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영어 수업, 이대로 괜찮을까?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재학중인 P모 군은 요즘 들어 고민이 생겼다. 학교에서 내년 1학기부터 외국인 학생이 1 명이라도 수업을 듣는 과목에 대해서는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어가 필수인 시대에 오히려 영어 공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위안을 삼았지만 한편으로는 어려운 전공수업을 영어로 들어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카이스트는 내년부터 모든 신입생을 대상으로 영어강의를 하며 고려대는 2010년까지 영어강의 비중을 전체 강의의 60%로 확대할 계획이다. 여기에 서강대와 한양대는 영어 강의를 각각 5개, 3개 이상 들어야 졸업을 할 수 있다. 이 밖에 각 학교에도 영어강의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각 학교의 입장은 비슷하다. 영어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에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치라는 것이다. 또 이는 학교경쟁력을 높이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실제로 영어 강의의 비중을 대폭 확대한 고려대는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국제화 부문에 높은 점수를 받아 5위에서 4위로 순위가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학교측과는 다르다. 지난 3월 고대신문에서 영어수업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찬성이 44%, 반대가 56%인 것으로 드러났다.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진 않지만 학교측의 일방적인 행정에 불만을 가진 학생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학생들의 불만은 무엇일까? 가장 큰 문제는 전공과목에 대한 이해도나 학습능력보다는 영어실력에 의해 학점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이모군은 “같은 과목이라도 한국어로 진행하는 수업은 수강신청 때마다 매진이 되지만, 나머지 영어수업은 재외 국민 학생이나 영어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마지못해 들어간다.”며 실제로 수업시간에도 영어실력이 뛰어난 학생들만 적극적이며 나머지 학생들은 들러리가 된 기분이다.”고 말했다. 때문에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 도입된 영어강의가 오히려 능통자와 비능통자간의 실력 차를 줄이기 보다는 소외감을 부추긴다는 말이다.
수업내용보다는 영어에 매달리는 주객전도 현상도 문제다. 동국대에 재학중인 김모군은 시험 기간마다 홍역을 치르는데 그 이유는 원서의 번역본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교수들의 수업준비도 미흡한 데다가 학생들 역시 준비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평소에 과목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번역본을 못 구하면 원서 해석에 매달려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전공공부보다는 영어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고 털어 놓았다. 이처럼 준비되지 않은 무리한 영어수업은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불만족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 같은 영어강의 문제가 현재 대학가에서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의무사항을 제외하고는 같은 과목의 다른 한국어 수업을 골라 들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대처럼 전체 강의의 60%까지 영어 강의가 확대된다면 학생들의 선택권은 더욱 좁아지게 된다. 또 학생들간의 실력 편차가 큰 상황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영어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들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사교육 시장에 더욱 의존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반대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모든 영어수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이모군은 “원어민에 의해 진행되는 순수 어학 수업이 확대되는 것은 환영한다.”고 말한다. 어학연수나 기타 사교육비 비용을 줄이고 본인의 수준에 맞춰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전공과목에까지 억지로 영어수업을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 과목에 대한 이해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소뿔을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소를 죽이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측의 보다 사려 깊고 섬세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글,사진_오수호 / 12기 학생기자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00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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