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밖에서 잔다, 꿈꾸는 슬리퍼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네” _ 패닉의 <달팽이>
가요 속 등장하는, ‘집’이란 공간이 주는 고독한 감성. 하지만 등록금, 취업난과 더불어 대학생을 옭아매는 주거난이 존재하는 현재, 집은 절망이다. 대부분 학생이 무거운 짐을 위태롭게 짊어진 자취생과 하숙생으로 살아가지만, 이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한 학생은 학교 굴다리 밑에 텐트를 쳐 거주하기 시작했다. ‘꿈꾸는 슬리퍼’의 탄생이었다.
* ‘꿈꾸는 슬리퍼’의 요청에 따라 이름은 예명으로 표기합니다. 슬리퍼는 sleeper와 slipper의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아래 이들을 통칭해 슬리퍼라고 부릅니다.


‘꿈꾸는 슬리퍼’는 한 청년의 생각에서 시작해 이런 문제에 공감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이면서 10명 이상의 멤버로 구성된 노숙모임이다. 현재 2개의 텐트에는 3명의 실제 거주자가 있다. 그들에게는 늘 호기심 어린 웃음과 동정 어린 시선이 머물지만, 천만의 말씀.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볼 땐 과감한 시야 조정이 필요하다. 세상에 대한 고민이 압축된 ‘꿈꾸는 슬리퍼’의 시야로 말이다.

오늘 집에 가지 말까?

술자리가 무르익는 오후 11시. 집이 조금 먼 친구라면, 집에 가는 막차와 새벽 첫차를 타는 고민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 이 노숙 모임은 다소 사소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예요. 차 끊기는 시간이 항상 술자리가 무르익는 시간인 거죠. 그래서 친구 집에 많이 묵었는데, 자꾸 신세 지는 게 미안해지더군요. 보증금은 없으니, 값싼 고시원을 찾아보게 되었죠. 그런데 보증금 없는 고시원도 30~35만원, 여기에 에어컨과 침대 옵션까지 포함하면 40~50만원까지 월세가 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학교에서 한번 살아볼까?’ 생각했죠.

본격적으로 학교에 텐트 치고 살게 된 정훈(예명). 수중의 돈으로 도저히 집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술 마시고 집에 못 들어가는 것이 텐트에서 사는 이유라면, 청춘 시트콤의 상황설정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1년 반 동안 유지한 노숙 생활이 재미만의 이유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역시 그들의 텐트는 기본적인 거주공간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텐트의 의미는 소통의 광장이라고 생각되었으면 좋겠어요. 가난해도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을 통해 빈곤 해소에 도움이 되는 거죠. 또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 소통을 통해 가난하게 만든 세상과 저항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유난히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텐트는 가난의 문제를 부여잡은 굵직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주거문제가 자연스럽게 소통되는 이곳에서 간편한 슬리퍼 차림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장기 MT, 언제 끝날지 모르는

누구나 정비된 야영장 텐트에서 보내는 신나는 1박 2일 MT 경험은 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가던 작은 공간. 하지만 야영장인 아닌 학교에서 보내는 1년 반의 텐트 생활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야생 버라이어티를 가볍게 비웃을 듯한 이 슬리퍼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세면 도구가 모두 있기 때문에, 세면은 학교 샤워장에서 해요. 빨래는 주말에 한꺼번에 집에서 해결하고요. 먹는 것은 주로 밥 모임을 통해 해결하는데, 2주에 한 번 정도 1만원을 걷어 장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해먹죠.

의식주가 유기적으로 잘 해결되는 그들의 생활이지만, 텐트는 혼자 조용히 지낼 수 있는 기능이 결핍된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책도 마련했다.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아무 곳에 내려 걷거나 주말엔 집에 가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하지만, 서로 다른 자성의 이끌리듯 어느덧 다시 학교로 온다는 그들은, 1년 반이 넘는 시간을 진정한 가족처럼 끈끈하게 함께 했다.


그들의 탈 없던 나날도 잠시, 학교 측에서 반갑지 않을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직접 관리자에게 허가받아 별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게 1년 반 동안 지속하니까, 이제 꺼리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텐트 부지와 전기를 허락받지 못했죠. 그래도 다시 한번 관리자에게 취지나 의도를 이야기해서, 텐트는 겨우 치고 있어요.

아직 학교 측과의 전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경비 아저씨와 청소원 아주머니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다가, 일부 반찬을 챙겨주는 아주머니의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텐트 속 속삭이는 너와 나의 고민


꿈꾸는 슬리퍼는 텐트 거주 외에 많은 활동을 한다. 단순한 텐트 거주는 그들 활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공감하는 여러 사람과 함께 서로 소통하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활동의 첫 번째는,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취지에 기획된 ‘항동아트쎈타’. ‘항동’은 구로구 항동에 있는 성공회대학교의 지리적 위치를 나타내며, 다소 촌스러운 명명인 ‘쎈타’는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품 주제는 주로 누구나 느끼고 있는 문제로 잡는다.

두 번째 활동은 ‘작은 영화관’.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단순히 취향이 맞는 영화를 본 후 토론한다. 야외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덕분에, 지나가는 주민까지 덩달아 관람하기도 한다.

세 번째로 ‘가난교실’이란 서로 가진 재능을 공유하는 자리도 있다. 작년엔 일본어를 할 수 있는 멤버의 제안으로, 일본 시민운동가 마쓰모토 하지메 쓴 <가난뱅이의 역습>의 원문을 번역했다. 이는 프리터 전반(全般) 노조의 생존 방법을 우리 식으로 바꿔보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재 이를 제안한 멤버가 필리핀 봉사활동을 떠나면서 폐강되고 지금은 또 다른 멤버의 재능으로 기타 교실을 열고 있다.

스스로 먹을 채소를 직접 재배하는 것이 마지막 활동 리스트다. 매일 인스턴트 음식을 먹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긴 슬리퍼는, 직접 자신이 먹을 채소를 심기 시작했다. 현재 오이, 가지, 고추, 토마토들이 화단에서 자라나고 있다.


이처럼 텐트라는 공간은 단지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느끼고 개선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점. 결국 혼자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청춘에, ‘스펙’이 빵빵해야 뒤처지지 않는다고 종용받는 청춘에 그들은 고하고 있었다.

“혼자 가지 말고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라고.

아침마다 귀를 때리는 시끄러운 쓰레기차 소리, 동네 주민의 발걸음 소리를 알람으로 삼아 일어나는 꿈꾸는 슬리퍼. 텐트는 그들에게 가장 편안한 평화를 주는 공간이다. 겨울에는 냉기가 올라오고 여름에는 음식이 쉽게 상하는 조건 따윈 문제 되지 않는다. 이곳은 20대의 모든 고민을 편안하게 발설하는 대나무 숲 같은 존재이기에 때문이다. 차오르는 탄식, 가슴이 타들어가는 답답한 고민은 이곳에서 시원하게 해체된다. 마치 편안한 슬리퍼를 싣고 행복한 단잠에 빠진 기분처럼.

그들을 만나고 싶다면 http://club.cyworld.com/dsleeper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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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앗 텐트에서 생활하고 학교 샤워실에서 씻으시는데도 어찌 저리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시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꿈꾸는 슬리퍼 화이팅!!!
  • 학교에서 자볼까? 생각은 했었는데 ㅋ 진짜 이런분들이 계셨군요! 노숙의 새로운 대안을 보여준것같아서 획기적이구 ㅋ 재밌는 기사였습니당!! 영상보니까 비바람 엄청 온것같던데 ㅠㅠ 기자님도 수고많이하셨어요^^
  • 럽젠집착남

    오 재밌는데요?
  • 이소연

    읽으면서 옷은 어디다 걸어놓고 장마때는 어떡할지가 궁금해졌어요 ㅋㅋ 비싼 월세때문에 누구든 한번 쯤 꿈꿔봤을 텐트생활을 진짜 장기로 하고 있는거 정말 멋지고 용기있어보여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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