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신의 나침반을 믿어라, 화가 김점선















화가가 왜 이화여대 시청각 교육학과를 갔냐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그림을 종합적으로 배울 수 있을 거 같아서. 안 믿겠지만 난 중고등학교 때 모범생이었어. 6년 동안 지각, 결석한 적 한 번도 없어. 다만 교과서 안에 다른 책을 넣고 봤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나 ‘죽음에 이르는 병’ 같이 전교 1등도 안 읽는 책을 골라서 읽는 게 취미였어. 하루는 언니 친구들이 놀러 왔는데 내 책장을 보고 대학교 다니는 언니가 있는 줄 알았다나. 아무튼 어렸을 때 난 지적 허영이 무지 강해서 동료 친구들을 무시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웃기지? 원래 대학 입학 할 때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2학년 때 동아 국제 판화전에서 대상을 탄 김상유라는 화가의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 선명한 대비에 죽음과 삶에 대한 메시지가 강렬하게 꽂혀 있는데 와~ 대단하더라고. 그래서 홍익대 미대 대학원 시험을 준비했지. 마침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을 뽑는 시기였는데 사람들이 다들 날 우습게 봤지. 홍대 애들이 너는 물감 갤 줄도 모르니까 비키라고 해서 혼자 빈 금속실에서 그림을 그렸어. 도롱뇽하고 말 그림을 그려서 냈는데 사람들이 저게 뭐냐 하면서 막 비웃었지. 내 그림이 아카데믹 했거든. 근데 백남준씨가 내 그림을 뽑은 거야. 나중에 김상유 선생이 내 그림을 보고 단군 이래 최고의 그림이라고 칭찬을 했대. 얼마나 기가 막히냐. 엄청난 인연이지.




근데 그 김상유 선생님이 하루는 수업시간에 그러는 거야. “너희들 뭉쳐 다니면서 그림 그린다는데 물감 자기 돈으로 사서 쓰는 사람 있냐?” 그래서 다들 고개를 저었더니, “그게 예술이냐? 그냥 캔버스에 물감 바르는 거지.” 그러는 거야. 예술이란 자살하려는 사람이 순간 혼을 뺏겨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그런 건데 너희들 작품에 그런 힘이 있겠느냐 이거지. 그러더니 선생님이 무조건 가난한 사람하고 결혼을 하래. 차가운 물에 똥 기저귀를 빠는 고통을 느껴보라는 거야.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치심을 느꼈어. ‘주변에 가난한 사람 없나?’하고 두리번거릴 정도로. 그래서 나중에 길거리에서 제일 가난하게 생긴 건달한테 가서 같이 살자고 해서 결혼을 했어. 1주일이 지나서 성이 김 씨인 걸 알고 나보다 3살 어린 것도 알고.




그리고 나서 아천리라는 시골 달동네에 방을 얻었는데, 막 친구들이 와서 진짜인가 하고 구경을 하고 갔어. 엄마랑 언니들도 와서 보더니 “너 일부러 쇼 하는 거지? 너 영어 잘하니까 번역해서 먹고 살 거 아냐?” 하면서 그냥 가버렸어. 비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는 그 집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작품이 하나 팔리면 정부미를 사다가 죽을 쒀서 먹고. 근데 난 그 사람하고 결혼하길 잘 했어. 내가 미술하는 사람하고 결혼했어봐. 로뎅하고 끌로델같이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그 사람의 그늘 밑에 있을 거 아냐. 그리고 작가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면 독이 쌓이는데 그 사람이 나의 독을 제거해 줬어. 덕분에 일반 대중들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내가 왜 말을 즐겨 그리냐고? 사연이 있어. 우리 큰 집 앞에 승마장이 있었는데 하루는 한 여자가 큰 종마를 타고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속으로 ‘마초인 우리아버지가 또 재수 없다고 소금 뿌리거나 욕을 하겠구나.’했지. 근데 아버지가 갑자기 그러는 거야. “나는 너를 저렇게 기르고 싶었는데….” 난 솔직히 놀랐어. 그 전까지 부모들이 뭘 해주면 ‘부모니까 당연하지!’ 하면서 빈정댔는데. 비싼 사립대 기숙사 보내면서 아르바이트도 안 시키고 비싼 옷, 구두 사주면서 곱게 키웠는데도 부모는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거지. 그 순간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싹 사라졌어. 그 말 한마디에 무뚝뚝한 아버지의 숨겨진 마음을 엿볼 수 있었거든. 그래서 말은 나에겐 보통 동물이 아니야.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 아버지에게 애정표현이 부족했던 나의 후회, 그리움이 담겨있지.



예술가들은 머리 속에 나침반이 있어. 흰 캔버스를 마주봤을 때 뭘 그릴까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나침반에 달려있어. 그럴 때 뭘 그릴 거냐? 내가 죽기까지 5시간이 남았다면 ‘아~ 내가 이걸 그리고 싶었는데….’하고 후회할 것들 있잖아. 그런 걸 그리는 거야. 자신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것을 하는 게 진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잖아. 도롱뇽을 그릴 때 내 자신한테 물었어. ‘너 이 그림 진짜 맘에 드냐?’ ‘응.’ 그럼 그리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은 칭찬을 하겠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악평을 퍼붓겠지.근데 백 명이 화살을 쏴도 그걸 꿋꿋이 맞으면서 걸어가는 거야. 그럼 마니아가 생기고 나의 캐릭터가 형성이 되는 거지. 안 그랬으면나 같은 화가가 어디 살아남을 수 있었겠냐? 모든 사람은 작든 크든 자신의 명성이란 게 있잖아.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이 명성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나가야 해. 새 그림을 내놓았는데 ‘저 사람 이제 한 물 갔구나.’ 하는 평가를 받으면 끝장이야. 매일매일 자기가 정말로 잘 할 수 있는, 즐기는 일을 후회 없이 해야 해. 예술가는 끈질긴 지구력, 남들과 싸울 수 있는 투쟁심. 그리고 그 많은 비난을 이겨낼 수 있는 장군 같은 기개… 이게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 다른 일을 해도 마찬가지 아니겠냐? 어때? 이 정도면 됐지?(웃음)

글,사진_오수호 / 12기 학생기자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00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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