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름이라는 이름의 보통명사

속도의 우월함도, 편리함도 좋지만 어느 순간 너무 빠른 그 템포가 지겨운 순간은 없었는가? ‘빠르게, 좀 더 빠르게’만을 강조하다 그냥 지나쳐버린 순간이 아쉽지는 않은가? 허둥지둥 고삐를 조이며 지내다 나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그대, 지금은 조금씩 속도를 낮춰야 할 때, 잊혀진 느림의 미학을 위하여.

현 시대에서 빠름은 미덕이요, 느림은 곧 게으름과 비능률의 표상이라 했다. 방향보단 속도가 우선이고, 신중하고 절제된 결정보다는 즉각적인 행동과 쾌락이 먼저 앞으로 나선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의 모든 것이 그렇다. 소수만의 전유물이었던 ‘빠름’이란 단어는 이제 더 이상 일부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닌,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보통명사’가 돼버렸다. 마치 빠름에 젖어 지금 이 순간이 빠르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고속의 시대에 우린 그렇게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화면 가득 검은 글씨로 ‘FAST / SLOW’라고 쓰여 있다. FAST라는 글자는 어디론가 날아가듯 흔들리고 있고, SLOW는 아래쪽에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 네 글자에 담긴 속도의 역사

대한민국은 유난히 속도를 강조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한국인들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을 발전 모델로 지목할 만큼, 한국의 빠른 성장의 뒤엔 이러한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가 존재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인만의 끈기와 성실함은 대한민국 발전의 숨은 원동력이자 미덕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압축 성장의 폐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과거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빨리빨리’ 문화에 빠져있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빨리빨리’를 정도로 여기던 우리의 습관이 오히려 큰 재앙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절실히 보여준 극단적인 사건이었다.

한 뉴스에서 남자 아나운서가 ‘수능 성적 비관 쌍둥이 자살’이라는 캡션의 뉴스를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도 빠름의 문화를 만든 질곡의 역사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대량의 인적자원을 생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입식 교육’ 시스템을 택하였다. 짧은 시간에 대량의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가능한 많은 인재를 양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원이 비약한 좁은 땅에 비해 수많은 인재들을 탄생시켰으며, 세계적으로도 최상위 교육수준의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가혹한 대가 역시 존재했다. 청소년들의 성적 비관으로 인한 잇따른 자살 소식과 과도한 선행교육, 갈수록 심해지는 학교폭력, 그리고 결과만을 지향하는 성과 지상주의까지. 한국형 주입식 교육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까지 탄생시키고 말았다.

우리는 짧은 역사 속에서 고속성장을 일궈냈지만, 동시에 투자한 노력 이상의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러한 강박관념이 오랫동안 고착되어 왔고, 이것이 현재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빠름의 마약에 중독되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유행하는 ‘외국인이 뽑은 한국인들의 습관’이란 글을 보면 이러한 내용들이 나온다. ‘커피 자판기의 컵이 나오는 곳에 손을 넣고 기다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닫힘 버튼을 마구 누른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와 추격전을 벌인다’. 이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를 한 번 더 곱씹어 생각해보자. 그 몇 초의 시간을 얻기 위해 우리가 쏟는 에너지가 과연 의미가 있었는지 작은 의문이 생긴다. 사실,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은 굉장히 빠른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 어제의 새로움이 오늘의 낡음이 될 수 있을 만큼 매우 유동적인 사회이다. 그러나, 이 속에서 우리는 잦은 변화에 서서히 중독되었고, 결국엔 변덕스런 현실에 머무르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마저 망각하게 되었다.

얼마 전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 4명 중 1명은 휴대전화를 구입한 지 1년 이내에 다시 새로운 제품으로 교체한다고 한다. 우리의 소비패턴이 빠르게 변하다 보니 기업들 역시 이에 맞춰 새로운 상품의 출시를 더욱 가속한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소비자들은 다시 기업들이 내놓은 신상품을 서둘러 구매한다. 먼저 남들보다 앞서서 써봐야 하고, 최소한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진 않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 주연 배우 톰 크루즈가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검은 장갑을 낀 채 허공을 향해 두 손을 펼쳐 보이고 있다. 허공에는 최첨단 투명 모니터가 설치된 듯 푸른색 글씨가 곳곳에 떠 있다. 정보의 실시간 공유 역시 빠름에 중독된 우리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지금의 SNS는 소통에 중점을 둔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일부 변질된 형태를 띄고 있다. 언젠가부터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또 하나의 사회적 질병까지 낳고 만 것이다. 이는 소비자 스스로가 만든 정보의 범람 속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단적인 모습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 중 하나가 ‘빨리빨리’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것만 봐도 우리의 생활 속에 이 단어가 얼마나 잘 배어있는지를 알 수 있다. 느림을 참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에 같은 한국인들에게 외치다 못해, 이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에게도 똑같이 외치고 있다. 인내심이란 말은 이제 옛 흔적으로만 남겨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속도와 위험의 등가 교환

도미노피자 홈페이지게 게재된 ‘30분 배달보증제’ 폐지에 관한 안내문이다. ‘한국도미노피자 30분 배달보증제 폐지에 따른 입장 / 안녕하십니까, 한국도미노피자입니다. 당사의 ‘30분 배달보증제’는 고객 여러분께 가장 맛있는 피자를 제공하기 위한 고객과의 약속에서 시작된 제도입니다. 그동안 ’30분 배달보증제’를 실시해 옴에 있어 당사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최상의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왔습니다. 하지만 당사는 철저한 안전 교육 시행과 안전 배달시스템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30분 배달보증제’에 대한 염려에 따라 심사숙고 끝에 당일부터 ‘30분 배달보증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사는 앞으로 더욱 철저한 안전교육시행과 안전 운행 규정 준수 등으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아울러 제도는 폐지하지만 변함없이 최상의 품질과 최고의 서비스로 고객 여러분과 함께하는 기업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쓰여 있다. 최근, 국내에서 감기 환자를 가장 잘 본다는 병원이 발표된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항생제의 사용량 역시 높았다고 한다. 휴식을 취하면 90%는 자연치료가 되는 감기를 하루 더 빨리 회복하기 위해, 몸의 면역을 망가뜨리는 강한 약물을 서슴지 않고 복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의 항생제 내성이 최고인 국가로 선정된 것에는 이러한 부끄러운 배경이 숨어있었다.

속도에 목마른 많은 사람들은 더 강한 빠름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필요 외의 것에서까지 가속화를 밟으며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선착순, 밤샘작업, 날림공사, 총알배달 등은 예사거니와 이젠 교통사고 사망률, 자살률, 출산율 저하 등 각종 사회 문제까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하니 정말이지 ‘오호, 통재라!’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의 출연자들 모습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예측불허 빅웃음!’이라는 문구와 함께 출연진인 이광수, 김종국, 유재석, 송지효, 지석진, 하하, 개리가 나란히 서 있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젠 별별 분야에서도 앞다퉈 경쟁하는 곳이 대한민국 사회다. 좁은 공간의 고밀도 사회에서 누가 더 1위를 많이 하나 내기를 하듯 뭐든지 과잉경쟁의 양상을 보인다. 이젠 누구나 가진 ‘일반적인 빠름’으로 현재의 욕구는 더 이상 충족되지 않는다. 남들이 갖지 못한, ‘더 빠른 빠름’을 원한다.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속도를 늦추지도, 브레이크를 밟지도 않는다. 오로지 더 강하게 페달을 밟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우리의 머릿 속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당신은 달리고 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다. 분주한 손놀림과 함께 휴대폰에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는 사람, 가까스로 문 앞에서 지하철을 놓쳐 아쉬워하는 사람, 뜨거운 음식을 식히지도 않고 허겁지겁 먹다 기어코 혀를 데는 사람. 막상 무언가에 쫓기진 않는데 다들 이상하리만큼 서둘러 행동한다. 쓸데없이 미래의 작은 일까지도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태반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어제는 어떤 걱정을 했는지, 저번 주에는 어떤 불안함에 시달렸는지 정작 기억도 못한다. 그저 뭐든지 미리 앞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고질적인 습관인 것이다.

런닝화를 신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뛰는 사람들의 다리 부분만을 클로즈업해 촬영한 사진. ‘빠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빨리 진행하고 완성하려는 마인드는 전 세계로부터 ‘한강의 기적’이란 찬사를 받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한국인이 가진 특유의 빠름은 ‘열정’의 원동력이 됐다. 이는 불과 5천만의 인구로 IT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역동성과 경쟁력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높은 통계 수치와는 대조적으로 정작 중요한 국민의 행복수준은 OECD국가 중 꼴찌 수준에 머무른다. 속도만을 숭배해오던 한국 경제가 드디어 어쩔 수 없는 커다란 모순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체코의 유명 소설가 ‘밀란 쿤테라’는 자신의 소설 <느림>이라는 작품에서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라고 비유했다. 이 구절처럼, 우리에게 있어 ‘빠름’이란 단어는 이미 몸 속 깊숙이 스며들어 빼내기 어려운 존재가 된 지 오래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 속 거북이의 우직함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고, 되려 사회에선 어리석음으로 치부되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자 사회적 통념이 돼 버렸다. 마치 느림이 그름이며 빠름이 올바름인 것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젠 ‘빠름’이 아니라 ‘바름’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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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이렇게 빠름을 강조하고 빠름을 원했던 것일까요! 분명 옛날 선조들은 여유롭게 시를 읊고 유유자적 막걸리를 한잔 즐기셨을 것 같은데...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배울 때 빨리빨리를 가장 많이 배운다는 말도 정말 틀린 게 아니네요. 국민 4명 중 1명이 휴대폰을 1년 이하로 교체한다는 사실이 좀 충격이네요. 저 같은 경우엔 휴대폰은 오래 쓰는 편이지만, 속도가 느리면 완전 답답해하는 성격이에요 ㅎㅎ 에잇 왜케 안터져! 하면서 휴대폰을 던진 적은..없지만.. 왠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 옆에 성근기자가 있었던 것 같고.. 이것은 흡사 데자뷰?ㅋㅋ 아무튼 빠름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름도 아니니, 조금 더 여유롭게 살아봐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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