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에 부는 인문학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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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대가 굵어지다 알찬 열매를 맺는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인문학’이란 씨앗이 들어왔다. 인문학 서적이 인기를 끌고 누군가를 평가할 때도 인문학 지식을 기준 삼는다 한다. 과학과 이성이 상식으로 통하는 시대에 인문학이 피어나고 있다. 이 씨앗은 어디서 왔을까. 우연이 아니라면, 이를 어떻게 가꾸어야 할까.

MIT의 한 건물 앞에 사람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뒤로는 큰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건물이 놓여 있다.
세계적인 공학 대학 MIT 대학교.

인문학, 자연과학의 오래된 만남

인문학이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언어•문학•역사•철학•예술•종교학 등이 이에 속한다. 자연과학이 객관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비해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를 탐한다. 그래서일까, 인문학은 명쾌한 답보단 질문을 남긴다. 인문학자 도정일에 따르면 인문학은 ‘어떤 형태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한다. “나는 왜 이 행성에 왔는가?”,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가”와 같이 묻기는 쉬워도 쉽게 답을 떼기 어려운 질문 말이다.

나무와 해, 산, 별이 그려진 천제의 모형이다. 해에는 인간 형상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우주의 원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출처 : COSMOS, NGC)

사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반문하겠지만,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날카롭게 구분 짓기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신학과 과학은 모두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창이었다.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게 세상의 원리를 묻는 것과 길가에 핀 꽃잎의 규칙을 탐구하며 자연의 원리를 탐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두 영역은 의도치 않는 간극을 맞이한다. 몇백 년간 다른 지점을 바라보는 것 같더니 최근 오래된 만남을 이루고 있다.

21세기를 지나는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더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안다. 예술의 조형미를 말할 때 기하학을 빼고 말할 수 없고 인간의 마음을 말할 때 뇌과학의 도움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두 영역은 서로를 보완하며 인류의 지성을 넓히고 있다.

MIT에 부는 인문학 바람

MIT에서도에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다. 높은 수준의 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이곳은 일찍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험실 연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대부분의 학부생이 음악•예술학•철학 등을 필수로 수강하고 최첨단 기술과 예술가의 고뇌가 만나 작품을 탄생시킨다.

① Art at MIT
예술이 과학 기술을 만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비로소 작품이 되었다. ‘MIT VISUAL ART CENTER(LIST)’와 ‘MIT Museum’에서 벌어진 일이다.

MIT의 시각 예술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입구에 계단이 있다. 흰색 타일과 검은색 창문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시각 예술 전시를 위한 공간 MIT VISUAL ART CENTER(LIST)의 모습.

MIT VISUAL ART CENTER는 예술을 통해 MIT의 위상을 드러낸다. 다양한 기술을 활용한 현대 미술과 디자인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전시회 모습이다.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것 같은 날개 모양이 벽에 붙어있거나 제각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다.
취재 당시 LIST에서 전시 중이었던 SERGEY TCHEREPNIN의 전시 모습.

지난 7월 15일부터 10월 19일까지 선보였던 SERGEI TCHEREPNIN의 전시. 이 전시는 소리 내는 조형으로 기계와 인간의 소통을 지향한다. 혓바닥 모양의 금속 조형은 위치와 모양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 더 세게, 빨리 건드릴수록 소리는 점점 커진다.

MIT의 비주얼 아트 센터에서 전시했던 작품들의 모습이다. 회화, 필름, 조형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전시했음을 작은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MIT VISUAL ART CENTER 에서 전시했던 작품. 기술을 적극 활용한 점이 눈에 띈다. (출처 : MIT VISUAL ART CENTER)

MIT의 과학 기술이 어디쯤 왔는지 궁금하다면 이곳을 주목하자. ‘MIT Museum’에서는 교수진뿐 아니라 학생들의 솜씨를 감상할 수 있다. 로봇, 홀로그램, 전기를 활용해 공학 기술을 이리저리 뽐낸다.

MIT의 MUSEUM의 입구다. ‘MIT MUSEUM BUILDING’이 붉은 색으로 써있다. 20여 명의 사람들이 입구 앞에 서 있다.
MIT MUSEUM의 입구.

MIT의 MUSEUM 전시장 내부. 한 남자가 MIT가 개발한 로봇을 허리를 굽이고 관찰하고 있다. 주변에 서 너명의 사람들이 이동 중이다.
MIT MUSEUM의 전시장 내부. 한 남자가 전시 로봇을 관찰하고 있다.

MIT의 MUSEUM에 전시된 작품으로 MIT MUSEUM에서 전시 중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3D의 물건을 흰색 스크린 위에 올리면, 2D로 그대로 재현한다. 왼쪽 사진은 휴대폰을 스크린 위에 올려놓은 사진이다. 오른쪽 사진은 휴대폰을 떼고 난 후 휴대폰의 이미지가 남은 스크린의 모습이다. 휴대폰 모양 그대로 스크린 위에 남아 있다.
이 기구는 3D의 물건을 흰색 스크린 위에 올리면 2D로 그대로 재현한다.

이곳에선 내년 1월까지 키네틱 아트(Kinetic Art)를 중심으로 <5000 Moving Part> 전이 진행될 예정이다. ‘키네틱 아트’란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을 말한다.

갈대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작품. 양 옆으로 움직이는 막대에 따라 다른 소리와 이미지가 등장한다. 왼쪽은 분홍색 이미지와 함께 움직이는 작품, 오른쪽은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에 맞춰 움직이는 작품의 모습이다.
갈대밭에 온 착각을 일으킨다.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는 막대에 따라 배경음과 이미지가 변한다.

홀로 연주하는 바이올린? 기계의 운동으로 바이올린 위의 깃털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다. 바이올린은 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위에 짙은 밤색의 깃털이 현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다.
홀로 연주하는 바이올린? 기계의 운동으로 바이올린 위의 깃털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MIT Museum은 우주 공학에서 홀로그램까지 인간의 기술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룬다. 뛰어난 기술 뒤에 예술이 있다. 작가의 철학적 고뇌를 기계에 담아 전하고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이 말을 건넨다.

② MIT의 인문대학, MIT School of Humanities, Arts & Social Science
‘MIT SHASS(MIT School of Humanities, Arts & Social Science)’는 MIT가 본격적으로 인문학 교육을 위해 설립한 대학이다. 보통의 인문대학처럼 인류학•역사•철학은 물론이고 경제학과 정치학도 포함한다.

MIT SHASS의 역사학과 홈페이지의 메인이다. 왼쪽 위에 ‘History’라고 적혀있다. 그 아래 홈페이지를 설명하는 섹션이 구분돼있다. 오른쪽으로 회화작품이 있는데, 사람들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물건을 고르고 있는 그림이다.
MIT SHASS 역사학과의 공식 홈페이지 메인.

“Great Ideas Change The World.” MIT SHASS의 슬로건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은 인문학적 성찰에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학문의 고매함은 현실의 냉혹함에 풀이 죽곤 한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도 현실에 적용되면서 한계와 변수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은 손가락을 위로 치켜 하늘을 가리키고, 현실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그를 타박한다.

MIT SHASS에 인문학적 이상과 현실의 만남을 고민한 연구소가 있다. ‘J-PAL(Jameel Poverty Action Lab)’이 전 세계의 가난을 줄이기 위해 설립된 경제 연구소다.

설립자 ‘Abdul Latif Jameel’의 이름을 따 설립된 J-PAL. 농업, 교육, 노동을 주제로 전 세계 가난을 줄이기 위한 실천하는 연구소다.  이 건물의 입구로 ‘Abdul Latif Jameel Poverty Action Lab’이라 적혀 있다.
설립자 ‘Abdul Latif Jameel’의 이름을 따 설립된 J-PAL. 농업, 교육, 노동을 주제로 전 세계 가난을 줄이기 위한 실천하는 연구소다.

MIT J-PAL은 MIT SHASS 경제학과에서 발전한 연구소다. 전 세계의 빈곤 퇴치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프로그램의 효과를 측정한다. 빈곤이 개선됨을 과학적 연구를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하면 이를 정책으로 제안하는 업무까지 맡고 있다. 프로그램은 농업•경제•교육•노동•건강• 관리•환경 총 7개의 분야로 나뉜다. J-PAL에서 농업 분야의 Research Manager를 맡은 ‘Ben Jaques-Leslie’를 만나 J-PAL의 구체적인 활동에 관해 묻고 들었다.

Mini Interview
MIT J-PAL 농업분야 리서치 매니저 Ben Jaques-Leslie

J-PAL의 Research Manager, Benjamin의 사진. 흰 얼굴에 푸른 눈, 갈색 머리를 하고 흰색 체크 남방을 입은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J-PAL의 농업분야 Research Manager, Ben.

럽젠Q : J-PAL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합니다.

J-PAL은 전 세계의 가난을 줄이기 위해 연구하고 실천하는 연구소입니다. 교수와 연구원들의 네트워크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저희는 크게 3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는 ‘프로그램 개발과 평가’인데, 저희가 개발한 프로그램이 해당 지역의 빈곤 개선을 위해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를 평가하죠. 둘째는 ‘정책 제안’인데요.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그 제안의 효과를 입증하고 이를 입법가에게 제안하죠. 마지막으로 그 지역의 전문가를 교육하는 ‘능력 개발’이 있어요. 앞으로 J-PAL의 도움이 없이 문제를 발견하고 조사한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교육하는 거죠.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사회 개선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럽젠Q : 정책이 얼마큼 법안으로 변환되나요?

사실 비율이 높진 않아요. 정책 제안이 실제 정책으로 채택되긴 정말 힘들어요. 여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로, 몇몇 사람들은 저희의 정책 제안에 관심이 없어요. 조사의 효과를 입증해도 딱히 관심을 두지 않죠. 또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요. 마지막으로 시기가 안 맞는 경우 제안한 정책이 아무리 설득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겠죠.

럽젠Q : J-PAL의 성공적인 사례는 무엇이 있나요?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사례를 말씀 드릴게요. 동남아나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기생충이 있는데, 이 기생충은 사람을 물어 질병에 걸리게 합니다. 기생충에 물린 아이들이 구토와 고열 증세를 보여서 학교에 못 가게 되었죠. 어린이들의 출석률은 떨어졌어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이클이란 연구원이 ‘Deworming’란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매우 성공적이었어요. 아이들이 약을 먹고 몸이 좋아졌고 자연히 출석률도 높아졌죠. 효과가 증명되면서 케냐 정부와 함께 일하게 되었고, ‘Deworm the world’라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인도를 포함한 다른 나라에 프로그램이 전달됐고요.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6천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기생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게 됐어요. J-PAL이 이룬 가장 큰 성과죠.

한 아프리카 소년이 기생충 퇴치를 위한 약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 소년의 피부는 검고, 녹색 니트를 입고 있다.
한 아프리카 어린이가 기생충 퇴치를 위한 약을 받고 있다. (출처 : evidenceaction.org)

럽젠Q : 당신이 J-PAL의 연구원이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했어요. 졸업 이후 커피숍을 몇 년간 운영했죠. 그러다 평생 직업을 찾고 싶었어요. 평소 ‘가난’에 관심이 높았는데 마침 J-PAL을 알게 되었습니다. J-PAL에 온 근본적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곳은 지역 사람들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을 세세하게 파악해요. 그리고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매우 과학적이고 엄격한 연구를 하죠. 이 점이 다양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오게 된 이유입니다.

Ben의 연구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선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그의 뒤로 공지판이 있다. 다양한 메모가 압정으로 꽂혀 있다.
Ben의 연구실에서. 그의 뒤로 보이는 메모와 문장이 인상적이다.

럽젠Q : J-PAL의 농업분야 연구 매니저로서 당신의 꿈은 뭔가요?

제가 농업 분야를 맡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농업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그러나 상당히 까다로운 분야죠. ‘건강’이나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그 결과가 명확합니다. 약을 처방하거나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함으로써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죠. 그러나 농업은 달라요. 시장과 연관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변수도 많고, 작물을 기르는 시간도 오래 걸리죠.
J-PAL이 전 세계의 가난을 줄이겠다는 비전을 갖고 다양한 연구와 시도를 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프로그램의 영향력은 크지 않습니다. 빈곤한 국가의 빈곤 상태는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어요. 물론 한국과 같이 매우 가난했지만 기적을 일으킨 나라도 있죠. 그러나 대부분의 빈곤 국가가 가난을 탈출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농업 분야 연구원으로서 앞으로의 꿈은 제 몫을 다해 가난한 국가의 농업 구조에 도움이 되는 거예요.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네요.

지금, 기술이 인문학과 만나야 하는 이유

매일 밤 아홉 시, 텔레비전에서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소식이 꼭지를 장식한다. 인간의 지성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대부분이다. 변화가 필요하다. 두 학문의 만남이 변화의 실마리를 제시할 수도 있다. 과학기술에 인문학 지식을 얹는다고 당장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기술 발전이 상식이자 미덕으로 통하는 이 시대에 ‘의미와 목적’이라는 다소 무거운 질문이 더해지면 인류의 지성은 더 바람직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과 과학기술은 분명 좋은 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후자의 최전선을 달리던 MIT에서 보여주고 있다. 올바른 정신과 건강한 몸이 하나 되어 최상의 결과를 보여주듯, 둘의 바람직한 만남을 자주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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