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목란언니> | 경계로 돌아가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사랑으로 눈 먼 가슴은 진실 하나에 울지요. 그대 작은 가슴에 심어 준 사랑이여 상처를 주지 마오, 영원히.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

사진제공_두산아트센터
연극 목란언니의 한 장면. 한 여인이 무대 위에 서서 흰 셔츠와 검은 스커트를 입고 빨간 완장을 두른 채 머리에는 커다란 꽃 모양의 모자를 쓰고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하고 있다. 표정이 왠지 슬퍼 보인다. 여자의 왼쪽 옆에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여자가 앉아 있고, 무대 뒤 어둠 속에는 뿌옇게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듯 보이는 남자가 있다.
연극 <목란언니>. 평범한 인물들의 남과 북에 관한 이야기라, 자칫 뻔하고 진부한 전개는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재공연을 하게 된 것은, 탄탄한 전개와 좋은 구성,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던지게 만드는 그야말로 ‘좋은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일 터다.

조국을 등진 그녀, 다시 조국을 그리다

목란언니의 한 장면. 목란이 무대 가운데에서 흰 블라우스와 보라색 스커트를 입고 두 손을 양쪽으로 벌리는 동작을 하며 춤을 추고 있다. 그녀의 뒤에는 삼각형 대열로 흰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서서 같은 동작을 하고 있다. 목란은 아코디언을 전공한 탈북 여성이다. 뜻하지 않게 월남하게 된 그녀는 남한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북에 있는 부모를 서울로 데려와 준다는 브로커에게 속아 오천만 원을 잃게 된다. 그때 청진에서 온 탈북자 ‘김정일’로부터 공훈예술가인 부모가 수용소가 아닌 지방 예술단체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 한다. 브로커에게 줄 돈을 벌기 위해 목란은 조대자의 집에 취직한다. 조대자는 태산, 태강, 태양 삼남매를 키우는 룸살롱의 마담이다. 옛 애인을 못 잊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역사학자 태산, 근무하던 대학에서 철학과를 폐지하자 술로 지리멸렬한 하루하루를 견디는 철학과 교수 태강, 무명 작가의 초라함을 벗어나고자 시나리오 작가로 전업한 태양. 재입북 자금을 벌기 위해 태산의 간병인으로 취직한 목란은 아코디언 연주를 들려주며 태산의 마음을 달래고, 태산도 목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이에 조대자는 목란을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한다. 순수한 목란의 모습에 태산과 태강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을 속이고 잠적해버린 조대자에게 목란은 이성을 잃고 분노한다.

인문학은 지고, ‘오천만 원’은 뜨고

연극 목란언니의 한 장면. 무대 위는 카페트가 깔려 있고 낮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 등 누군가의 집 거실처럼 꾸며져 있고, 중년의 여인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무대 오른쪽에는 목란이 흰색 코트를 입고 보라색 스커트, 검은 플랫슈즈를 신고 아코디언을 메고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태산, 태강, 태양 삼남매는 각각 아프로디테, 아테나, 헤라 세 여신을 닮았다. 산과 강을 두루 비추는 태양처럼 두 오빠를 끝까지 책임지라는 조대자의 은근한 압력을 부담스러워하는 태양. 그녀는 글을 쓰는 일에서도, 시나리오 작가인 선배를 사랑하는 일에서도 열정적이고 에너지 넘친다. 그러나 그녀는 순수한 작가 지망생이었던 지난날, 한 국회의원의 자서전을 집필하며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짓밟혔던 아픔을 품고 있다. ‘소설가라며, 소설을 쓰시라고.’ 없는 일도 있는 사실마냥 부풀려 써야 하는 자서전 같은 건 더럽고 치사해서 안 쓰면 그만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녹록하지 않은 현실 앞에 결국 그녀는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고 시나리오 작가로 전업한다.

다행히도 선배와 함께 목란의 이야기를 각색해 쓴 시나리오가 성공하고 그녀는 다시금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연인이었던 선배는 태양의 이름을 쏙 빼 홀로 명예를 가로채고 그녀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믿었던 그는 연락을 끊고, 목란은 오천만 원을 내놓으라며 그녀에게 망치를 휘두르며 고함을 지른다. 조대자는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비운 상태. 우울증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큰오빠와, 술로 시간만 죽이는 둘째 오빠만이 곁에 남아 있다. 그녀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국회의원의 자서전을 집필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비서가 먼저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원하는 소설을 써 드리겠다며 씨익 여유 있는 웃음까지 지어 보인다. 태양의 모습에 마냥 손가락질할 수만은 없다. 결혼과 가정의 수호신이었던 헤라가 질투 많은 악처로 변모한 데는 제우스의 무시무시한 바람기가 전제되었듯, 꿈대로 사랑대로 살려고 했던 한 인간의 좌절된 꿈은, 돈과 권력에 대한 왜곡된 집착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목란언니의 한 장면. 무대 중앙에 태강으로 보이는 남자와 목란이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태강은 회색 니트를 입고 조금 헝클어진 머리로 목란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고, 목란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철학과 교수 태강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도 같다. 태강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이 철학과를 폐지한다는 사실에 좌절하지만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다. 분노한 제자들이 태강을 찾아와 하소연할 때도 그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해 줄 수 없었다. 마치 허름한 국밥집 구석에 앉아 돼지고기에 비계만 있다며 주인 아줌마에게 화를 내는 어느 시인의 모습을 닮았다. 파리스는 세상의 모든 전략을 알 수 있는 혜안과 승리의 기쁨을 주겠다던 아테나의 제안을 거절한다.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은 지혜가 세상에서 거부 당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첫째 태산은 옛사랑을 잊지 못해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역사학자다. 또한 그에게는 어린 시절, 함께 죽자는 조대자의 절망 어린 속삭임이 내면 깊숙이 상처로 남아 있다. 그에게서는 사랑만이 전부인 아프로디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의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목란이라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 회복되기 시작한다. 삶에 지쳐 태산의 곁에 누워 다시 한 번 함께 죽자고 읊조리는 조대자에게 ‘괜찮다, 괜찮다’ 가슴을 토닥이며 위로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연극 <목란언니>에서 분단된 남과 북의 현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셋에게 던져진 목란은 파리스와 같다. 얼떨결에 월남하게 된 목란, 조대자의 룸살롱에 일을 구하러 갔던 것, 태산의 간병인으로 취직한 일 모두 엉뚱한 공간에 던져진 파리스의 모양새와 닮았다. 황금사과는 사실, 원래는 없어도 될 것이다. 사과가 굳이 황금사과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분쟁의 씨앗으로 잉태된 사과는 황금빛을 띠며 모두를 유혹하고, 그것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암투와 경쟁이 일어 난다. 여기에 휘말린 목란은 남과 북의 분단이 가져 온 비극의 피해자 모두를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루벤스의 작품 ‘파리스의 심판’. 갈색 톤의 이 그림에서는 나체의 여인들이 카페트나 천 등으로 몸을 간단히 감싸고 있고, 오른쪽 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한 남자가 황금사과를 들고 여인들에게 주려는 듯 손을 뻗고 있다.
파리스는 황금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바쳤다. 권력, 지혜보다도 사랑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그러나 목란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태산과 태강의 사랑을 모두 거절한다. 어쩌면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가난한 초가삼간에서 비를 맞고 눕는대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현실에선 통하지 않는 듯 보인다.

경계로 돌아가자

목란은 중립국만을 외치던 광장의 이명훈과 같이 남도 북도 아닌 중국으로 향한다. 남과 북의 지긋지긋한 경계 나누기에 지쳐 제3의 지대를 택한 그녀.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또 다른 경계를 만난 듯하다. 몸에 짝 달라붙는 치파오를 입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중국어로 번역된 사랑의 미로를 읊조린다. 노래를 팔고 웃음을 팔며 그녀는 또 다른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되었고, 홍등가라는 꽉 막힌 공간 속에서 또 다른 폐쇄된 사회를 만났다.
무대 위에는 정체 모를 남자와 여자가 트렌치 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목란의 옆에 서 있다. 목란은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한 채 파리한 얼굴로 무언가를 끌어안고 서 있다. 그녀의 옆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짐가방, 그리고 그 가방을 베고 앉은 채 잠들어 있는 한 여자아이가 보인다. 그들 뒤로는 무대 뒤 벽에 중국 지도자의 얼굴 사진이 보인다.
10년을 이어진 전쟁은 한 마리 목마의 등장으로 결말을 맺는다. 온갖 전략과 전술이 난무하고, 신출귀몰한 영웅들의 일화를 낳았던 트로이 전쟁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와 트로이 모두 엄청난 생명을 잃었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으며 신들은 두 편으로 갈렸다. 얻은 것은 무엇인가? 결국 한쪽이라도 황금사과가 남기고 간 진정한 행복을 찾았는가?

우리는 경계에 서 있다 아니 어쩌면 경계를 지나온 느낌이다. 남과 북을 가르는 지도 위의 경계,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나와 너는 엄연히 다르다는 심리적 경계. 이 경계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늘 있어 왔지만, 어느 순간 이에 대한 논의조차 희미해진 느낌이다. 결코 극복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관심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을 뿐. 육십 년이 흐른 지금, 그 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은 서서히 자리를 뜨고, 후손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남겨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다시금 경계를 밟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날의 상처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경계로 돌아가자. 다시 한 번 긴 전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젠 목마도 늙어버렸다.

Mini Interview
연극 <목란언니> 김은성 작가

김은성 극작가의 모습. 흰 반팔 셔츠를 입은 김은성 작가가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럽젠Q.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회와 자유롭지만 무한 경쟁만이 생동하는 사회 중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시나요?

둘 다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자유롭게 사람 사는 맛이 나는 사회를 바랍니다.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회든, 자유롭지만 무한 경쟁만이 있는 사회든, 모두 그 사회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자들에게는 참 편한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의 주체가 되고 싶습니다.

럽젠Q. 극 속 인물들 중 가장 애착이 가거나 가장 나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끼는 캐릭터는 무엇인가요?

모든 인물에 조금씩 투여되어 있습니다. 특히 삼남매 태산, 태강, 태양이 가지고 있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새로운 모색을 향한 희망까지… 그들에게 현재의 제 고민이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럽젠Q. ‘려성은 꽃이라네’ 등 북한가요를 들을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탈북자들의 현실을 실감나게 그려주셨는데요. 이러한 연출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그러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북한관련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자료들 중에서도 북에서 살다온 분들의 사적인 에세이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북한의 말과 문화지도를 해주신 평양출신 아코디어니스트 채수린 선생에게 특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집필 기간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과정이 있었다면… 남에서 북으로 다시 돌아간 탈북자가 꽤 많이 있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였습니다. 이 작품의 전체적 방향성을 획득했던 순간이었거든요.

Location 두산아트센터 Space111
Running time105분(만 13세 이상 관람가)
Price 전석 3만원, 대학생 1만 5천원
Cast 정운선(조목란 역), 황영희(조대자/남금자 역), 박성연(조대자/남금자 역), 정승길(허태산 역), 안병식(허태강 역), 신사랑(허태양 역), 성노진(오영환 역 외), 김명기(리명철 역 외), 박지환(김정일 역 외), 홍의준(서흰돌 역 외), 조한나(배명희 역 외), 이정선(권두선 역 외), 박민서(유목란 역), 박하은(유목란 역)
Info 두산아트센터 02)708-5001
Tip 마름모꼴의 무대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튀어 나오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함께 실제 북한 가요를 감상할 수 있다.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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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에서 이런 상징이 등장하는건 아니고, 목란언니와 그리스 이야기의 비교는 기자님의 생각이신거죠? 그 부분이 참신한 것 같아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의 주체가 되고 싶다.' 작가님의 한 마디가 멋져요!
  • 민성근

    잘 읽었어요. 그리고 은혜기자, 당신은 정말 글을 잘써요. 닮고 싶어요. 글/사진 고은혜 옆에 있는 겸둥이처럼 찡그리는 표정조차 글 잘쓰게 생겼네요. ㅎㅎㅎ
  • 유이정

    연극 목란언니에 내포된 남과 북의 관계가, 아니 경계가 슬프게 느껴집니다. 경계를 지나온 느낌, 요즘 들어 부쩍 느끼거든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김은성 작가의 말처럼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겠어요. 무한 경쟁의 시대에 순응만 하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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