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의 시인들

투명한 유리문에 하얀 글자가 떠오른다. 교과서에서 이름깨나 들어 본 시인의 시, 동시같이 맑은 시, 나와 같은 생각을 품은 일상적인 시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감성이 하나 둘 지하철 스크린도어 위에 그려진다. 열차를 기다리는 3분 남짓한 시간. 잠시나마 허공이 아닌 글자들을 마주할 때, 어쩌면 무료하게 흘려보냈을 지 모를 순간이 흐뭇한 미소로 채워진다.

그렇게 열차는 출발한다

“웰컴 투 헬. 지옥철에 탑승하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 열차는 내부순환선으로 죽음의 코스를 순회할 예정이며 출•퇴근길 VIP 여러분을 위해 신도림, 신도림역에서 잠시 쉬어갈 예정입니다.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시기 바라며, 피로와 짜증에게도 양보 부탁 드립니다. 이제 곧 열차 출발합니다. 출입문이 닫힙니다.”

7시를 갓 지난 이른 아침이지만 지하철은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선 사람들로 빽빽하다.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더운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지만 도시 사람들에겐 일상적인 일이다. 막히지 않아 좋다, 시설도 좋고 길 찾기가 편하다, 카드만 찍으면 어디로든 환승이 가능하다. 그래서 어딘가로 가야 한다면 으레 지하철을 이용하려니 생각이 든다.

편리함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탓에 사건•사고도 끊이질 않는다. 인생을 비관하며 철로로 뛰어내리는 사람,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사람, 실수로 발을 헛디딘 사람. 사람들은 열차가 들어오는 아찔한 철로에 던져졌고 뉴스는 때때로 이런 소식을 전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시민의 안전을 위해 스크린도어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군데 시범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1호선부터 9호선까지 거의 모든 역에 스크린도어가 들어섰다.

그리고 시가 쓰이기 시작했다. 이해인, 도종환, 김용택, 고은 등 교과서에서 이름깨나 들어 본 유명 시인의 시부터 등단하지 않은 일반인의 시까지. 인생이 무상하구나 한숨짓는 시부터 지하철 출•퇴근길 내 모습을 돌아보며 미소 짓는 시까지. 서울시가 주최한 지하철 스크린도어 시 공모전에서 입상한 평범한 사람의 일상도 담겨, 읽다 보면 내 얘기인가 싶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공감과 추억이 담긴 시민의 이야기

시를 통해 지하철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기계적으로 타고 내리는 딱딱한 공간이 아닌, 소통의 공간이자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스크린도어 시 프로젝트가 감성의 메마름을 호소하는 많은 시민들에게 새로운 의미와 활력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스크린도어 시는, 공감대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도 가끔 시를 써보곤 해요. 말은 안 해도 누구나 그런 경험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시인이 아닌 이상 많이 부족하겠지만, 나름대로 시를 써보고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지하철에 쓰인 시를 보면, 와 잘 쓴다! 나도 저렇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시도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져요. 피곤한 출•퇴근길에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요. (직장인, 25세)”

스크린도어 시는, 소통이다

“공무원 생활을 끝내고 30년 동안 법무사로 일하면서 하루에도 수차례 지하철을 이용하게 됐어요. 가끔 시간이 나면 스크린도어에 있는 시를 하나씩 다 읽어보곤 해요. 어떤 시는 읽는 순간 가슴에 뭐가 콱 박히기도 하고, 어떤 시는 솔직히 공감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죠. 저 사람이 무슨 뜻으로 이 시를 쓴 건가 하고. 왜 김소월, 이육사 이런 시인들 있잖아요, 누구나 알 만한. 그런 시인들 시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 때랑은 너무 달라서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도 윤동주, 김소월은 알 거 아니에요. 이름도 모르는 일반인 시보다는 유명한 시인의 시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같이 읽고 느낄 수 있으니까 좋지 않겠어요? (법무사, 78세)”

스크린도어 시는, 추억이다

“집에만 있다가 모임이 있거나 병원에 갈 때 가끔 지하철을 타는데, 시설도 좋지만 처음에 시가 쓰인 걸 보고 매우 감탄했어요. 특히 저 같은 주부는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서 여가생활도 즐기기 어렵고, 가사일 때문에 시를 읽을 여유도 없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잠깐이나마 지하철에서 감성적인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여고 시절 생각도 나고. 그땐 서로 편지로 시도 써 주고 그랬답니다. (주부, 53세)”

지하철, 전혀 모르는 낯선 얼굴들이지만 어느 순간 한 자리에서 만나고 금세 헤어진다. 열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몇 분간, 텅 빈 철로를 마주하고 서 있는 시간은 피로의 시간이다.

시가 쓰이는 걸 알아채지 못했듯, 일상에서 잠시 시 한 편 읽는다고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다. 바빠 죽겠는데, 피곤해 죽겠는데, 시가 읽힐 리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시가 없는 지하철은 뭔가 아쉽다. 꼭 있을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좋은 것. 없으면 허전하고 어쩐지 재미없고 지루한 것처럼.

노란 선 밖, 일상의 피곤함에 지쳐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고 권태롭다. 그동안 스크린도어를 바라볼 여유조차 없었다면, 오늘만은 한 번쯤 눈앞에 적힌 시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감상이 당신의 마음을 훈훈하게 채워 줄 테니 말이다.

시 쓰는 스크린

비단 지하철뿐만이 아니다. 팝콘을 들고 콜라를 마시며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도 시를 읽을 수 있다. 메가박스와 한국시인협회가 함께 진행하는 ‘다시 보는 우리 시’ 캠페인 덕분이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김종해 시인의 시 ‘그대 앞에 봄이 있다’의 한 구절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영상과 함께 16초가량 상영되는 시는, 전국 167개 상영관에서 하루 평균 2,200여 회 보여지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길게 이어지는 광고만 예상했다면 이제는 시 한 편으로 잔잔함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땅 속의 시인 이야기

“평소 지하철을 많이 타는데요, 오랜 시간 이용하면서 삭막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어요. 사람들 대부분은 표정이 굳어있는 것 같아요.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있겠고, 직장인은 업무 스트레스가 상당할 테니까요. 이따금 무엇에 쫓기는 듯 초조해하는 표정과도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는 저까지 덩달아 불안해 지더라고요.”

유영옥 시인은 2010년 계간 문학지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현재 < 시와 소금 >, < 서라벌문예 >, < 우리 시 >, < 세종데일리 >에 시를 싣고 있다. 그중에서도 < 스치다 >라는 시는 많은 사람이 한 번쯤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 스치다 >는 인생길에서 마주하는 기쁨, 슬픔, 아픔도 슬기롭게 잘 갈무리하여 향기로운 인생을 누려보자는 뜻으로 쓰게 됐어요. 여행하면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람은, 마음속에 오랜 향기로 남아 생활에 활력을 주지요. 마찬가지로 이 시를 통해 지친 현대인들이 새로운 힘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지하철 스크린도어 시는 많은 사람을 공감하게 하면서, 쉽게 읽히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매력이 있지요. 그래서 더욱 잔잔한 여운을 준다고 생각해요. 특히 유명 시인의 글뿐만 아니라, 저처럼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늦깎이 무명 시인이나 일반인까지 참여할 수 있어 시민에게 더욱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간다고 생각해요.”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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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성근

    지하철... 매일 수많은 사람과의 스치는 장소이지만 무언가 메마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하얀 글들을 보며, 모두가 교감과 공감을 하는 하나의 추억의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사 잘봤어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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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법무사 할아버지 말처럼 시 한 편으로 잠깐이나마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라는 도구는 참 좋은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대단해 보이기도 하구요. 시 읽는 문화시민!ㅋㅋ

  • 유이정

    지하철 탈 때마다 스크린도어에 새겨져 있는 이 시는 어디에서 왔을까? 항상 궁금했는데... 스크린도어 시가 바쁜 일상 속 현대인들의 조그마한 휴식처 같은 곳으로 자리 잡길 바랍니다. 앞으로 지하철 방송에서 이런 게 나오면 좋겠어요. 스크린도어가 닫힙니다. 다음 열차를 이용해주세요. 기다리시면서 시 한편 읽어보셔요 라고~ㅋㅋ 내용과 더불어 땅속의 시인들 제목 완전 좋아요! 은혜기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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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센스있는 기관사님께서 시 한 편 읇어주시면 정말 유쾌한 등교길이 되겠네요ㅎㅎ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만큼 휴식처는 아니더라도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당^^

  • 유다솜

    저는 지하철 탈 때, 귀찮아도 갈아탈 일이 있을(?) 때가 좋아요. 지하철 안에서는 계속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게 되고, 답답하잖아요. 이렇게 다음 열차를 기다리다보면 스크린도어에 쓰여 있는 시를 보는 재미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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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스튜피드 폰이었을 땐 지하철에서 액정만 응시하는 사람들이 참 이해가 안 가고 답답했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러고 있던데요. 뭔가 삭막해진 느낌이 들었던 이유도 그 때문인가 봐요. 조금 불편해도 놓치는 감정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점에서 스크린도어 시는 경고등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 전영은

    내일 학교 가는 길에는 꼭 한번, 제대로 읽어봐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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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너무 제대로 읽다가 열차 놓치지 않게 조심 :)

  • 이유진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스마트폰 혹은 땅만 보고 있을 시간에 따듯한 시들을 보면서 뭉클해지는 건 역시 저 뿐만이 아니었나봐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스크린 도어에 시를 접목시킨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인듯 ^0^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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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너무 깊이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슥 지나치기엔 여운이 남는.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바쁘지만 그런 사색이 필요했을 현대인들에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당.

  • 정민하

    사진도 글도 참 좋네요 :^) 가끔 멍때리다가 눈에 툭 들어오는 시들이 반가울 때가 있죠. 좋은 기사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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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 이게 눈코입이었군요. 새로운 표현법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어쩌다 꽂히는 시를 발견하면 마음에 왠지 여유가 좀 더 생기는 느낌이 들어요.

  • 안지섭

    댓글을 달 수밖에 없네요. 잘 읽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가면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항상 열심히 읽는데...
    참 좋은 시가 많은 것 같아요. 아마도 지옥철에 입장하기 전 잠시 잠깐 환각효과를 불러일으키는??? ㅋㅋㅋ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참고로 대전에는 버스정류장에 시가 적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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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항상 열심히 읽으시는군요. 눈에 꽂히는 게 있으면 읽고 아니면 그냥 넘기는데. 확 와닿는 시들은 여운이 오래 가는 것 같아요. 서울도 그렇고 대전도 그렇고 갈수록 감성도시가 되어 가는 느낌bbb

  • 이미선

    저도 집에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스크린도어의 시를 읽다가 문득 코끝이 찡해진 기억이 있어요. 짧은 시 한줄 한줄에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위로를 받기도 하고요^^ 오늘도 집에 가며 잊지 않고 챙겨 보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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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의외로 동시같이 짧고 귀여운(?) 시에 더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순수해서 더 직설적이고 더 와닿는 느낌?ㅎㅎ 미선기자 위로받고 싶어요? 안 불편하면 연락해서 만나자고 해도 좋은데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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