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걷고 싶은 날 – 비 갠 다음 날 신촌에서 홍대까지

[4주 차] 무작정 걷고 싶은 날

그런 날이 있다. 어딘가를 가고 싶은데, ‘어딘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날. 매정한 날씨의 요즘이라면 심란함은 한층 깊어진다. 이땐 무조건 이 루트를 모방해라. 여기 주별 4가지 스타일에 따라.


서구화된 문화 탓인지, 현재를 사는 한국인은 서양에서 넘어온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질병을 더욱 감칠맛 나게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생활곳곳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담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풀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이번에 소개할 충전루트는 스트레스를 확 날려보낼 수 있는,이름하여 ‘안티 스트레스 루트’이다.

꼭 비 갠 다음 날에 걸을 것

신촌에서 홍대를 가건, 홍대에서 신촌을 가건 순서는 상관없다. 단, 반드시 비 개인 다음 날에 걸어야 한다. 평소의 이 루트는 수많은 사람의향취와 연기, 먼지 등 각종 이질적인 냄새들이 뒤섞여 ‘나’가 아닌 ‘번화함’에 압도당하기 쉽다.
비 오는 날에도 걸으면 안 된다. 비 오는 날에는 ‘새벽 4시’ 감성과 맞먹는 ‘비 맞고 싶은 감성’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때문. 비가 갠 다음날은 쌀쌀해져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아 거리가 비교적 한산하고, 거리에서도 먼지가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제법 상쾌한 공기를 맡을 수 있다. 무엇보다 ‘감성’에 취하지 않고,‘나’를 둘러싼 스트레스에 대해 명확하고 심층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번엔 신촌에서 홍대까지

준비물은 딱히 필요 없다. 말 그대로 ‘무작정’ 걷는 힐링 루트인 만큼 나의 흔적을 기록할 카메라 그리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스마트폰과 이어폰, 생수 한 통이면 된다. 특히 최근에 꽂혀 무한반복 하는 노래가 있다면 휴대폰에 담아 들으며 걸어도 좋다.

출발은 신촌역 1번 출구, 현대백화점 바로 뒤에 위치한 창천 어린이 공원에서 시작한다. 출발 전 벤치에 앉아오늘 내가 걸으면서 생각해야 할 문제들을 끄집어낸다. 정리를 끝낸 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걷기 시작한다. 현대백화점 옆길을 지나 큰 대로로 나와서 우회전을 하면 가발과 골동품 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난다. 걷다가 출출하면, 근처 포장마차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해도 좋다. 오늘 선택한 메뉴는 온 국민의 간식, 튀김과 떡볶이!

Place 대원이네, 신촌 현대백화점 맞은편동교동 가는 길에 위치
Price 튀김, 떡볶이, 순대, 1인분 2,500원
Tip! 마음에 드는 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비벼주시는 사장님과, 쫀득쫀득한 식감이 입에 딱 달라붙는 떡볶이가 포인트. 노점 형태로 되어있어허기진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유입되는 곳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옛날 레코드판을 파는 음악사를 발견할 수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서는 레코드판을 틀었었다. 어머니가 결혼 전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셨던 이유로, 우리 집은 적어도 음악에서만큼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속도가 느렸다. 오래된 것이 주는 감동이랄까.레코드판을 돌릴 때 들리는 미세한 마그네틱 긁히는 소리와 깊이 있는 소리가 좋았다. 이렇게길을 걷다가 마주한 오브제에서, 과거 추억에 대해 보상받을 때의 감흥은 그 어떤 방법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준다.

바로 이어지는 길은 교차로. 이 길이 바로 오늘 루트의 핵심 코스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직선으로 쭉 뻗은 이 길을 걷다 보면어느새 합정을 지나고, 홍대를 지나 호젓한 상수동에 어귀에 도착한다. 계절마다 느끼는 풍경이 다른 것도 이 길의 묘미. 요즘 같은 때면 다가오는 봄기운에 취해 좀 더 싱그러운 바람의 향취를 만날 수 있다.

고가도로 밑에 뚫린 소박한 터널, 그리고 그 안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그래피티 아트. 거대한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밑에서 보행자와 자동차를 위해 어마어마한 무게를 견디고 있는 터널에게,‘홍대의 예술가들이 히트텍보다 더 따뜻한 옷을 입혀놓았다’ 라고 생각했다.


이 길을 걷는 진짜 이유는, 거리의 구역을 명확하게 경계하지 않았음에도 길의 성격이 분명하게 구분돼 있기 때문이다. 음악과 관련된 블록을 지나면, 미대 입시생들이 앞치마를 입고 거리를 가득 메운 입시 블록이 나오고, 이 블록을 지나면 대학교 정문 근처의 번잡함이 나오고.그렇게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서울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차분한 상수동이 나온다.
30분 정도 직진만 하다 보면 이처럼 정체성이 뚜렷한 4개의 블록을 만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걷다 보면혼자일 때 종종 발생하는 ‘생각의 편중화’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처음‘고갈’에 대해 고민을 했다가도 길을 걷는 사이 ‘채워짐’도 되었다가 ‘사치’로 변하며, ‘짜증’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은 ‘힐링’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빠져들었던 생각을 정리하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이때쯤 시원한 커피 한 잔을 하기도 한다.

Place a;t fox, 홍대 정문 근처 카페거리(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336-6 서교빌딩 1층)
Price 아이스 아메리카노 5,500원
Tip! 홍대 인근으로 카페거리에 위치해 많은 사람이 온다. 이성과 함께 오면 좋을 아기자기한 내부 장식이 포인트. 다양한 메뉴와 친절한 메뉴판, 좋은 음악이 있고혼자서 얼떨결에 방문해도 금세 적응할 만큼 편안한 좌석이 있다


“상수동=극동방송길가로수”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반년 만에 다시 찾은 이곳엔 극동방송국이 없어지고, ‘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흰색 철판만이 예전의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Place 스위트마노, 지하철 6호선 상수역 2번 출구 호호미욜 골목 안
Tip! 스스로 만화 속,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새롭고 신선한분위기. 아담한 공간에 이탈리아 음식의 충실한 재현,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 리조또, 디저트 등 다양한 메뉴가 포인트. 상수동까지 걸었으면 탄수화물과 열량 보충을 위해 꼭 가볼만한 곳. 혼자 가기에 딱 좋은 조용한 음악이 나오는 안락한 장소로 추천


골목길을 돌아 서교동 골목골목을 걷는다. 상쾌하면서도 호젓한 분위기에 젖은 골목에서 많은 생각이 차츰 정리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등장한 오늘의 종착지, 놀이터. 놀이터에서 한 모금 목을 축이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다잡는다.
한번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무작정 걷고 싶을 때, ‘안티 스트레스 루트’를 따라가보자. 쉽고 빠른 힐링의 충전루트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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