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데이, 내가 마주한 초콜릿

거리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한다. 가게 앞마다 진열되는 초콜릿 매대 때문이다. 형형색색의 초콜릿들은 각기 다른 모양, 맛만큼이나 우리에게 각기 다른 추억과 맛을 선사한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달콤하다가도, 또 누군가에게는 삼키지 못할 만큼 씁쓸했으리라. 자, 그렇다면, 당신이 마주한 초콜릿은 어떤 맛인가?
흰색과 파란색의 체크무늬 천 위에 초콜릿 통이 하나 올려져 있다. M&M 브랜드 제품으로, 원형의 플라스틱 통 안에 다양한 색의 동그란 초콜릿이 가득 들어 있다. 통 옆에는 파란색의 캐릭터 얼굴이 그려진 병 뚜껑이 함께 놓여 있다.

서현동 기자의 쓴맛 : 초콜릿의 이해

노란 은행잎이 가득 떨어져 있는 어느 땅 위에, 은행잎을 하트 모양으로 모아둔 모양이 눈에 띈다.초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초콜릿을 베어 물면 화가 난다. 입 안에 단맛을 기억하는 감각들이 초콜릿의 단맛을 지우고 쓴맛만 모조리 느끼기 때문이다. 가령, 2012년 어느 발렌타인 데이의 일이다. 그때 나는 군인이었다. 여자친구의 택배를 받은 아이들이 마패를 찬 사또마냥 늠름하게 활보할 때였다. 물론 나에게도 여자친구가 있었다. 문제는 언제 택배가 오느냐의 차이였다. 때마침 내 이름 앞으로 택배가 도착했고,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풀어보는 케빈처럼 동그란 눈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잘 구워진 초코칩 쿠키와 초콜릿, 수많은 선물들. 여자친구는 내가 가지고 싶어했던 크고 작은 물건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상자를 받기까지의 기다림까지 달콤함으로 융화되려던 찰나, 나는 편지 한 통을 꺼내 읽었다. 헤어지자는 통보였다. 흔한 말로 먹고 떨어지라는 것인가, 예쁘게 포장된 이것들은 이별 선물일 뿐이었다. 나는 이것저것 꺼내놓은 것들을 다시 상자 속에 잘 담았다. 그리고 연병장 모퉁이에 불을 질렀다. 그날 밤 오줌을 쌀지도 모를 만큼, 활활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단 것을 먹고 바로 단 것을 먹으면 달지 않다는 느낌을! 나는 뻣뻣한 혀가 된 것처럼 매점으로 갔다. 초코 우유나 하나 사 먹으려고 했더니, 그마저도 다 팔리고 없었다. 가령 초콜릿을 이해한다는 것은, 쓴맛이다.

김경현 기자의 달콤한 맛 : 잊고 있던 초콜릿

발렌타인 데이? 나에게는 먼 나라의 기념일과 마찬가지였다. 초, 중학교 시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끓던 시절에 대한 변명으로 굳이 남 탓을 해보자면, 나는 남고를 다녔다.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발렌타인 데이’는 내 입밖에 나올 일이 전혀 없는 단어였다. 대신 내 머리 속 한 귀퉁이에 ‘내가 대학생이 된다면!’이라는 제목의 조그마한 로망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뿐. 대학생이 되면, 여자친구가 손수 만든 초콜릿을 건네주겠지? 하지만 머지않아 나는 이것이 허황된 꿈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대학생이 되면 그 즉시 살도 빠지고 예뻐져서 남자친구가 생긴다던 모든 여학생들의 착각과 동일했다. 20대의 나는 그렇게 별 일 없이 대학생이 되어 대학교를 다니고,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군대라는 곳에 발을 들였다.

전역을 앞둔 나에게 ‘초콜릿’이란 ‘떨어진 당을 보충하는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인이 되어 얼마 되지 않아 참석했던 LG럽젠 워크샵. 2박 3일 간의 일정 중에 바로 ‘그 날’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은 다른 학생기자들이 건넨 초콜릿을 손에 쥔 그 순간이었다. 기대도, 감흥도 없던 2월 14일에 처음 만난 친구들에게 무려 3개의 초콜릿을 받게 될 줄이야! 옆 자리의 친구는 내가 받은 아몬드맛 초콜릿은 정말 맛이 없는 거라며 귀띔해줬다. 하지만 맛이 없을 리가 있나. 내 입에 한 입 가득 들어온 초콜릿은 그 이상 달콤할 수가 없었다.
어느 회의실로 보이는 곳에서 김경현 기자가 패딩 조끼와 니트, 청바지를 입고 두 손에는 초콜릿을 가득 든 채 한 쪽 다리를 들어 보이며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다.

전영은 기자의 상큼한 맛 : 발렌타인 데이, 진실 혹은 거짓?

어느 종이 가방 안에 진분홍색과 연분홍색, 하얀색의 장미가 여러 송이 한 다발로 꽃혀 있다.
열 여덟 살의 발렌타인 데이는 나름 ‘다 자랐다’고 생각되던 나에게 조금은 시시하게 느껴졌다. “너 화이트 데이 때 나한테 사탕 줄 거지?”라는 구두 계약과 함께 초콜릿을 주던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진짜 커플들에게만 의미 있는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나와 친한 친구들 중 그 누구도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없었다는 것. 발렌타인 데이 전 날, 우리는 초콜릿을 만든다, 포장을 한다며 바쁜 다른 친구들을 무심한 척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몇 명이 자리를 비운 틈에 한 친구가 깜찍한 장난을 생각해냈다. 바로 가짜 고백을 하자는 것! 고백 사기극은 단 한 명의 반대자도 없이 통과되어 발렌타인 데이 당일, 정해진 짝꿍들에게 시행되었다.

학교 후문, 조회대 앞, 체육관. 우리는 각각의 장소로 그들을 불러들여 초콜릿과 함께 수줍은 고백을 건넸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붙어 다녔던 우리였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거짓임을 눈치채고 욕을 발사했다. 괜히 초콜릿 값만 들였다며 웃고 떠들던 그 때, 조회대 앞에서 작전을 수행한 한 친구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초콜릿을 손에 들고 수줍은 얼굴로 뒤따라오는 다른 친구와 함께. 그 커플(?)은 실제로 이틀을 사귀고, “다시 친구로 돌아가자.”라는 말로 헤어짐을 맞이했다.

진심에 상처를 받을까, 오랫동안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대학생이 되어 다 함께 떠난 제주도에서 야밤의 진실 게임에 그 날의 고백이 장난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럴 줄 알았다.”며 애써 표정관리를 하던 그 친구의 당황스러운 표정이란! ‘발렌타인 데이 사기극’이라 이름 붙인 우리들의 발렌타인 데이에서는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풋풋하고 상큼한 향이 물씬 풍긴다.

익명을 부탁한 OOO 기자의 매운 맛 : 사 먹어야 맛있는 초콜릿

20대, 나의 첫 번째 남자친구와 맞았던 첫 발렌타인 데이를 잊을 수 없다. 시중에 파는 초콜릿이 훨씬 간편하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날인만큼 정성을 쏟고 싶었다. 발렌타인 데이는 원래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니, 남자친구의 기대가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물을 준비할 역할을 맡은 내가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 또한 어마어마했다. 나름 손재주가 좋았다 자부했기에, 특별하고 예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또, 남자친구가 없을 때부터 초콜릿을 만드는 것은 정말 꼭 해보고 싶은 이벤트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기대와 포부가 더욱 컸던 듯 하다.
연인들의 필수 코스, 메시지 남기는 곳을 촬영한 사진들. 왼쪽 사진은 남산으로 추정되는 자물쇠 걸이판에 빼곡히 찬 여러 색의 자물쇠와 그 안에 쓰인 문구들이 촘촘히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어느 벽면에 컬러풀한 타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이 위에 네임펜으로 쓴 커플들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런데 그때의 우린 새해가 되고 계속 싸웠다, 화해했다, 다시 싸웠다를 반복하며 살얼음판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를 한 주 앞두고도 심하게 싸워서,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고, 드디어 초콜릿을 만들 때가 왔다! 달콤한 초콜릿은 분명 싸움과 화해의 고리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간단하지만 모양이 예쁜 몰드 초콜릿부터 생 초콜렛, 브라우니볼, 초코 쿠키까지!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초콜릿 세트를 완성했다. 선물을 받아 든 남자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행복했다. 그 날은 단 한 번의 투닥거림도 없이 사랑이 넘치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2주 후, 다시 살얼음판을 걷게 된 우리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가 살얼음판을 무참히 부숴버렸다. 처음으로 겪게 된 실연의 아픔에 허우적대다, 잠시 숨을 돌릴 때가 되어 달력을 보니 화이트 데이. ‘Give and Take’를 기대하며 초콜릿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왠지 화가 치밀었다. 나의 아름다운 초콜릿이 한없이 아까웠던 분노의 발렌타인. 올해의 발렌타인 데이는 그에게 맵디 매운 날이었으면 하는 속 좁은 바람도 함께.

달거나 혹은 쓰거나, 여러분이 초콜릿은 어떤 맛입니까?

초콜릿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딱딱한 사탕을 으깨먹을 때의 노력도 필요 없고,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은 정말 매력적이다. 혀의 감각은 초콜릿을 그저 단맛, 혹은 쓴맛을 자극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이겠지만 우리가 가진 시간 속의 초콜릿은 색깔, 모양, 크기, 맛이 천차만별이다. 달콤하고 상큼했음 좋았겠지만 쓰고 매웠다고 해도 나쁘지는 않다. 아무 추억이 없는 ‘무(無)맛’보다는 낫지 않은가? 아직 우리가 맛보지 못한, 앞으로 마주할 초콜릿은 넘치고 넘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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