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맨 프럼 어스>, 그의 시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1만 4천 년, 511만 번의 해가 뜨고 5만 6천 번의 계절이 지나가는 시간.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 지고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약 3500년을 잠으로 보내고, 3800톤 정도의 밥을 먹었을 것이다. 매일 죽은 친구의 기일을 기리고,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만을 회상하는데도 한 주, 어쩌면 한 달이라는 시간을 소모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하루에 평균적으로 4km 정도를 걸었다고 가정하면 지구를 총 511바퀴나 돈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 ‘맨 프럼 어스’의 포스터. 지구의 위에서 한 남성의 실루엣이 홀로 서있다.
<맨 프럼 어스> 원작(영화) 포스터.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맨 프럼 어스>는 주인공 ‘존 올드맨’이 동료 교수들과의 고별식 자리에서 자신이 1만 4천 년을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이야기다. 지극히 평범한, 아니 심지어 모범적이기까지 하던 성인 남성이 자신의 생일 케이크엔 천 개 이상의 초를 꽂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묻고 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맨 프럼 어스>는 미국 유명 SF작가 제롬 빅스비의 마지막 작품으로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비웃는 위대한 시나리오’, ‘시대를 초월할 명작’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른다. 그 독특한 소재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구성 덕분에 지금은 영화인이라면 꼭 보아야 할 명작으로 꼽힐 정도.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나면서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사람에겐 ‘맨 프럼 어스’라는 대명사가 주어지기도 한다.

연극 맨프럼어스의 메인 포스터. 한 남성의 얼굴과 상반신에 진흙이 묻어있고 오른쪽 눈동자가 지구의 문양을 띄고 있다.

그리고 2014년 11월, 그 시대를 초월할 명작이 연극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1만 4천 년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오는, 올드맨의 거대한 이야기를 대학로 유니플렉스에서 만나보자.

필멸의 법칙을 깬 단 하나의 불멸, 연극 <맨 프럼 어스>

맨프럼어스의 극중 장면. 동료들이 소파에 둘러 모여 앉거나 서서 오래된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이 사진이 10년 전이던가?”
“세상에, 존은 여전히 사진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아!”

이야기는 동료 교수들이 올드맨의 집을 구경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무 말 없이 불쑥 떠나려는 올드맨에게 황급히 고별식을 차려준 동료들. 처음엔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지만 파티가 무르익으면서 이내 즐거운 대화가 오간다.

맨프럼어스의 극중 장면. 동료들이 고흐의 초상화가 그려진 캔버스의 뒷면을 보며 놀라고 있다.

“어머나 세상에, 이 캔버스 고흐가 썼던 거랑 똑같은 거야!”
“에이, 설마 진품은 아니겠지!”

파티가 계속되면서 올드맨의 집 곳곳에서 비범한 물건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교수들의 물음을 적당히 얼버무리려던 올드맨, 하지만 탐구정신이 투철한 교수들은 점점 더 날카로운 의혹을 제기하고 급기야 올드맨의 정체를 쏘아붙이기에 이른다.

맨프럼어스의 극중 장면. 올드맨이 먼 곳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회상하자 주변의 동료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올드맨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요, 아리스타르코스한테 지동설을 배웠죠.”
“풉, 그럼 나는 아리스토텔레스한테 생물학을 배웠다!”

이어지는 추궁에 넌지시 자신의 불사를 고백한 올드맨. 교수들은 그것을 아주 고약한 농담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계속되는 올드맨의 허언에 슬그머니 짜증이 나면서도, 마음 한편의 치솟는 호기심과 불길한 예감을 외면하기 어렵다.

맨프럼어스의 극중 장면. 안경을 쓴 여인이 왼팔을 앞으로 내밀며 무언가에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망상이야! 왜 우리한테 그런 얘길 꺼낸 거야!”
“차라리 망상이었으면 좋겠군요. 진짜 나로서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어지는 질문에 질문, 그리고 얼어붙을 만큼 냉철한 답변. 교수들은 올드맨의 고약한 농담을 깨트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지만 올드맨은 의연하게 자신의 정체를 이야기한다. ‘올드맨이 원래 광증이 있었나, 혹시 마약을 한 건 아닐까?’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흥분과 분노 속에서 올드맨의 고백은 우리의 오랜 통념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맨프럼어스의 극중 장면. 주인공 올드맨이 왼팔을 위로 뻗으며 무언가 진지한 대사를 말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법칙은 있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부정할 수 없는 법칙이 하나 또 있지.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필멸의 법칙을 깨고 탄생한 단 하나의 불멸, 필멸하는 세상에서 너무나도 오래 유지되어 온 삶, 그리고 그 불멸이 지고 가야만 했던 지독한 고독. 올드맨이 품은 세월의 거대함은 현생 인류의 얄팍한 오만을 더없이 초라하게 만들어버린다.

원작을 뛰어넘다, 연극 <맨 프럼 어스> 관전 포인트

맨프럼어스의 극중 장면. 올드맨과 그의 어깨에 양손을 올린 여인이 오른쪽을 바라보고있다.

연극 <맨 프럼 어스>는 원작(영화 <맨 프럼 어스>)의 시나리오를 충실하게 따른다. 그러나 영화에서 조금 아쉬웠던 부분마저도 완벽하게 보완하며 원작을 접했던 관객들도 새로운 이야기를 보듯 더욱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다.

지루할 틈 없는 포인트, 웃음 영화 <맨 프럼 어스>의 작품성은 의심할 바 없이 뛰어나다. 그러나 장소의 전환이 거의 없고, 모든 전개가 대사로 이루어지는 탓에 다소 지루하다는 약점이 있다. 연극 <맨 프럼 어스>는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곳곳에 유머요소를 첨가해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보다 즐겁게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관객맞춤형 공감대 형성 극과 관객은 상호 소통한다. 극이 관객에게 가까이 가고자 노력하면, 관객 또한 극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법. 연극 <맨 프럼 어스>는 한국 관객들이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우리네 정서에 맞추어 대사와 인물, 그들의 성향까지 세밀하게 조정했다. 원작을 보완한 이 배려는 관객들에게 더 큰 공감과 이해를 전달한다.

코 앞에서 살아 숨쉬는 인물들 화면과 무대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영화 <맨 프럼 어스>는 화면 너머 까마득히 먼 인물들에 공감해야 한다면, 연극 <맨 프럼 어스>는 코앞의 인물들과 함께 숨 쉬며 느낄 수 있다. 과거를 끌어당기는 올드맨의 한 마디, 그리고 분노한 교수들의 외침에 집중하다 보면 우리는 이미 올드맨의 동료가 되어 같은 눈높이로 대화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맨프럼어스의 티져 포스터. 정면을 바라보는 8명의 배우들 뒤로 지구의가 보인다.

어떤 신학자는 인간이 ‘하루’ 동안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은 27%에 불과하다고 계산했다. 이토록 인간은 하루하루를 기적처럼 살아가는 동시에,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인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성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존 올드맨. 27%의 확률을 1만 4천 년 동안 극복해온 그에겐 기적이라는 단어조차 한없이 초라해진다.

상상의 한계를 거부하고 법칙의 예외를 따르는 무대. 연극 <맨 프럼 어스>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올 겨울, 올드맨의 초대에 응해 1만 4천 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인문학적 유희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그의 시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연극 <맨 프럼 어스>
공연기간 2014년 11월 7일~2015년 2월 22일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3, 7시, 일요일 오후 2, 5시, 월요일 공연 없음)
장소 유니플렉스 2관 (종로구 대학로)
연출 최용훈
출연 문종원, 박해수, 여현수, 김재건, 최용민, 이대연, 이원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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