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배수의 고도> | 저울은 어디로 기울 것인가


서로 다른 목소리가 모여 사회를 이룬다. 이 가운데 한 목소리에 힘을 싣는 것은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절대 순탄치 않다. 온갖 갈등과 충돌이 빚어진다. 그렇다면 어떤 목소리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마치 무게가 다른 추를 양 끝에 올려놓은 저울처럼, 어떤 가치가 더 의미 있고 중요한지를 진지하게 따져야 한다.

사진제공_두산아트센터

연극 ‘배수의 고도’의 공식 포스터이다. 화면 대부분을 배수의 고도의 한글, 일본어로 채웠다. 왼쪽 아래에는 공연 정보가 적혀있다. 검정, 붉은, 흰색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연극 <배수의 고도>는 두산인문극장 2014 `불신시대` 기획 중 마지막 작품으로,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연극 <배수의 고도>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십 여년 간의 이야기를 담는다. 지진 이후 일본 사회엔 두 가치가 저울 위에 올라가 시소 타기를 반복한다. 연극은 두 가지 입장을 선명히 대비한다. 예기치 못한 비극 앞에 대립한 ‘국가의 이익’과 ‘인간성’이 그것이다. 결국, 저울이 어디로 기우는가를 지켜보는 게 극의 핵심이다. 이에 더불어 눈 앞에 드러난 현실을 덮고 가리기에 급급한 ‘언론의 불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최근 여러 일들로 언론을 믿는 것을 망설이게 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국가의 이익’에 기울어진 저울 – “회사는 일단 돈을 벌어야 한다니까요.”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 규모 9.0의 지진이 일어났다. 관측 사상 최대치다. 강진 이후 초대형 쓰나미는 센다이시를 포함한 해변도시를 덮쳤다. 찰나였다. 물결은 매우 거셌고 누군가의 터전은 아스라이 사라졌다. 쓰나미로 원전에 전력공급이 끊기면서 방사능이 유출되기 시작한다. 일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 찰나가, 앞으로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

대지진 후 2개월 즈음이 지난 도쿄의 어느 사무실. 사회 지도층들은 머리를 모았다. 국회의원, 대기업 회장, 보도 기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면 위기 상황을 외부에 알리지 않을 것인가, 전력 값이 올라 기업 가동이 어려워 해외 이전이 불가피하다, 그러면 실업자가 많아져 국가 경제에 타격이 크다… 이들의 이야기엔 피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보도 기자인 코모토는 이에 염증을 느낀다. 그는 이 재앙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결국, 재난 지역인 이시노마키에 찾아가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총 세 사람이 있다. 왼쪽엔 피해 지역 가족 중 한 명인 유우라는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상을 정리하고 있다. 그녀 주변에 두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한다. 한 사람은 코모토로 다큐멘터리 연출자이고 카메라를 든 사람은 촬영감독이다. 코모토는 촬영을 위해 유우에게 무언가를 질문하고 있는 장면이다. 대지진 후 쓰나미가 휩쓸고 간 해안 지역 이시노마키로 찾아간 코모토. 다이고 씨의 딸 유우가 밥상을 정리하고 있다.

벼랑 끝에 마주한 삶에 무력감 – “아, 깨끗하다, 깨끗하다.“

코모토는 지진 이후 이시노마키에서 가장 처절한 삶을 사는 ‘다이고’ 씨의 가정을 방문한다. 엄마를 쓰나미에 잃고 아버지, 딸, 그리고 아들 셋이 꾸리는 삶은 처참하다. 미역 된장국과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고 일본 전역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 전하는 구호물품으로 연명한다.
재난 지역에서 가장 열악한 다이고 씨네 집 풍경. 다이고 씨네 가족과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코모토, 공무원 노자키, 자원봉사자 안도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하고 있다.재난 지역에서 가장 열악한 다이고 씨네 집. 다이고씨 가족뿐 아니라 자원봉사자, 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코모토, 공무권 노자키, 자원봉사자 안도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 집 주변에 모인다.

극단의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쉽다. 물도, 음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삶이 계속되면서 다이고 가족은 인간성을 잃고 방황한다. 그러나 이들의 다른 얼굴은 비난보다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성을 잃고 휘청대는 좌절감은 생에 대한 무력감으로 치닫는다. 쓰나미 이후 너무도 많은 시신을 접한 타이요와 유우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통조림 회사 사장의 시신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깨끗하다. 깨끗하다.” 먼 발치에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다그치기엔, 이들은 너무나 지쳤다.

다이고 씨네 막내 아들 타이요가 무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앞에는 코모토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함께 무릎을 꿇은 포즈를 하고 있다.

다시 기우는 저울 – “데모는 소수자들의 이야기지. 원전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옹호하는 건 자기를 소수자라고 인정하는 꼴밖에 안돼!“

 

지진 이후 12년이 지났다. 12년 전 한자리에 모여 대지진 이후 국가의 이익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국무성 장관, 경호원장, 보좌관이 되었다. 이들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해 다시 한 번 머리를 모은다. 대안은 외국채를 통해 새로운 원전을 개설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지방 의회는 자신의 지역에 원전을 유치하기 위해, 국회의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한마음으로 원전 건설을 찬성한다. 이 모든 일은 일본 경제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용인된다. 저울은 다시, 효율, 성장, 경제라는 가치를 향해 기울기 시작한다.

한쪽으로 기울며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저울에 제동이 걸린다. 도쿄 중심가에 ‘방사능 폭탄 테러’ 경보가 울린 것. 테러의 범인은 국무성 장관의 보좌관, 12년 전 피해 지역에서 통조림을 훔쳤던 타이요였다. 그는 장관을 협박하여 모든 상황을 중단시키는 과감한 용기를 보였다. 사실 폭탄도 없고 테러도 없던 촌극은 타이요의 망명으로 끝난다.

사진엔 네 사람이 있다. 왼쪽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재무성 장관의 보좌관이 된 타이요, 재무성 장관, 노자키, 과거 재난 지역 촬영감독으로 일한 카이하라. 12년 전 재난 지역의 공무원으로 일하던 노자키씨는 피폭자가 되었다. 그는 원전 설립 반대를 위해 시민 천여 명의 서명을 모아 재무성 장관에게 저지를 요구하고 있다. 12년 전 재난 지역의 공무원으로 일하던 노자키씨는 피폭자가 되었다. 그는 원전 설립 반대를 위해 시민 천여 명의 서명을 모아 재무성 장관에게 저지를 요구하고 있다.

옳은 것에 대한 신념 – “그들도 무엇이 옳은지 알겠지.”

이야기는 결국 저울 한쪽에 무게를 싣는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다운 삶을 소중히 한다면 무엇이 옳은가를 결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린 이미 보았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자리에 피어난 비극을 말이다. 인간성의 상실, 보이지 않는 족쇄를 달고 사는 피폭자들의 삶, 끝이 없는 아득함에 삶의 의미마저 놓아 버린 무력감까지. 이토록 재앙은 개인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인간으로서 할 일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의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국, 실리, 효율을 이유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는 게 사회 권력자들의 목소리라면 이에 맞서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무엇이 옳은가를 돌아보는 의지만 있다면 함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연극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적어도 그들도 무엇이 옳은지 알겠지.” 한쪽으로 기울어 가는 저울을 다시 끌어 올릴 힘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힘을 싣는 것이다.

Mini Interview
연극 <배수의 고도> 연출 김재엽

연극 ‘배수의 고도’ 연출을 담당한 김재엽의 프로필 사진. 검은 재킷을 입고 흰 셔츠를 입은, 줄무늬 넥타이를 맨 그가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단발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있다.

럽젠Q <배수의 고도>라는 연극이 결국 표현하고 싶었던 가장 큰 주제,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두산인문극장의 마지막 주제처럼 ‘과연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공존의 문제인 듯합니다. 자연재해에 인간의 실수까지 더해져 폐허가 된 일본의 땅에서 과연 새로운 희망을 말할 수 있을지 현실에서는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망가진 커뮤니티의 새로운 부활을 꿈꿀 수 있겠죠.

럽젠Q <배수의 고도> 주제가 공교롭게 현재 한국의 상황과도 시의성이 맞습니다. 연극을 볼 때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보면 좋을까요?

<배수의 고도>에서 나타난 현실은 비단 동시대 일본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병리현상과 사뭇 닮아있습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기구와 자본을 증식시키는 데만 골몰하는 경제시스템이 불러오는 폐단에 우리 또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럽젠Q 관객이 각본-연극을 통해 얻어갔으면 하는 생각, 혹은 변화는 무엇일까요?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 그 자체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동시대의 복잡한 문제를 안고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려면 타인의 문제에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하겠죠,
그럴 때마다 얼마나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고백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타인의 삶과 우리 자신의 삶 사이에 깊은 유대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을 겁니다.
연민과 침묵은 가장 위험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고통 받는 타인의 삶을 배제시킬 때 우리 또한 언젠가는 ‘배수의 고도’처럼 고립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덧붙여 공동체적인 삶의 회복에 대해서 고민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연극 <배수의 고도> 공연개요

일시 2014년 6월 10일(화) ~ 7월 5(토)
화~금 8시, 토 3시 7시, 일 3시(월요일 휴무)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가격 일반 30,000원 / 두산아트센터 회원 24,000원
특별할인 중고생 전석 10,000원 / 대학생 전석 15,000원 / 경로우대(만 60세 이상) 15,000원
문화가 있는 날 50% 할인(6.25) 15,000원
예매 문의 두산아트센터 02-708-5001 www.doosanartcenter.com 인터파크 1544-1555

 

「두산인문극장 2014 : 불신시대」 마지막 작품 <배수의 고도>는 3.11 동일본 대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다룬다. 2011년 초연 시 극단 TRASHMASTERS의 대표인 나카츠루 아키히토가 작,연출을 맡아 일본 연극계에 화제가 된 작품이다. ‘배수의 고도(背水の孤島)’에서 ‘배수’란 ‘절대 절명의 위기에 오히려 강을 등지고 온 힘을 다해 싸운다’는 중국 사기에 나오는 전략에서 비롯된 말로 현재의 일본의 상황을 비유한다. 작가는 취재와 조사를 통해 다양한 인간군상과 그 안에 내포된 감정들을 구체적인 에피소드에 담아 표현한다. 이 작품은 일본 사회를 넘어 환경 대재앙 등 오늘날 인류가 처한 극단적 위기에서 사회 정의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2013 동아연극상 ‘작품상’, ‘희곡상’을 수상한 김재엽이 연출을 맡고, 두산아트센터 창작자육성 프로그램 지원 아티스트 여신동이 미술감독 및 무대디자이너로 참여한다.

 

럽제니의 관람 TIP!
1.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변해가는 인간성을 지켜보기
2.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어떤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해보기
3. 입증된 연극 배우들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느끼기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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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내용을 보니, 무언가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는 그런 연극이었네요. 지금까지 재미 위주의 연극만을 보다보니..ㅎ 지예기자님이 직접 관람 하시고, 관람 팁까지 써주시는 센스!!!:) 기사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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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예

    감사합니다!! 이 연극은 저를 몰입하게 했어요. 진지한 내용을 다루지만, 지루하지 않았답니다. 배우들의 명연기와 스토리때문인 것 같아요~ ^^ 다른 분들도 많이 관람하셨음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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