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백년, 바람의 동료들> l 잊고 기억하라

민족, 역사, 조국… 내일까지 통일에 대한 포스터를 숙제로 해 가야 하는 초등학생 입에나 오르내릴 단어들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백 년 전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핫이슈가 될 수도, 잊혀질 수도 있는 선택이다. 하지만 요 옆 섬나라에는 숙명처럼 백 년 동안 기억과 맞붙어온 사람들이 있다. 이 연극은 기억에 대한 오마주이자 평생을 경계에 섰던 그들의 고단을 보듬는 손길이다.

집을 잃은 사람들의 섬 ’이카이노’

조명이 켜지고, 제목만큼 옛스러운 복장과 어투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등장한다. 분위기나 대화내용은 꼭 현대문명이 꽃을 피우기 전의 시골 마을 같다.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무대 위의 시간이 21세기라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이 극이 현실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에 두 번 놀란다. 과거를 끌어안고 사는 마을. 그곳은 바로 일본 내의 조선인 구역 ‘이카이노’다.

연극의 주인공은 ‘이카이노’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다. 개업 20주년을 돌파한 주점 ‘바람따라 사랑따라’의 축하 파티를 위해 하나 둘 사람이 모여든다. 이카이노 사람들의 삶은 심플하지가 않다. 어느 집에 들어서나 저마다의 처절한 역사를 품고 있는 동네가 바로 이카이노다. ‘바람따라 사랑따라’에서 벌어진 수다 판의 말꼬리 끝에 저마다의 일대기는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동희’는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한국에 유학을 갔다가 독재 정권에서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아직까지도 코피를 지린다. 늙은 요리사 ‘아재’는 북한으로 이주할까 고민하다 이미 이주한 삼촌으로부터 북의 현실에 대한 전갈을 받고 가지 않았다. 그는 평생 가족을 가슴의 한으로 묻은 채 산다. ‘겐’의 아버지는 조선 국적을 버리고 일본인의 양자가 되라는 권유를 거절한 뒤 갖은 수모를 겪는다. 반면 ‘영미’의 아버지는 ‘조센징’이라 놀려대는 일본 학생을 단숨에 제압할 만큼 잘 나갔음에도 생의 막바지에는 결국 일본에 귀화 신청을 한다. 연극은 이 많은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좇아가며 쉴 틈 없이 흐른다. 남한, 북한, 일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던 그들의 과거를 쫓아서 홀린 듯 눈알을 굴리다 보면 두 시간 십 분은 훌쩍 흘러 있다.

나는 누구인가, 답을 위한 고집

역사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역사에 대해 모르면 모를수록 이 연극은 더욱 마음속에 파급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 정도로 인식되던 재일교포들의 삶은 더 이상 그렇게 단순히 정의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된다. 이카이노의 사람들은 일그러진 공산주의의 표상인 북한으로도, ‘빨갱이’ 취급을 하는 독재정권 치하의 남한으로도 갈 수 없었다. 그들은 일본에 귀화할 수 있었음에도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투표권은 안 주지만 세금은 내라는 부당한 대우를 견디면서도 꿋꿋하게 일본 내 ‘조선인’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차별이 일상이 된 세월을 살아 오며 이카이노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점차 국가와 민족, 역사에 대한 주장은 날카롭게 엇갈린다. 자유의 대가로 역사를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온전히 살겠는가? 이 연극은 그들의 아득한 작은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과거의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그들의 전쟁을 그저 타인의 선택인 양 강 건너 불 취급하기는 어렵다. 그들과 우리는 멀어졌지만 끈끈히 공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그렇게 지키고 싶어하는 ‘어떤 것’ 말이다.

당신의 동료들을 기억해 주세요


모두의 어렵고 슬픈 사정에 비하면 믿기 어렵게도, 이 연극은 아주 재미있다. 텍스트로만 접해도 기가 빨릴 것 같은 인생사이건만 등장인물들은 결코 스스로의 고난에 잠식되지 않았다. 처절하게 울고 싸우고 괴로워하다가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빵빵 터지는 개그로 심각한 분위기의 관객석을 뒤집어 놓는다. 관객석에서 쏟아지는 진실한 웃음이야말로 어쩌면 이 연극이 바라는 재일교포의 미래인지도 모르겠다. <백년, 바람의 동료들>은 묵직하지만 또한 관객을 편하게 해 준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오는 ‘민족’과 멀어진 우리의 삶을 질책하며 심리적 반감을 한 가득 안겨주는 작품을 상상한다면 그러한 걱정은 말아도 좋겠다. 거창한 교훈도, 뒤늦은 계몽도 없다. 연극은 처음부터 모두에게 정답이란 없음을 기본적으로 안다. 그저 극의 막바지에 이카이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이렇게 조언할 뿐이다. ‘잊고, 기억하자’라고. 막을 내릴 때까지 한바탕 징과 꽹과리를 치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이카이노 사람들의 축제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시간을 선사한다. 아픈 과거를 곱씹고 또 곱씹던 이카이노 사람들에게는 내일을, 너무 잊고 살던 우리에게는 어제를.

연극 <백년, 바람의 동료들>은 일본극단 ‘신주쿠 양산박’의 김수진이 연출한 작품으로, 경계인으로 살아온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재일교포 100년 역사와 치열했던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이 작품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경계인으로 살아온 김수진 연출의 자전적 고민 또한 담겨 있다.

EVENT

배 잡고 뒤집어지게 웃다가 집에 오면 역사책을 뒤적이고 싶어지는 1타 2피의 연극 <백년, 바람의 동료들>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바람의 동료들과 해후해야만 하는 당신의 염원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 이벤트 기간 : 6월 15일(수) ~ 6월 21일(화)
  • 초대 일시 : 6월 23(목) 오후 8시 공연
  • 초대 인원 : 5명 (1인 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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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다큐멘터리 속 재일교포들은 통일된 조국으로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남한으로 갈 수도 북한으로 갈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하지만 모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집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문화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단지 1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읽은 후기를 통해, 재일교포들의 삶에 대해 이렇다할 생각도 가지지 않았을 만큼 무관심했던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아왔던 100여년간의 삶과 그 시간동안 함께했던 상처와 고단함들,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을 수 있도록 저를 자극하기에 충분할 연극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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