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Retro), 추억이 담긴 아날로그적 감성이 그립다










대학생 황이슬양. 얼리아답터임을 자처하는 그녀가 요즘 가장 아끼는 물건은 셔터를 누르면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나면서 사진이 찍히는 복고풍의 디지털 카메라다.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디지털카메라가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것인데…
 
이렇게 최근 과거의 향수를 테마로 한 선술집, 낡은 테이블, 가죽이 벗겨져 만질만질해진 쇼파 등 추억을 담은 카페, 칠을 일부러 벗긴 가짜 아날로그 제품들 등 노스텔지어적인 모습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시시각각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치여 시간에 얽매이거나 이끌려 사는 이들이 많다. 이렇게 이리저리 치여 사는 현대인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마음 속의 여유와 편안함을 원하게 되었다. 최근까지 첨단기술, IT의 제품이 주요 트렌드로써 히트를 쳤다면, 이러한 현대인들의 취향을 맞춰 앞으로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노스텔지어’가 담긴 상품이 대세가 된 것이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유행가로 시끌시끌한 대학가에 최근 향수를 자극하는 카페와 술집이 인기를 얻으며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나 70년대 학교 등 복고를 테마로 한 가게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점포들은 그 시대에 유행했던 아이템으로 인테리어를 복고적이면서도 세련되게 꾸미면서 중, 장년 층뿐만 아니라 젊은 층의 감성까지 자극하고 있다. 이렇게 아나로그적 감성을 테마로 꾸며 인기를 얻고 있는 곳도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존재해 세월이 자연스럽게 묻어난 모습이 꾸준한 사랑을 받는 가게들도 있다. 바로 대학로의 ‘학림다방’이나 신촌의 ‘미네르바’같은 카페 같은 곳이다.
 
‘학림다방’은 대학로 한복판에 1956년에 개업한 이후 올해 52년째를 맞이한 대표적인 레트로풍의 카페다. 지난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그들의 낭만과 추억이 남아있는 다방을 함께해보자.
 
어둑한 입구로 들어가 삐그덕 소리가 나는 낡은 계단을 올라가면 카페의 갈색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학림다방은 LP판에서 흘러나오는 고전음악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담한 카페이다. 선반에 빽빽이 꽂혀있는 레코드 판, 다방느낌이 물씬 나는 의자, 소소한 찻잔, 노란 불빛과 오래되 낡은 나무 벽 등은 50년대 다방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날 추억 이야기를 되새기는 중년층부터 친구들과 함께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추억을 만드는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학림다방을 친척, 이모, 엄마까지도 모두 알고 계셔서 그분들과 함께 온 적도 있어요. 어른들 말씀으로는 지금의 학림다방이 예전 모습 그대로라고 하셨어요. 다른 카페와는 달리 인위적인 꾸밈없이 50년대 다방 모습 그대로를 지켜온 자연스러운 공간이 좋아요.”
 
클래식을 작곡 중이라는 김용희 씨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예전에 친구와 따라 처음 왔었는데, 그 이후 종종 오곤 하죠. 레코드 판으로 들려오는 오래된 음악을 들으며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해요. 낡은 소품들과 복층으로 구성된 공간이 좋아서 이곳을 찾죠.”
 
은지순(23) 씨는 2층의 구석자리에 앉아서 친구 두 명과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그곳의 아늑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학림(學林)다방은 중년층뿐만 아니라 대학가의 젊은이들에게도 아날로그적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아늑한 정서적 휴림(休林)이었다.



신촌의 ‘미네르바’ 역시 생긴지 30년이 넘은 오래된 카페이다. 1975년에 생긴 이 카페는 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 전문점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나무로 된 문을 열면 은은한 커피 향이 풍기고 클래식 음악이 들려온다. 낡은 소파 의자와 촌스러운 체크 무늬 식탁보가 씌워진 테이블.. 카페보다 다방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미네르바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떠들썩한 신촌 길거리를 거다가 미네르바에 들어오면 옛날 영화 속에 들어 온듯한 느낌이 들어요. 이곳은 자신이 직접 알코올램프로 원두커피를 추출하여 마실 수 있는데 이런 아이템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 같아요. (김예림 숙명여대3학년)”
 
딱히 과거의 추억이라는 게 없는 요즘 젊은 세대들도 학림다방이나 미네르바를 자주 찾는 걸 보면, 과거에의 향수보다 세월이 흘러감을 별스럽게 여기지 않는 편안함과 묵묵함이 있어서가 아닐까.



레트로는 공간뿐만 아니라 구두, 쥬얼리 등 패션에도 강세를 띠고 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모델 트위기가 주로 입었던 엠파이어 라인 초미니 드레스나 잔꽃무늬가 새겨진 어찌보면 ‘촌스러운’ 쉬폰 블라우스 등 60년대 경향이 유행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엠포리오 아르마니’는 태엽을 감아 쓰는 ‘기계식’ 손목시계를 선보이기도 했다.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하는 패션 브랜드에서 기계식 시계를 내놓은 것은 처음이지만 기계식 시계가 생소한 젊은 층도 ‘아날로그 감성’을 부각했더니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처럼 패션에도 보다 친근하고 익숙한 노스텔지어적인 무드가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자주 드나드는 디자인 샵에서도 레트로 소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60년대 라디오 모양을 한 CD플레이어, 손으로 돌리는 전자식 전화기, 필름을 감는 척 해야 찍히는 디카 등이 그 예이다. 레트로 소품은 일반 제품에 비해 가격이 높은 편이지만 기본적인 기능 외에도 클래식한 디자인을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기 위해 찾는 고객이 늘고 있다.
 
레트로 제품을 파는 디자인 샵에서 만난 최윤영(이화여대 시디과 05) 양은, “이런 레트로 제품들은 어릴 때부터 봐오던 물건이라 친숙함이 먼저 가요. 아날로그는 정성이 필요하잖아요. 사용하면서 제품에 대한 정감이 생기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 점이 마음을 끄는 것 같아요.” 라며 몸이 먼저 기억하는 아날로그 상품이 다른 제품들보다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이와 같은 레트로 열풍은 패션과 제품뿐만 아니라 영화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1930년대와 40년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 작품들이 러시를 이루고 있는데, 곧 개봉할 30년대의 배경의 김혜수와 박해일이 출연하는 영화 <모던보이>와 손예진, 김주혁의 <낙랑 클럽>, 그리고 7월에 개봉되는 공포영화 <기담> 등은 모두 과거의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들이다. 시대상을 반영한 이런 복고 영화들은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고 잊혀진 기억을 상기시키며, 지금과는 사뭇 다른 한국의 옛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과 촌스러운 모습의 스타들을 구경하는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 줄 것이다.



트랜드 워치 전문사인 ㈜아이에프네트워크는 ‘2007년 메가 트렌드 및 히트상품 전략’ 발표회에서 “앞으로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상품이 소비자에게 크게 히트 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발표했다. 특히, 개인의 추억이나 역사가 디자인의 모티브로 쓰인 것과 어린 시절 추억의 히트 상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품이 인기를 모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 대신 아날로그 방식, 현대적인 디자인 대신 복고풍의 투박한 디자인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노스텔지어로 편안함을 누리고 마음의 위로를 받아 순수했던 시절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어서가 아닐까. 트랜드와는 거리가 먼 약간은 촌스러운 듯한 아날로그적 문화가 이제는 트랜드라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유행에 민감한 사람과 둔감한 사람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패션은 흔히들 20년을 주기로 유행이 반복된다고 한다.
 
올 여름,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 또 다시 유행할 커다란 선글라스와 커다란 벨트를 하고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앞서 언급한 장소들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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