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양심의 자유, <송환>의 김동원 감독과의 행복한 대화


김동원 감독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이틀 남기고서야 나는 허겁지겁 <송환>을 보기 위해 광화문을 찾았다. 관객 없는 썰렁한 극장에서 보겠거니 짐작하고 상영시간에 맞춰 간 나는 표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과,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을 보면서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았다. 관객이 먼저 좋은 영화를 찾는다고 했던가. 대대적인 홍보 없이도 이미 <송환>은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뜨거운 반응을 모으고 있었다. 이틀 뒤, 신대방동 <푸른영상> 사무실로 김동원 감독을 찾아갔다. <송환>의 홍보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 그리고 밀려드는 인터뷰 등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송환>이 12일 만에 1만 관객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리네요. 소감이 어떠세요.
기분이 좋아. 25년 만에 극장 개봉한 게 처음이거든. 그것보다도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걸렸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고, 다큐멘터리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릴 수 있어서 좋아. 우리나라 젊은이들, 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우리 분단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보람을 느끼겠지.

┃처음 개봉을 하실 때, 관객 수나 관객의 반응 같은 것에 대한 목표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관객 수에 대한 기대치도 없었기 때문에 숫자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있어. 극장 상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배급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고, 극장에서 더 이상 상영을 하지 않더라도 지역단체나 학교 등에서 계속 상영을 할 거야. 극장 상영이 힘든 곳에서 지금 연락이 많이 오기도 하고. 그런 건 수치에 잡히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보고나서 느끼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절차에 의미가 있지.

┃요즘 계속 관객과의 대화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어떻게 이해를
  하던가요.

내가 생각한 대로 보는 것 같아. 사상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면을 더 생각했으면 했고, 통일 문제도 이념을 넘어 접근하길 바랬는데. 대부분 재미있게 보고,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았어. 최근에 연세대학교에서 한 상영회에서도 학생 모임이라서 그런지 수준 높은 질문들이 많이 나왔고, 아주 재미있었어.

┃워낙 장기간의 촬영이라 제작비를 엄밀히 따지기는 힘들겠지만, 총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어요?


그건 돈으로 따지지는 못할 것 같아. 테이프 500개정도. 그 외엔 특별히 돈이 든 건 없었지. 아, 차비가 좀 들었겠다. 작업한 것들을 나중에 필름으로 옮길 때 5000만원 정도 들었지만 그것도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송환>이 선댄스 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받았어요. 그 외에도 해외 영화제에
  초청이 많이 되는 것 같은데. 상을 받으시고 나서 주위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상패를 받고 가방이 무거워졌지. (웃음) 일단 상 받았기 때문에 극장 상영이 용이했어. 또 그 덕분에 매체를 많이 탈 수가 있었고, 힘들이지 않고 홍보와 광고가 되었다는 게 좋았지. 어차피 독립영화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특별히 내가 알려지고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나레이션을 직접 하셨어요. 원고도 직접 쓰신 것 같았는데…. 직접 하신 이유가 있나요?
나도 옛날에 연극했거든. (웃음) 내가 화자인데, 다른 사람이 하는 게 어색하잖아. 주관적 얘기라 전문 성우가 하면 이상할 것 같기도 했고.

┃비전향 장기수 다큐멘터리를 시작하신 게 92년 조창손 할아버지, 김석형 할아버지를
  모셔오면서부터인데, 원래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 관심이 있으셨나요?

아예 몰랐어.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존재조차 몰랐으니까. 그 때 알게 되었고, 같이 생활하면서 관심이 생긴 거야.

┃보다 보니 이 할아버지들이 굉장히 똑똑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나이에도 말씀들
  을 참 잘하시더라구요. 근데 감독님께서 초점을 맞추신 건 똑똑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보통 할아버지 같은 조창손 할아버지와 김영식 할아버지였단 말이에요.
  특별히 그런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는 김석형 선생한테 카메라가 많이 갔었어. 말을 많이 하시니까. 그래서 작품의 중심에 김석형 선생을 두고 시작했는데, 지내다 보니까 조 할아버지가 훨씬 더 인간적이라 주인공이 옮겨 간 거야. 너무 사상적인 건 담기 싫었었고. 험담을 하자면 김 선생은 조 할아버지한테 설거지 같은 건 다 시키셨어. (웃음) 김 선생이 나이가 15세 정도 위이기도 하지만. 또 김석형 선생은 동네에 잘 돌아다니지 않았지만 조창손 할아버지는 우리집에 자주 놀러 오셨고, 그러다보니 친해지고. 카메라가 친한 사람을 향하게 되어 있잖아.

┃<송환>을 보면서 물론 통일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한번 환기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님께서 송환에서 정말 하고 싶으셨던 얘기는
  무엇인가요?

100%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모든 문제의 근원이 사실 분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어. 다른 요인도 있긴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이념문제에 치우친 게 사실이지. 인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 정치권의 문제, 수구-좌익, 한나라당의 문제…. 이 모두 분단 상황에서 나온 것들이고.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잖아. 우리는 다르다는 것 자체를 문제로 삼고, 서로 헐뜯고,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지. 영화를 만들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어. 이념의 문제 때문에 가족과 화해하지 못하고, 어머니 산소에도 가지 못하고. 분단이 국가적인 문제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이런 상황을 낳고 있구나.
너무 이념에 의해 살다보니 사람에 대한 편견과 평가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도 분단현실 때문이잖아. 사실 직접 만나보면 좋은 사람들이거든.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모두 사람이라는 거지. 이념이 다르다고 욕하고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공존할 수 있는데 우리는 너무 관용성이 없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분단, 그리고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랄까. 그 분들이 전향을 하지 않은 이유, 자기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

┃너무 방대한 양이라 편집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 기준으로 편집을 하셨나요.
계획 없이 찍었기 때문에 촬영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를 마련하다보니 힘들었지. 분단의 역사를 설명적이지 않게 가능한 쉽게 전달을 해야 하는 것과 기본 사실을 재해석하는 것도 힘들었고. 어느 한 사람에게 이야기가 몰리면 폭이 좁아지고, 너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기 때문에 보편성을 위해서라도 많은 분들을 등장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결국은 균형의 문제가 가장 어려워. 등장인물의 균형 맞추기, 이념의 문제에서 북에 대한 나의 시선이 너무 비판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우호적이어도 안 된다는 시선의 균형 맞추기 같은 거.

┃지금도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송환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어요.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거든요. 그런 점에서 1차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되기
  전, 이 영화가 완성되어 알려졌더라면 주위 환기에 더 큰 역할을 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일단 많은 장기수들이 송환된 상태니까요. 개봉시기를 지금으로 잡은
  이유가 따로 있나요.


게을러서 그렇지. (웃음) 원래부터 장기수들이 송환되는 것까지를 생각했어. 그런데 송환이 끝나니까 이미 할 얘기는 끝나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 그래서 그 후의 이야기, 송환된 다음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 남한에 남은 사람들과 북으로 간 사람들. 애초 계획은 내가 평양에 가서 다시 만나는 것이었는데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아서 어떻게 끝낼까 고민이 많았지. 별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평양에 갔던 후배가 잘 찍어줘서 이렇게 끝내게 된 거야.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힘들었던 점도 많을 것 같아요. 특별히 기억 나는 점이 있나요.
지나서인지 힘든 게 없었던 것 같아. 찍으면서 그분들보다는 내가 불편하지. 감정교류에 충실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찍어야 하니까. 너무 걱정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끝내기만 하자고 생각했어.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고, 그래서 다양한 자료화면도 구할 수 있어서 지금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야.

┃송환되지 않으신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반응은 어때요?
국내 비전향 장기수 분들을 거의 다 알고 있고, 자주 만나는 편이야. 영화에 나오셨던 분들은 같이 홍보도 다니고, 관객과의 대화도 하고 그러지. 아무 말씀이 없는 분도 계시고, 재미없다고 불평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이념성이 없다거나 너무 휴머니즘적으로 흐르지 않았는가에 대해 불만인 분들도 계셔. 감옥 안의 이야기가 부족하다고도 하고.

┃이번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사회적인 바람이 있다면요?
1000만 관객 넘는 거. (웃음) 분단 현실에 대한 인식과 통일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 통일이란 단어를 굳이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걸 얘기하고 싶었지. 이걸 사회에 환기시키는 게 바람이야.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특히 독립 다큐멘터리는 참 힘든 분야인 것 같아요.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해.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거든. 다 힘들지만 어떤 힘든 것을 택하겠는가의 문제.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해. 독립영화 감독은 물론 경제적인 문제는 있지만 형식과 내용에서 자유롭고, 하고 싶은 얘기도 담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아. 사실 상업영화 감독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정말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거든.

┃계속 다큐멘터리를 하게 되는 원동력이나 다큐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다큐멘터리는 참 재미있어. 관찰하는 것, 어느 한 분야에 들어가서 헤집어 내는 것, 그것을 통해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 모두 거짓이 아닌 ‘진짜’잖아. 남을 구슬려서 돈을 뜯어오거나, 촬영 현장에서 수많은 스텝을 통제하고 배우에게 연기를 시키거나 하는 일은 난 잘 못할 것 같아. 혼자서 카메라 하나 달랑 매고 돌아다니는 게 나한테 맞거든. 다큐를 찍으면서 만난 사람과 관계,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신할 수 없지.

┃<송환>을 기점으로 앞으로 독립영화도 시장이 더 커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송환>이 이렇게 뜨는 거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 독립영화가 이렇게 뜨면 쉽게 뜨고 금방 잊혀지는 법이거든. 그보다는 독립영화 전용관 같은 근거지가 있어서 극장에서 오래 상영을 하고, 그를 바탕으로 안정되게 독립영화를 알리고,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층을 넓혀 나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 송환이 하루에 한 번만 상영을 하더라도 다른 독립영화들도 상영이 되었으면 좋겠어.

┃감독님께서 지금까지 찍으신 영화를 보면 어떤 맥이 있는 것 같아요.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있나요.

처음에 시작한 게 도시 빈민이었기 때문에 계속 그 얘기를 다루고 싶어. 빈곤의 문제, 그 후엔 가난의 문제. 빈곤과 가난은 다른 거야. 나도 처음엔 빈곤이 제거되어야 할 악으로 보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구. 가난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많이 가질 수 있는데, 덜 가지고 버린다는 거 아냐? 장기수 선생들도 가난하게 산다고 할 수 있지. 김석형 선생처럼 고위직이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신념을 지키는 것이고. 자기를 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지.

┃앞으로 다루시고 싶은 분야, 그리고 시작하신 일이나 계획 중인 작품이 있나요.
상계동 주민의 뒷 이야기. 마찬가지로 봉천동, 행당동 주민들도 그렇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그래. 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게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혹은 잊고 사는지. 이건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라고 할 수 있어. 앞으로 2차 송환 운동도 기록해야 하고. 지금 당장은 일을 못하고 있지만. 아, 찍기 시작했지만 송환 개봉 때문에 손을 놓고 있는 것들도 있고.

1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고 나니 <송환>의 근저에 흐르는 따스함은 사상과 이념이 아닌 ‘사람’을 담아내려는 김동원 감독의 인간적인 시각에서 비롯됨을 느낄수 있었다. 이렇게 인간적이기 때문에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도 그에게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송환>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강제 전향된 장기수들이 송환을 바라고 있고, 우리나라에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권이 무시된 채 같아지기를 강요 당하는 사람이 있는 한 <송환> 이후의 프로젝트는 계속 될 것이다.

그의 허름한 작업실을 나서니 마침 봄볕이 따사롭다. 4월이다. 평양으로 간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분명 남한의 이 봄날이 그리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같은 땅에 있는데도 볼 수 없는 평양의 봄이 궁금하다. 우리의 염원만큼 통일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일까.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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