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종단기]제29화 人生之事 塞翁之馬, 우리는 이렇게 인생을 배워간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다는 아타카마 사막과 이 곳의 하이라이트 달의 계곡. 그러나 달의 계곡 투어를 신청하는 것에 잠시 갈등이 인다. 페루에서부터 수많은 투어를 한 까닭에 투어라면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 특히나 우유니 투어는 빡빡한 일정 탓에 환상적인 소금사막과 호수들을 제대로 느낄 시간조차 없어서 진절머리를 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중 교통 수단이 없어서 투어를 이용하지 않고 달의 계곡에 가는 방법은 자전거를 빌리는 것뿐인데, 요 근래 철인 3종 경기를 뛰듯 돌아다닌 탓인지 사막에서 자전거 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듯 싶어(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이제는 몸 사린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투어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버스가 산 페드로 마을을 벗어나자 기이한 형태의 암석들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한다. 오호라~ 여태껏 좋다는 풍경들을 많이 봐온 까닭에 웬만한 풍경에는 콧방귀 뀌는 우리이지만 사막 한가운데 특이한 형태로 솟아 오른 절벽들의 절경에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기하기만 한 지층의 흔적은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외우기에 바빴던 부정합이니 단층이니 하던 것이 실제로 펼쳐지는데 정말 지구는 살아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졌다.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가이드 아저씨가 열심히 째려본다. 이래서 투어가 싫다고요~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사막 저 너머 비쭉비쭉 줄을 맞춰 솟아있는 달의 계곡과 강렬한 빛을 발하는 일몰을 보고 있으려니 건너편의 절벽으로 가면 사막과 함께 좋은 사진 하나 건질 것 같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부랴부랴 건너편으로 올라갔더니 은은히 달의 계곡을 비추는 보름달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 한쪽은 지는 해의 붉은 빛, 다른 쪽은 보름달이 뜬 보랏빛이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달의 계곡 어디에선가 해와


달의 요정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을 것만 같다.

이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해 별이 뜬 까만 하늘을 보고 싶지만 저 아래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버스가 보인다. 아쉬움 속에 달의 계곡 아래로 내려오면서 외치는 한마디. ‘다시 투어를 이용하나 봐라.–;’
 
 
산 페드로 마을을 떠나면서 우리는 ‘파타고니아를 칠레 쪽으로 내려갈 것인가, 아르헨티나 쪽으로 내려갈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칠레 쪽으로 내려가자니 같은 목적이면 싼 것을 택하는 배낭여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고(거의 모든 여행자가 같은 파타고니아를 가진 칠레와 아르헨티나 중 환율 폭락 이후 물가가 싸진 아르헨티나를 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아르헨티나 쪽으로 내려가자니 단수 비자인 우리의 비자로는 다시 칠레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파나고니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지그재그로 여행하는 게 룰이라고 말하는 다른 나라 애들이 어찌나 부러운지. 칠레로 다시 들어 가려면 또 다시 비자를 받아야 하는 현실이 정말 한탄스럽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뿌에르토 몬트부터 뿌에르토 나탈레스까지의 3박 4일 배 여행의 요금이 예상한 한도를 넘지 않고, 산띠아고보다 뿌에르토 몬트에서 아르헨티나 비자가 더 쉽게 나온다면 칠레 쪽을 택하기로 했다.
앞으로의 행로가 어찌되든 우선 산띠아고행 버스를 탔다. 객관적으로 24시간의 거리에 US$ 38정도이면 비싼 물가가 아니지만 볼리비아를 여행한 후 이 곳을 온 까닭에 마치 뉴욕의 물가처럼 느껴진다.(그러나 버스 천장의 환기구로 햇빛이 조금이라도 들어올라치면 어김없이 나타나 환기구를 닫아주고 TV를 보다 잠이 들면 이불을 덮어주는 비행기식 서비스에 감동 받은 우리, 나중에 ‘비싼 값 하네’를 연발했다.)


그러나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우리는 버스터미널에서 바로 연결되는 세련되고 깨끗한 지하철을 보고 달라졌다.(이 얼마 만에 타보는 지하철인가!) 오랜만에 도시에 왔다고 신이 난 둘, 인터넷으로 정보를 모은 후 행로를 결정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보이며 도시 구경, 사람 구경에 정신이 없다.
남미인 이라기 보다 유럽인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고전적인 건물과 전면 유리의 모던한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다른 남미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라 어색하기도 하다. 비싸기만 할 줄 알았던 음식은 의외로 저렴한데다가 풍부하기까지 하다.(크고 탐스러운 복숭아 4개가 우리나라 돈으로 240원! 남미의 과일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싸다. 한국에서 바나나 못 먹던 은화와 망고 못 먹던 나, 이제 없어서 못 먹는다.)

이 정도면 산띠아고에서 며칠 지내다가 근교의 발파라이소를 본 후 아르헨티나로 넘어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인터넷으로 뿌에르토 몬트부터 뿌에르토 나탈레스까지의 배 여행을 알아보니 자주 있을 줄 알았던 배는 일주일에 딱 한 대밖에 운행되지 않는다. 그것도 당장 내일 모레! 자리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무작정 뿌에르토 몬트로 향하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 게다가 배를 탄다고 해도 아르헨티나 비자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뿌에


르토 나탈레스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가지 못하고 푼타 아레나스까지 내려가서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안 된다고 하면 할수록 더 오기가 돋는 이 성질을 어찌 하리~ 체크인 시간인 12시 이전에만 도착하면 표를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에 무작정 뿌에르토 몬트로 달려가기로 했다.

 
 
다음날 산띠아고와 발파라이소를 뒤로 하고 뿌에르토 몬트행 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천하태평이었다. 그러나 버스터미널부터 배가 출항하는 항구까지 걸어가는 동안 많은 여행자들의 수에 마음이 조급해져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발권하는 사무실에 도착하니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의 여행자들이 사무실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간신히 발권을 해주는 언니와 마주 앉은 우리는 당당히(?) 2일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했다며 표를 요구했다.(인터넷으로 표를 예약하면 48시간 후에나 예약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도 확인하지 않고 대책 없이 달려 온 것. 예약한 후 48시간이면 이미 배는 떠났을 시간이다.) 당연히 예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2시까지 기다리면 예약을 취소하는 사람들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한다.
350명이 타는 배라는데 설마 취소를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라고. 낙관적인 태도로 사무실 앞에서 12시가 되기를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 줄 알았던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기만 한다.(예약 문화에 익숙한 것들 같으니라고.) 처음의 낙관적인 태도와는 달리 표를 못 구할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드디어 12시가 가까워지고 취소되는 표를 기다리는 사람들만 한 가득. 떨리는 마음으로 줄을 서 있는데 앞의 사람들이 지금은 표가 없으니 4시에 다시 오라는 소리를 듣고는 사무실을 나선다. 이대로 돌아서야만 하는가! 그 절망의 순간, 조금 전의 발권 담당 언니가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아까 사무실을 나서기 전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던 말을 기억했었나 보다.
결국 2장의 표를 손에 넣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탑승 시간이 되어 배에 올라탄 후 4개월 전에 예약한 사람, 일주일 전에 예약을 시도했지만 예약이 이루어지지 않아 취소된 표를 손에 넣었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다. 출항하기 단 이틀 전에 인터넷으로 체크하고 당일 아침에 도착해서 표를 얻은 우리의 행운이 믿기지 않는다.
가장 싼 C 캐빈이지만 웬만한 호스텔보다 좋고 저녁으로 나온 식사도 가히 호텔급. 복잡한 피오르드 해안선을 따라 섬 사이를 지나다니며 빙하도 보고 펭귄도 보며 지낼 3박 4일이 행복하기만 할 것 같다. 그런데 부푼 기대 속에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배 밖의 풍경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웬걸 방송에서 배가 고장이 나서 움직일 수 없었다며 12시 이전에는 출항을 할 거란다. 그러나 배 안에서 보여주는 영화도 한 편 보고 점심도 먹었는데 배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불안하게도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은 선장님. 배를 고칠 수 있는 확률은 70%, 고치지 못할 확률이 30%라며 만약 고치지 못할 경우에는 전액 환불해주고 뿌에르토 나탈레스까지의 항공편을 예약해주겠다고 한다. 거기다 오늘밤 배 안의 바에서 파티를 열어달라고 한 승객의 요구에 피스코사우어(칵테일 종류)를 돌리겠다는 약속까지.
나름대로 멋진 풍경이지만 이틀 동안 같은 풍경만을 바라보는 것에 지쳤는지 모두들 배가 출항하는 순간 환호하며 출항을 지켜보겠다며 새벽 2시가 다되도록 갑판 위를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까지도 배는 움직이지 않았고 선장 아저씨는 사과의 말과 함께 돈을 환불 받는 3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아! 이렇게 기대하던 배 여행이 좌절되고 마는 것인가. 이틀 동안 공짜로 배 안에서 잠도 자고 좋은 식사에 영화에 손해 보는 것은 없지만 이 큰 행운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아쉽기 그지없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더니…

우리에게는 3번의 배 여행 기회가 있었다. 알래스카부터 캐나다까지 한 달에 한 번 있는 배는 연어 낚시하는 날과 겹쳐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파나마부터 콜롬비아까지의 배 여행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 접어버렸다.
마지막 배 여행의 기회가 이렇게 끝나 버린 것에는 약간의 아픔(?)이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큰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나쁜 일 뒤에는 좋은 일이 찾아온다는 평범하지만 쉽게 깨닫지 못하는 진리. 이로써 칠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아르헨티나로 넘어가기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칠레를 여행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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