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맡기’, 양심과 우정 사이의 줄타기


자리맡기 양심과 우정 사이의 줄타기

강의실로 옮기는 발걸음. 때마침 전화벨이 울린다. 
 재욱아, 나 오늘 수업시간에 좀 늦을 것 같으니깐 
내 자리 좀 맡아줄래?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그렇게 나를 또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못내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대답한다. 
 알았어. 대신 빨리 와야 해.  이윽고, 수업이 다 끝나간다.
내가 맡아놓은 그 자리는 마냥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문득 고개 돌려 뒤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언짢은 표정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 한 학생의 
모습이 내 눈 안으로 들어온다.

글, 사진_이재욱/ 14기 학생기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05학번

인생은 자리 맡기?

농구경기는 흔히들 리바운드의 승부라고 한다. 림을 맞고 튀어나온 공을 누가 많이 따내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그리고 리바운드를 잘하기 위해서는 튄 공이 떨어질 위치를 미리 예상하고
선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탁월한 위치선정은
천금과 같은 한 골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어디 스포츠에서뿐만이랴? 특종을 카메라에 담아내려는 사진기자들의 자리 다툼은 몹시도
치열하며, 이성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어느 위치에서 하느냐에 따라 성공여부가 판가름 난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2002년 월드컵에서 ‘한,일 월드컵’이라는 ‘한’이 우선되는 공식명칭을
따내기 위해 결승전 개최를 기꺼이 일본에게 양보했다.

“성공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라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도 한국사회에서 ‘자리 맡기’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일 것이다. 끝내 죽어서도 우리는 ‘자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풍수지리라 명명되는 사상은 사후에도 명당이라는 좋은위치에 묘를 써야 후손들이 번창한다고 설명한다.
이쯤 되면, 우리의 인생은 어떤 자리를 맡느냐에 따라 좌지우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캠퍼스는  자리 맡기  로 열병 중

캠퍼스도 지금 ‘자리 맡기’로 인해 떠들썩하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취업난은 높은 학점을 따내기 위한
경쟁, 그리고 강의실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어진다. 수업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강의실 곳곳은 “여기는 자리가 있소.”라고 말하는 흔적들로 시끄럽다. 가방이
놓아져 있는 것은 기본이요, 전공도서 한 권은 애교 수준이고, 심지어 펜 한 자루, 종이
한 장으로 자리를 맡아놓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물론,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먼저 온 사람이 공부하기
좋은 환경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리 맡기’의 비극은 시작된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강의실 이곳 저곳에서는
“여기 자리 있나요?”라고 물어보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일부 빨리 온 학생들이 조금 늦게 올
자신의 친구 몫까지 자리를 맡아놓기 때문이다. 한두 자리를 맡아놓는 것은 그래도 양반이다.
서너 자리, 심지어 열 자리 넘게 자리를 맡는 경우도 있다.


“수업시작하기 15분 전에 왔는데도 자리가 없네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05 장미)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강의실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자리를 맡아놓은 흔적에 장미씨는 칠판 글씨도 잘 보이지 않고 선생님의 목소리로 잘 들리지 않는 강의실 구석 빈 자리에 앉는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상을 쓰지 못하고 강의실 뒤 켠 보조의자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허다함에도 흔히들 목 좋은 곳이라고 하는 좌석들은 비어있다. 맡아 놓은 자리의 주인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비어있는 자리를 보고 있으면 어찌나 화가 나는지.. 자리 맡아놓은 사람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니까요.”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04 김수영)

자리 맡아주기는 우정의 상징?

더 문제인 것은 자리를 맡아주는 학생들이 자신의 ‘자리 맡기’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리를 맡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리 맡기’의 비극은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솔직히 고민은 많이 되지만 친구가 자리를 맡아달라고 하는데, 거절하면 친구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것 같아서요. 또 언젠가, 제가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할 줄도 모르니깐요.
하지만 저로 인해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리를 맡아줄 때 마다
마음은 편치 않죠.”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06 양성희)

이러한 풍경은 비단 강의실에서뿐만이 아니다. 시험기간만 되면 도서관에서는 자리를 찾지 못해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학생들의 모습과 하염없이 주인만이 오기를 기다리는 빈 좌석의 풍경이
오버랩(overlap) 되곤 한다.

자리 맡기 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각 학교들은 ‘자리 맡기’에 대해 여러 가지로 대응책을 내고 있다. 서강대와 홍익대는
지정좌석제를 운영하고 있는데,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듣는 자리를 미리 지정하는 제도이다.
지정좌석제를 운영하고 난 후부터 학생들로부터 수업분위기가 더욱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좌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따로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부수적인 장점도
있단다. 성균관대는 한 사람이 여러 명의 학생증을 가지고 와서 도서관 좌석을 예약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시험기간 때마다 도서관자치위원회에서 ‘자리선점방지활동’을 펼친다.
도서관 앞에서 학생증의 본인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다. 고려대의 경우에는 ‘1인 1자리
맡기 운동’을 펼치며, 교문 앞에서 “나는 나의 자리 이외에 가방이나 짐을 올려놓지
않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서약서를 학생들로부터 받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지
못했듯이, 그 아무리 훌륭한 법률이라도 범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듯이 ‘자리 맡기’
대처해 나오는 여러 가지 방법들도 어디까지나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흠잡을 데 없는 원칙과 기준보다는 자리를 맡아달라는 친구의 부탁에도 어렵지만
자신 있게 “No”라고 얘기하는 당신의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수많은 제도와 선전도 결국은
우리 스스로의 의식개혁과 실천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허공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나와 나의 친구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더 큰 테두리에서 생각을 한다면, 그래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소집단 이기주의라는 벽을 넘어선다면 우리 모두가 기분 좋게 공부할 수 있는, 건강하고 배려
넘치는 캠퍼스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대안은 사람입니다.”
(강원대학교 신문방송학과 03 김태완)라는 한 대학생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숙한 울림을 남긴다.

글,사진_이재욱 / 14기 학생기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05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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