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와 함께 하는 영국 속 소울메이트 이야기
흔히 영혼의 동반자를 일컬어 ‘소울메이트’라 칭한다. 런던에서는 예술의 도시라는 별칭을 스스로 입증하듯 곳곳의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영혼을 공유한 소울메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흐와 고갱,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음악과 미술의 빛나는 하모니를 발견해 보자. 예술과 사랑, 음악이 공존하는 영국 속 소울메이트들의, 그동안 꽁꽁 감춰졌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시작된다.
고갱 & 고흐 : 내셔널 갤러리에서 만난 소울메이트
아를의 노란 집. 고흐와 고갱의 짧았던 동거가 이뤄졌던 곳이다. 생전에 동생 테오가 아닌 누구에게도 단 한 점의 그림을 팔 수 없었던 고흐는,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낭만적 공동생활을 꿈꾸었다. 고흐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마침 파리에서의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던 고갱이 고흐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둘의 공동생활은 시작된다. 고흐는 이 사실에 꽤 들떴고, 고갱을 맞이하기 위해 노란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해바라기를 장식했다.
희망에 부풀어 시작했던 그들의 동거는 처음엔 꽤 달달했다. 함께 야외에 나가 풍경화를 그리기도 하고, 같은 대상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고,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 곳곳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서로에 대한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고흐가 자주 찾았고 <밤의 카페>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아를의 한 카페 여주인 ‘지누 부인’의 초상이다. 고흐는 강렬한 배경과 확실한 인물 묘사로, 그녀의 모습을 지적이며 우아하게 그려냈다. 반면 고갱은 술집에 앉아 술잔을 앞에 둔 채, 뒤편으로 보이는 주정뱅이 손님들을 은근히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나타냈다. 고흐의 그림에 비해 주인공에 대한 배려가 조금은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림 속 주정뱅이 손님들은 실제 고흐의 친구들이 그 모델이었다. 지누 부인의 시선은 고흐를 향하는 고갱의 시선이기도 했을 것이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고갱이 고흐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를 살펴보자. 그림 속 고흐의 얼굴은 행복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초췌하기 그지없는 표정의 고흐는 다 시들어버린 해바라기를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고흐의 상징이기도 한 해바라기는, 노란 집으로 올 고갱을 위한 고흐의 선물이었다. 자신을 위한 꽃을 화폭에 담는 고흐의 모습을 고갱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반면 고흐는 그런 고갱을 존경하고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그가 바라본 그의 의자는 딱딱하고 투박하다. 파이프 담배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갱의 의자는 장식이 꽤 있고 편안해 보이며, 촛불과 편지들이 함께하고 있다. 결별을 준비하고 있던 고갱을 붙잡고 싶었던 간절한 고흐의 마음이었을까. 그러나 결국 둘의 동거생활은 두 달 만에 끝이 나고 만다. 고갱은 자신에 대한 고흐의 마음을 집착으로 여겼다. 또한 장식적이고 강렬한 붓터치로 복잡한 심리를 묘사한 고흐의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평면적이고 단순한 색채로 표현된 원시적 주제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도려내면서까지 가지 말라고 붙잡는 고흐를 뒤로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지상낙원 타히티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얼마 후 고흐는 외로움과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타히티에서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고갱은 편지를 통해 안타까움을 전했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작품활동을 이어 나간다. 그러던 중 고갱은 1901년, 해바라기 꽃이 놓인 안락의자를 그리게 된다. 저 의자는 누구의 의자였으며, 그가 해바라기를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병을 얻어 말년을 힘들게 보냈던 고갱은 죽어가는 가운데 친구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해바라기 씨앗을 보내주었으면 하네. 여기에 심어 곁에서 볼 수 있도록.’
흔히들 고흐와 고갱의 관계를 두고 주종관계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남성적이고 진취적이었던 고갱과, 여성적이고 여린 감성의 고흐는 애초부터 한 방향의 관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 그러나 자기애와 자존심이 강했던 고갱에게도 고흐는 일생의 동반자이자 하나뿐인 소울메이트였을 것이다. 그토록 꿈꾸던 원시의 세계 타히티가 자신이 바라던 지상낙원이 아님을 깨달았던 고갱은 안식처를 찾아 고국과 타히티를 오가는 삶을 반복했다. 온전히 인간과 인간의 온정으로 함께 했던 순수한 시간들, 어쩌면 그가 찾았던 파라다이스는 고흐와 함께했던 그 짧은 두 달 남짓한 시간은 아니었을까.
빅토리아 & 앨버트 :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만난 여왕의 사랑이야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이끌었던 여왕 빅토리아. 산업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던 19세기 영국을 64년간 통치하며, 그녀는 영국이 자본주의 시대를 선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그린 초상화나 영화 속에서 그녀는 늘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여왕의 옷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검소해 보인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2대 정당제 의회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녀로부터 점점 여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변모하기 시작하고 실질적인 정치는 수상을 중심으로 한 의회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여왕의 역할이 적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아직까지는 근대였던 영국에서 여왕은 명실상부하게 나라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처음엔 그저 어린 소녀였던 빅토리아는 국무총리 멜번 경의 가르침으로 점점 군주다운 위엄을 갖추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외삼촌이었던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의 주선으로 독일 왕자 앨버트 공과 결혼식을 올린다. 사랑은커녕, 사실 그녀는 그에게 관심조차 없었고 그저 존경하던 외삼촌의 말에 그저 순종했을 뿐이다. 그러나 앨버트 공과 함께 지내면서 점차 그가 가진 진중함과 성실함, 깊은 배려심에 반하게 된다. 빅토리아는 이후 모든 회의마다 그를 대동하며 실질적으로 영국의 모든 정사를 그와 함께 의논하며 결정했다. 둘 사이에는 무려 아홉 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왕실들과 혼인을 맺으며 빅토리아를 ‘유럽의 할머니’로 만들었다.
외국인이었던지라, 앨버트 공은 영국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인정을 받게 된 계기는 독실한 청교도적 삶을 살았던 정직한 태도와, 1851년 영국에서 처음 열린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추진력이었다. 지금의 엑스포의 기원인 만국박람회는 전적으로 앨버트의 기획과 실행으로 이루어졌다. 각종 과학과 기술 작품들이 전시되었으며, 특히 전세계에서 모은 유물과 수집품으로 넘쳐났던 수정궁은 건물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했다. 통유리로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 영국의 발전된 기술을 상징하며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관람료 1페니만 내면 신분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관람할 수 있었다. 후에 빅토리아 여왕은 여기서 얻은 16만 파운드 이상의 수익금으로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을 건립해 다양한 분야의 예술작품들을 전시하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곧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병으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앨버트가 세상을 떠나고 만 것. 이후 빅토리아는 40년 간 검은 옷만 입으며 먼저 간 앨버트를 추모한다. 그녀는 앨버트 공이 짓고 있었던 콘서트홀을 완성해 ‘로얄 앨버트 홀’이라 이름 붙이고 맞은편에 그의 동상을 세워, 영국의 실질적 리더이자 사랑하는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을 기린다.
‘행복한 내 삶은 이제 끝났다. 세상이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남편을 잃은 빅토리아 여왕은 평생을 남편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반추하며 살았다. 앨버트는 그녀에게 있어 훌륭한 군주로 자라게 해 준 스승이었으며, 외로움을 나눈 유일한 사랑이었다. 비록 평생을 함께 하진 못했지만, 둘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울리고 있다.
음악과 미술 : 베르메르 특별전에서 만난 음악과 미술의 유쾌한 조우
친구들 사이의 우정, 연인과의 뜨거운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울메이트의 대표적인 형태다. 그러나 그 범위를 조금만 더 확장시켜 보자.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예술 작품은 소울메이트의 단면을 드러내 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소울메이트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바로 미술과 음악처럼.
여인은 버지널 앞에 앉아 있다.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진 덮개와 무늬로 가득한 다리가 시선을 끈다. 그보다 여인의 푸른 옷과 밝게 빛나는 흰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햇살 가득한 화창한 오후 한때를 그린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깜깜한 밤을 풍경으로 하고 있다. 어둠을 밝혀 줄 촛불 하나조차 켜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여인의 옷과 얼굴은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환하게 그려져 있다. 버지널 옆에 비스듬하게 놓인 첼로는, 여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또 다른 연주자가 위치하고 있음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벽에 걸린 그림은 반 바뷔렌의 <여자 뚜쟁이>다. 노란 옷의 늙은 뚜쟁이가 여인을 놓고 한 남성과 거래를 하고 있다.
음악과 미술은 여러 예술작품 속에 공존하며 수많은 천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음악과 미술은 독립적인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지만, 둘이 만났을 때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화가들은 음악을 내세워 직설적이고 교훈적인 주제를 완곡하게 돌려 말한다. 또한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화합을 통해, 관람자를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며 눈앞에서 선율이 흐르는 듯한 청각의 시각화를 표현해 낸다.
음악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 또한 닮았다. 그림 속 아이들은 엄숙하고 무겁기까지 한 귀족들과 왕실의 연주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아이들은 평범한 서민의 복장을 하고 있다. 특히 왼쪽 소년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데, 당시 바이올린은 류트, 버지널, 첼로, 비올라 다 감바 등의 클래식 악기가 아닌 무용 반주로 쓰였던 하급 악기였다. 가운데 어린 소녀는 군인의 투구를 드럼 삼아 두드리고 있는데 어깨엔 군인의 갑옷을 둘렀다. 그러나 그 표정은 장난기가 가득하고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심지어 오른쪽 소년은 모자에 닭발을 꽂고 있어 더욱 유쾌하고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불협화음과 시끄러운 잡음만 가득할 것 같은 이 그림은 계급과 고급, 저급의 경계를 넘어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화합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버지널 옆에 앉아 있는 여인> 속 뚜쟁이 그림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오히려 이들의 거래는 당당하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노란 옷을 입은 매춘부를 두고 검은 옷의 늙은 뚜쟁이와 붉은 옷의 장교가 거래를 하고 있다. 장교의 탐욕스러운 움직임과 여인의 상기된 표정, 그런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뚜쟁이의 미소를 보며, 추악한 욕망에 대해 혀를 끌끌 차며 비판하게 된다. 그러나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관람자를 향해 이죽거리는 미소를 짓는 남자의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너는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살펴본 <버지널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은 좀 더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벽화 속 그림은 욕망과 쾌락 추구에 대해 풍자하며 이를 엄히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도 켜져 있지 않은 캄캄한 방에서 혼자 버지널을 치며 앉아 있는 여인은 연주자를 기다리며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그녀가 연주하는 버지널이 처녀를 상징하는 ‘virgin’을 뜻한다는 데서 순결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녀의 몸짓과 미소는 오히려 벽화 속 인물들과 더 닮아 있다.
반면 이 그림에서는 여인과 남성의 설렘과 묘한 기류가 포착된다. 여인은 뒷모습만 보여 그 표정을 감추고 있지만,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우리는 그녀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남자를 곁눈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노래를 부르는 듯한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노래 부르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그녀가 연주하는 버지널의 덮개에는 ‘음악은 즐거움의 친구이자 슬픔의 약’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음악은 사랑으로 치환할 수 있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둘 사이의 핑크빛 미래를 상상해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음악은 둘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고, 그 순간을 포착한 그림은 순간의 설렘을 영원히 박제하고 있다.
런던을 찾게 된다면 갤러리와 박물관을 들러 보자. 그리고 그 속에서 절절한 사랑과 우정을 나눈 파란만장한 스토리의 주인공들을 만나 보자. 혹시 모른다, 당신도 그곳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나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