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모순된 고독

피곤했던 하루를 마치면 우리는 잠을 자야 한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떠올리면 결코 잠들고 싶지 않다. 이내 눈을 뜨면 다시금 마주하게 될 똑같은 나날들, 이것이 바로 잠 못 드는 밤은 없지만 잠 들고 싶지 않은 ‘모순된 고독’의 이유다. 당신은 어떠한가? 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 제공 _ 두산 아트센터

우리가 잠 못 드는 이유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말레이시아의 어느 리조트, 은퇴이민을 온 중-장년 부부들의 생활은 편안하면서 권태롭다. 산책, 골프, 테니스, 수영을 하거나 원주민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낸다. 말레이시아에 살지만, 일본인들끼리 모여서 일본 음식을 먹고 일본 DVD를 보며 일본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정작 일본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 <잠 못 드는 밤은 없다> 시놉시스 중

당신은 ‘여유롭지만 권태로운 모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는 극의 초반부터 끝까지, 이 명제를 끌고 갔다. 극 초반엔 은은하게 드리운 조명 아래 안정된 무대 장치와 음악으로 편안함을 제공하더니, 클라이맥스나 별다른 무대 구성의 변화 없이 이어지는 100분간의 호흡을 통해 이내 권태로움을 선사했다.
덕분에 관객은 극과 함께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우린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정작 ‘삶’이라는 고독한 방에서 하루를 마친다. 눈을 떴을 때 똑같은 일상만 있다면, 누가 잠에서 깨고 싶을까? 하지만, 우린 자야만 한다. 이런 모순된 구조는, 잠 못 드는 밤은 없지만 잠 못 드는 이유를 공유하고자 한다.

그들에게서, 그 기억에서 멀어지고 싶은데 어디든지 따라온단 말이야 _ 치즈코, 미쓰루

“심부름을 시켰다기보다 사러 가는 건데, 나 스스로 그러질 않으면 친구로 끼워주질 않으니까”
– 스기하라 치즈코

누구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등장인물 치즈코는 학창 시절 ‘이지메(속칭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친구들의 껌 심부름을 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살기 위해 그들과 섞여야 했던 치즈코를 통해 우린 씁쓸한 현실의 한 단면을 마주한다. 시간이 흘러 자신을 찾아온 친구에게 싫은 내색 하나 하지 못하는 치즈코, 그 친구에게 풍선껌 선물을 받은 뒤 결국 그녀는 오열한다. 우리도 누군가에, 혹은 어떤 것에 무기력하게 타협하고 있진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 우리도 늦은 밤 베개 속에서 홀로 울고 있진 않았는지 돌이켜보게 한다. 연극은 치즈코를 통해 일본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듯했지만, 현실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슬픈 현대인들의 문제를 소리 없이 들추고 있었다.

“히키코모리란 게 대개 인생 경험이 적잖아요,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그래서 단순한 꿈밖에 못 꿔요.
누굴 죽이거나, 누가 날 죽이거나, 누가 날 죽일 때가 많지만요.”
-하라구치 미쓰라

히키코모리의 뜻을 아는가? 이는 ‘틀어박히는 것’이란 뜻으로, 자기 방이나 집 등 특정 공간에서 나가지 못하거나 나가지 않는 사람을 말하며, 한국에서는 ‘은둔형 외톨이’로 번역하기도 한다. 히키코모리는 현대인의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키워드다. 말레이시아로 건너와 일본 DVD를 팔며 비로소 조금씩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듯한 미쓰루. 그러나 그는 타지에서도 그 누구와 온전한 소통은 하지 못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몰래 바나나와 물을 챙기던 미쓰루를 보면서 혹시 우리도 히키코모리가 아닐지에 대한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우리 모두 자신만의 방 속에 틀어박혀 타인과 소통을 끊진 않았는지, 혹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어진다.

그리운데 돌아가고 싶진 않아. 근데 여기도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아 _ 켄이치, 아키라

말레이시아 호화 리조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해외에서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 바깥세상에 갇혀 도통 생활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소토코모리’다. 바깥을 뜻하는 ‘소토’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 ‘소토코모리’는 가족과의 부대낌, 사회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을 피해 본래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허구한 날 옛날 생각만 하는 주제에, 되돌아가고 싶단 생각은 안 들죠.
꿈을 꿔도 그래요, 그건.”
-켄이치와 아키라의 대화 中

은퇴 이후 노후 생활을 즐기기 위해 말레이시아로 떠난 켄이치는 나이 지극한 노인네다. 아내와 함께 평화로이 이국 생활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는 큰 병을 앓고 있다. 일본에 있는 두 딸이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켄이치는 두 딸의 간곡한 부탁에도 일본에 돌아가지 않는다. 왜일까?
반면, 딸 몰래 보온병에 술을 부어 마시는 아키라는 몇 년째 말레이시아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은퇴 이민이다. 그는 어릴 적 일본에서 즐겨 보던 만화영화 하리마오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그러나 그 또한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전체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인 두 인물은 고국을 그리워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모순된 이 둘의 모습을 통해 극은 인간의 우유부단함과 그로 인해 고독한 내면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여준다. 아련히 ‘그 때’를 떠올리며 회상에 잠기지만,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은 어쩌면 먼 미래의 우리네 모습은 아닐까
두 노인을 통해 극은 조용하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말레이시아 리조트 의자에 앉아 매일 똑같은 의자와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애써 지금 현재에 만족한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혹시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이 시대를 합리화하면서 살고 있진 않은 걸까?

잠 못 드는 밤은 이제 없다

유려한 경치, 잘 갖춰진 시설과 항상 준비되는 음식과 와인, 깔끔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지배인까지 부족할 것 없는 그들의 세상에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한다.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의 작가는 물질적으로 풍족해 완벽해 보이는 그들의 겉모습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내면의 상흔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불편한 이 진실. ‘잠 못 드는 밤은 없지만, 잠들고 싶지 않다.’

우린 주인공처럼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산다. 아닌 척하면서, 없는 척하면서도, 가슴 한 켠에 세상의 칼에 베인 상처와 함께 살아간다. 연극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는 물론 자신과 다른 배경과 인물의 이야기다. 하지만, 결국 망각했던 내 안의 상처를 돌아보며,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안도의 잠을 청하게 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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