 따위 대신 모교의 이름을 걸고 모교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한바탕 키보드 전쟁을 벌인다.

훌짓의 연원은 교육전문사이트 <진학사>(1999년 개설) 게시판에서 시작된 배치표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각 학원들이 발표하는 대학 입시 배치표의 정확성을 둘러싼 설전 속에 오늘날
훌짓이라 이름할 만한 움직임이 태동, 학교 서열 담론이 노골화된 형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담론이 네띠앙의 <대배토>를 거쳐 다음 카페 <훌리건 천국(cafe.daum.net/posthoolis)>
계보로 이어지게 된다.
회원수만 3만 6000명을 자랑하는 <훌리건 천국>과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의 대학별 갤러리는 훌리 담론의 주된 수원지다.

<훌리건 천국>와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에서 감지되는 훌리들의 주된 관심은 단연 서열 논쟁이다. 이들은 입시 결과 점수, 고시 합격자 수와 같은 기본적 데이터에서부터 장학금 지출예산 순위, 대기업 최고 경영자 출신 대학 분석, 대형 로펌 신입 변호사 출신 대학 분석 등 다채롭고 공신력 있는 척도를 인용, 나름의 ‘개념서열’을 세워 모교의 우위를 변호한다. 때문에 훌리들이 축적한 데이터는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에게 유용한 입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훌짓이 담지 한 학교 서열 담론이 그 자체로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서열화 담론은 출신 학교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풀림으로써 과도한 입시 경쟁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입시 과열이 낳은 서열화 논쟁이 다시 입시 과열을 낳는 악순환이다.
무엇보다 이 담론에는 학벌 카르텔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욕망이 내재돼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실제로 훌리들 사이에서 주로 벌어지는 논쟁은 ‘연고대 서열론’에서부터 ‘성한대 논쟁’(성균관대와 한양대의 서열 논쟁), ‘의대론’(서울대 의대, 연세대 의대, 가톨릭 의대, 울산대 의대 등 5개 메이저 의대 서열 논쟁) 등 소위 명문대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끔 등장하는 ‘지방대 서열론’은 ‘질 떨어진다’며 공격 받는다. 지방대가 이러할진대 전문대 출신 훌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훌리들 사이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한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라는 단어는 카르텔에 끼지 못하는 다수는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치환되는 현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순수한 애교심의 발로에서 훌짓을 하는 입장으로서는 세간의 따가운 시선이 억울할 만도 하다. “표현에 있어서 조금 투박하고 거친 면이 있지만 애교심의 한 표현이며 이것이 딱히 비판 받을 일은 아니다” (<디시인사이드>, la***** 회원)
대학생 한 아무개 씨(22)는 “까놓고 말을 안 했을 뿐 대학 서열은 훌리건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이를 단지 공론화했다고 했다는 이유로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며 불만을 토로한다.

무엇이든 논쟁할 수 있는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고, 자칫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담론의 확산을 경계하는 것도 정당하다. 훌짓에 대한 가치판단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져야 하겠지만, 에리히 프롬이 말한 다음 구절은 현실을 준엄하게 경고한다.


“궁극적으로 ‘나(주체)는 무엇(객체)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은
객체를 소유하고 있음을 빌려서 나의 자아를 정의하고 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주체이다. 나의 소유물이 나와 나의 실체의 근거가 된다.”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객체를 ‘학벌’로 바꾸어 읽어보자. 당신의 자아를 정의하는 것은 당신의 실체인가, 출신 학교인가.

글,사진_김수정 / 14기 학생기자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05학번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emoticon

스티커 댓글

스티커를 사용해서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달기
  • 감동
  • 부들부들
  • 눈물
  • 두근두근
  • 좋아요
  • 사랑해요
  • 멋짐
  • 하하
  • 신남
  • 행복
  • 멘붕
  • 헉
  • 시무룩
  • 하이파이브
  • 응원
  • 쓰담쓰담
  • 뽀뽀
  • 박수
  • 선물하기
  • 고마워
  • 귀여워
  • 셀카
  • 저요
  • 열공
  • 쓰러짐
  • 씻기
  • 팩

소챌 스토리 더보기

대학생 집콕러를 위한 월간 소비

편지가게 글월,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은 게 언제예요?

비전공자를 위한 교양서

비전공자를 위한 전공자의 교양서 큐레이션

일본어 번역가 강민하 | 마음까지 전하는 번역

VEGAN ESSAY 의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입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식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먹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입문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12년, 빙의하고 싶은 영화 속 주인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