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깊은 향이 나는 배우 오광록














영화는 수십만 프레임의 연속이다. 그 수 많은 프레임 속의 단 한 장면만으로도 이런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조금 일찍 인터뷰 장소에 도착해 기다리면서 그 동안 오광록이 연기했던 영화들을 떠올려 봤다. 단 한 장면으로도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배우이기에 실제에서의 모습이 더 궁금해지는 찰나, 편안한 차림에 다정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눈 앞에 선 오광록. 명품 조연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로 많은 작품에서 힘 있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이지만 실제로 만난 그의 모습은 그런 강한 인상 보다는 좀 더 너그럽고 부드러운 인상에 가까웠다. 차분히 문장을 풀어내는 말투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연기관은 한 마디로 느림의 미학. “조금 모자란 게 나아요.삶은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데, 거기에 맞출 필요는 없는 거지.물론 속도감 있는 세상에 맞춰 영리하게 연기하는 친구들도 많지. 하지만 저는 항상 느리게 표현해 왔어요. 빨리 걸을 수 없어 느리게 걷는 게 아닌 것처럼 어딘가 비어있는 듯 조금 모자란 듯 그렇게 살아가는 게 좋아요. 연기도 마찬가지고. 전형적인 것들은 좋아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아요.” 영화 속 그의 모습이 사람의 감정을 한 순간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면, 일상 속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는 힘이 느껴졌다. 봄 내음이 가득 풍기는 아늑한 정원에 앉아 고운 향이 우러나는 차(茶)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 사이에 오광록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묻어난다. 마치 어떤 하나의 역을 위해서 만들어가는 연기가 아닌, 전체의 풍광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존재를 드러내는 그의 연기처럼 말이다.




일찍이 오광록이란 열 세 살 어린 소년의 마음에는 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시에 대한 그의 의지는 여전했고 지금까지 써 내려간 습작의 무게만 무려 30kg.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인내와 고민을 거치지 않고선 절대로 가능한 무게가 아니다. 시를 쓰던 그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친구를 따라 배우예술원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였다. 원래 연극에 관심이 있었던 그였지만, 지금처럼 연기를 하게 될 거란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랑, 이원경, 김동원 선생님과 같은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와 극작가 스승을 모시면서 자연스레 연기가 삶의 일부로 다가오게 된 것. 솔직히 시를 쓰거나 연극을 해서 생활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벗이 있었기에 배부르게 먹진 못해도 배고프진 않았던 것 같다며 웃는 그의 모습에서 그 옛날 청년이란 이름으로 고민했던 시절이 묻어난다. 함께 하는 동료들을 ‘벗’이라 칭하며 진정한 벗이란 서로가 서로의 가슴 속에 있는 섬을 향해 노를 저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배우 오광록. 20대 초반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배우예술원 수업을 했다는 그는 시와 음악과 그림, 그리고 연기를 하는 모든 벗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을 되새김질 했다. 아티스트로서의 기개를 가지고 있던 그 벗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 길에서 그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소양호를 등진 석양의 해를 보면서 느낀 그 감정은 가슴을 울리는 시로 완성되었다.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저항을 향한 열망을 시로서 쏟아냈던 김수영 시인을 꼽으며 기자의 수첩에 좋아하는 작가들을 꼼꼼히 적어주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시를 향한 그의 열정이 느껴졌다. 항상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에 시선을 돌리는 오광록, 나지막이 시를 읊고 쓰는 그는 20대의 대부분을 시와 함께 살았다. 그렇게 가슴에 시를 안고 지금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삼청동 골목에서 보냈던 ‘푸른 해’의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오광록’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근래에 출연한 작품만 해도 벌써 여러 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지치지 않을까 싶은데, 그에게 연기는 그렇게 역할에 맞춰가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나를 지켜줬던 힘 중의 하나가 삶은 끊임 없는 추구라는 생각이에요. 세상에 섞여서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스스로의 정령을 찾아야 해요. 혼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다 보면 자연스레 스스로가 놓치고 있던 정령들을 찾게 되죠. 그런 시간을 거치고 나면 자신의 투가 생겨요. 나의 삶의 투, 호흡이 생기는 거지. 같은 대사 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어느 누가 하느냐에 따라 삶의 투가 다르게 반응하니까 늘 다른 연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는 현재 성북동에 있는 자택 근처에 작은 텃밭을 기르고 있다. 잡초를 좀 뽑아줘야겠다는 그와 함께 동행한 텃밭에는 기본적인 쌈 채소는 물론이거니와 고추, 호박, 배추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이렇듯 짬이 생길 때마다 흙을 고르고 느긋하게 산보를 나서는 그의 모습은 성북동의 소박한 풍경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문화와 자연만큼은 어떤 규제와 억압 없이 지켜져야 함을 강조하는 그,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배우/작가/시인’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그에겐 그런 직업의 이름이 필요치 않은 듯 하다, 그는 이미 스스로의 정령을 끌어 안고 자연을 벗 삼은 삶을 살고 있기에, ‘오광록’이란 이름만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꾸밈 없이 완성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 인내와 고민 속에서 우러난 삶의 투가 묻어나는 일상의 풍경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볼 수 없는 특유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런 삶의 선배로서 인생과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어 하는 20대의 생활을 물었더니 그 나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녹슨 기찻길 돌무더기 앞 섬에서도 피어나는 게 그 나이에요. 그만큼 힘차고 이겨낼 수 있는 나이라는 거지.”인터뷰를 마치며 문득 처음 그를 만날 때 악수를 청하며 손을 꽈악 쥐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오광록이란 배우의 깊은 향이 묻어난 손을 바라보며 그가 전한 진정한 삶의 깊이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 깊은 향으로 펼쳐질 앞으로의 그의 삶이, 그의 연기가 벌써부터 그립다.



글,사진_이유진 / 12기 학생기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03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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