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거리엔 그곳이 있다


그 거리에 가면 언제나 ‘그곳’이 있었다. 빠르게 바뀌는 세상 속에 항상 그 느낌 그대로 거리를 지키는 곳들. 지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공간 위에 쌓아두고 다시 올 때마다 추억을 들춰 보며 시간을 되짚는다. ‘그 거리’에 가면 눈길이라도 한 번씩 주고 지나야 하는 진짜 ‘명물’들을 소개한다.

반백 년의 이야기가 꽂혀있는 ‘신촌 홍익문고’


1960년에 문을 열어 올해로 54년이 된 ‘홍익문고’는, 지역서점의 자존심을 지키는 몇 남지 않은 서점이다. 대표적인 대학가인 신촌 일대에는 과거 8개의 서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홍익문고만 남았다. 인터넷 서점이 있는데 오프라인 서점은 없어도 되는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서점은 필요한 책을 살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우연한 즐거움을 선물 받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니까. 인터넷 네모난 검색 창에서는 목적과 필요에 의해 책을 찾을 수 있어도 호기심을 넓혀 줄, 재미난 이야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책이 꼭 지식을 채워주고 감동을 주어야만 하나요?” 16년 동안 LG에서 근무하다가 아버지가 문을 연 홍익문고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박세진 대표의 말이다. 그에게 책이란, 몰랐던 자신의 흥미를 끌어내 줄 재미있는 보물창고다. 인터넷 서점과 달리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많은 책을 뒤적이며 그 즐거운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홍익문고가 그냥 책을 파는 서점만은 아니다. 홍익문고에는 책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그 시절 그 이야기가 꽂혀있다. 누군가는 친구를 기다리다 책을 뒤적이곤 했고 누군가는 지금의 배우자가 된 연인과 데이트를 즐겼다. 또 누군가는 하고 싶은 일을 찾게 해준 책을 발견하기도 했다.


반세기 동안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의 추억을 함께한 명실상부 신촌의 랜드마크, 홍익문고. 사실 이런 홍익문고가 지난 2012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다. 서대문구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가 예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마다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 나서 ‘홍익문고 지키기 운동’을 한 덕에 지금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세진 대표는 홍익문고를 ‘종이비행기’에 비유하며, “넘치는 사랑을 주고 수많은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라 표현했다. 그가 서점에서 강연, 공연, 저자와의 대화 등을 열며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듯이, 이제 홍익문고는 박 대표만의 것이 아니다. 책과 사람들, 지역 문화가 함께 담긴 이곳을 100주년까지 이어가겠다는 그의 바람처럼 앞으로도 수많은 이야기가 종이비행기를 타고 멀리, 오래도록 날아가기를 바라본다.

음악이 흐르는 거리, ‘레코드포럼’

홍대에서 내려오다 보면 노래 나오는 데 있어. 그 앞으로 와!

홍대 앞 삼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귓가에 음악 소리가 와 닿는다. 사람들은 약속을 정할 때도 그 음악을 기준으로 잡았다. 주변 상점도 이 음악을 듣기 위해 찾는 사람을 배려해 따로 음악을 틀지 않았다고 한다. 17년간 홍대 거리의 BGM을 책임졌던 ‘레코드포럼’의 이야기다.

홍대 앞 거리는 다른 대학가와는 다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레코드포럼에서 흘러나오는, 처음 들어보지만 가던 길을 멈추고 듣고 싶은 음악도 홍대 거리만의 분위기를 만든다. 레코드포럼과 레코드포럼의 음악은 홍대 거리의 상징과도 같았다.

레코드포럼은 표진영 사장이 만든 잡지 <레코드포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레코드포럼은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홍보하는 것처럼 판이 나오기 전에 음반을 소개하는 잡지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수입되지 않는 음반을 소개하다 보니 “왜 구할 수 없는 음반을 소개하느냐.”는 불평이 들어왔다. 독자들의 비슷한 불만이 계속됐지만 표 사장은 잡지 포맷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직접 음반을 수입해오기 시작했고 레코드포럼이 문을 열었다.

레코드포럼에 있는 음반은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음반이 많다. 늘 새롭고 좋은 음악을 찾기 위해 판을 검색하고, 모든 음악을 다 들은 뒤 좋은 음반만 수집하는 표 사장의 노력 덕분에 매장에는 늘 신선한 노래가 가득하다. “좋은 음반은 곡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있어요. 심지어 표지까지. 왜냐면 음반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거든요.”

이런 특징으로, 언제나 사람이 북적이지는 않아도 17년 동안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끊이질 않는다. 좋은 음악을 매장에 틀고 싶어서 찾아오는 카페 주인들, 패션쇼나 CF에 쓰기 위한 음악을 찾으러 온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무용에 넣을 음악을 추천해 달라며 레코드포럼에서 열심히 춤을 추었던 무용수까지. 레코드포럼을 다녀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음악과 함께 차곡차곡 흘러나온다.

매장의 위치 이동이 결정되었을 때, 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표진영 사장은 덤덤하게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레코드포럼에 이야기를 쌓아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귀한 음반을 찾으러 레코드포럼을 자주 오던 사람들도, 음악은 잘 몰라도 오며 가며 듣던 거리의 사람들도 레코드포럼이 마지막이라는 소식에 큰 상실감을 보였다. café B.(카페비닷)의 사장 역시 그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고, 그는 표진영 사장에게 자신의 카페로 들어와 달라는 제안을 했다. 레코드포럼의 엄청난 팬이었다는 café B.의 사장은 표진영 사장이 승낙한 다음 날 바로 레코드포럼의 노란 간판부터 떼어가 현재 자리에 붙여두었을 정도다.

판 장사를 하면서 늘 음악에 감동받았어요. 이렇게 좋은 음악이 있구나, 하면서요. 그런데 그때 참 사람들에게 많이 감동받았죠. 잘 보지 않는 인터넷 반응도 그때 처음 살펴봤어요. 참 감사해요. 나 좋자고 한 일이었는데.

홍대 앞 삼거리보다는 조금 조용한 곳이지만, 현재 레코드포럼 앞 역시 지나다 걸음을 멈출 정도로 좋은 음악이 가득하다. 표진영 사장은 이와 더불어 특정 공간 혹은 특정한 콘셉트에 어울리는 음악을 공급하는 일종의 ‘음악 컨설팅 서비스’를 고안 중이라고 한다. 그동안 찾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어쩌면 곧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대중음악이 아니라 그 가게에만, 그 거리에만 어울리는 음악으로 가득한, 느낌 충만한 공간을 많이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존과는 다른 상상! 상상마당 레코드포럼
레코드포럼의 좋은 음악을 만나볼 장소가 한 곳 더 생겼다는 희소식! 홍대 상상마당 1층에 ‘기존과는 다른 상상’의 하나로 입점한 것이다. 랜드마크였던 홍대 앞 삼거리에서 듣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쉽지만, 많은 사람이 새로운 거리에서 그리고 상상마당에서도 레코드포럼의 음악을 듣게 된 것을 반기고 있다.
다시 태어난 대학생들의 아지트 ‘신촌 독수리다방’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70, 80년대 대학생들은 약속이 어긋나면 어떻게 했을까? 신촌의 대학생들은 ‘독수리다방’, 일명 독다방을 메신저로 이용했다고 한다. 다방 1층에 가득 붙어있던 메모지로도 유명했던 독수리다방은 1971년에 문을 열어 2005년까지 신촌의 명물 음악다방이었다. 2005년에 잠시 문을 닫았던 독수리다방이 얼마 전 새 옷을 입고 독수리다방의 애칭이었던 ‘독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대학생들의 아지트를 예고하며!

현재 독다방 주인 손영득 사장은 1971년에 문을 연 독수리다방 주인의 손자다. 어릴 적 그에게 독수리다방은 빨간 벽돌과 음악, 그리고 독수리다방을 찾던 수많은 대학생으로 기억된다. 대학생들은 독수리다방에서 오래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료를 시키면 늘 주먹만 한 모닝빵 하나를 얹어주던 인심도 인기에 한몫했다. 운동부 학생들이 특히 이곳을 많이 찾았고, 성석제 작가와 기형도 시인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당시 엄청난 열기를 자랑했던 연고전이라도 열리면 학생들은 행사 후 술통을 지고 우르르 몰려와 밤을 새우며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30년 넘게 대학생들의 거의 유일한 쉼터였던 독수리다방은 90년대 후반부터 밀려들어 온 프랜차이즈 카페의 공세와 다방 내부의 사정으로 2005년에 문을 닫았다. 신촌 거리는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점령했고 독수리다방도 역사 속의 카페로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2013년 1월, 말끔하게 재단장한 ‘독다방’이 돌아왔다. 추억 속의 독다방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현재 대학생보다 사라진 독수리다방을 이용했던 당시의 대학생에게 먼저 퍼져 나갔다. 그들은 추억 속의 독수리다방을 찾아왔지만, 옛 다방의 정취를 느끼기에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독다방은 다방이라기보다 외국의 어느 도서관에 가까웠다. 아쉬워하는 손님에게 손 사장은 다방의 이름만 가져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즘 카페는 세련됐지만 정은 없는 것 같다.”며 “따뜻하고 정 넘치는 다방의 분위기를 이어오고 싶었다.”는 것.

독다방에서는 옛 주인 할머니가 인심 좋게 건네던 모닝빵처럼 모든 음료에 귀여운 스콘이 따라나온다. 카페의 이곳저곳에는 옛 독다방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있고 명물이었던 다방 메모장도 귀엽게 재현되어 있다. 찻잔과 접시에도 독수리다방의 후예임을 알리는 귀여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공간도 독방, 수방, 리방으로 나눠 따뜻하고 천천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졌다. 단순히 수다를 떨고 시간을 보내다 가는 카페가 아니라, 쉬기도 하지만 책도 읽고 토론도 나누며 생각할 기회를 주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손영득 사장의 바람이 담긴 결과이다.


다방이 이렇게 세련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옛 고객이 그랬던 것처럼 현재 대학생도 추억이 만들며 꾸며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학생들의 오랜 아지트는 옛 공간과 새 공간이 어우러진 곳으로 다시 태어났다. 뭐든지 빨리빨리 지나가는 세상 속에 천천히 자신을 돌아볼 공간을 건네는 독다방. 이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무럭무럭 자라나 제2의 대학생 아지트로 자리매김할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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