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시절, 추억의 놀이

공부하는 인간에 반기를 든다. 공부는 무슨! 태어나면서부터 노는 게 인간의 본능인 것을. 놀자, 놀자꾸나! 이 땅의 베짱이들이여, 풍악을 울려라.

베짱이는 더 이상 놀지 않는다. 사계절 내내 미련하게 일만 하던 개미를 비웃던 일도 이젠 옛말일 뿐. 날카로운 더듬이, 길쭉한 뒷다리로 개미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먹이를 나르고 저장한다. 하지만 개미들은 물론 베짱이도 늘 그리워한다. 여름만 되면 울려 퍼지던 베짱이의 시원한 바이올린 소리를.

90년대 생 모두 공감!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세일러문 만화의 한 장면. 교복을 입은 다섯 명의 세일러문 캐릭터가 일렬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세일러문 할 시간이다!” 영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TV 앞으로 달려간다. “손은 씻고 들어오는 거니?” 엄마의 잔소리에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 대충 손을 씻는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주제가 소리에 얼른 다시 TV 앞으로 뛰어간다. 오늘도 어김없이 악당이 등장하고 세라는 정의의 사도로 변신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세일러문의 휘황찬란한 변신과정을 따라 해본다. “얼른 앉아서 밥 안 먹니!” 또다시 들려오는 엄마의 잔소리에 기가 죽어 억지로 밥상 앞에 앉는다. 고무줄놀이를 진탕 하고 돌아온 탓에 배가 고플 법도 하지만, 입맛은 별로 없다. 당연하지, 이미 불량식품을 잔뜩 먹었으니 말이다. 아폴로, 쫀드기, 차카니, 피져. 하루라도 안 먹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내 사랑스러운 군것질거리들. 아,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알잖아요, 어릴 때 뭐 하고 놀았는지

엄마의 손가락을 쥐고 있는 조그마한 아이의 손이 클로즈업된 모습.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놀이와 함께했다. 아이는 처음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천장에 매달린 모빌을 본다. 어머니의 얼굴이 두 손 뒤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놀이는 아이에겐 신기한 경험이다. 어머니의 얼굴이 사라지면, 아이의 세상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영영 사라진 것과 같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나면 아이는 안심을 하며 세상에 대한 믿음을 키워 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말을 하고 걸을 수 있게 되면서 아이는 스스로 놀이를 찾아 나선다. 물건들을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물어 맛보면서 천천히 세상을 배워 나간다. 그러다가 서너 살이 되면 친구들과 엄마놀이, 병원놀이 같은 역할놀이를 시작한다. 놀이를 통해 사회를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추억의 물건들이 모여 있다. 왼쪽 위 사진은 아폴로, 쫀드기, 꾀돌이 등 불량식품이 늘어선 사진이고, 오른쪽 위 사진은 황토색 막대사탕이 잔뜩 쌓여 있는 모습이다. 왼쪽 아래 사진은 종이를 오려 인형처럼 갖고 노는 종이 인형이 매대에 꽂혀 있는 모습, 오른쪽 아래 사진은 만화 ‘천사소녀 네티’의 한 장면이다.
뛰어놀 나이가 되면 아이의 놀이 세계는 꽃을 피운다. 술래잡기, 숨바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의 놀이를 통해서는 ‘술래’라는 역할을 체득한다.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한발 뛰기와 같은 놀이로는 뛰어놀며 몸을 사용하게 된다. 만화영화를 보며 주인공을 따라 하기도 한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아이는 문방구라는 신기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온갖 달콤한 진미가 쌓여 있는 그곳은 아이의 천국이다. 몸에 안 좋은 걸 분명히 알면서도 용돈이 생기는 날엔 수업이 끝나자마자 뛰어가곤 했다. 문방구 앞 조그만 오락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락도 하면서.
엽기토끼와 뿌까의 캐릭터. 하얗고 몽실몽실한 몸뚱이에 삐죽 튀어나온 귀, 아예 감긴 눈으로 늘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엽기토끼의 캐릭터가 왼쪽에, 양 갈래로 올려묶은 머리에 빨간 옷을 입고 있는 뿌까의 캐릭터가 오른쪽에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가장 다양한 형태의 놀이를 접하고 자란 세대다. 세기가 바뀌는 밀레니엄을 경험한 우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뒤섞인 ‘놀이 과도기’ 세대이기도 했다. 공기놀이, 지우개 싸움, 만화영화 등 우리의 놀이는 70년대의 그것에서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그 옛날 여고생들이 좋아하는 구절이 담긴 시를 편지 대신 주고받았다면, 90년대 세대 사이에서는 예쁜 디자인의 종이에 색색의 펜으로 편지를 써 우정을 확인하는 ‘러브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MRk, 마시마로, 부르부르, 뿌까 등 캐릭터가 그려진 문구들이 인기를 끌었고, 엄마들이 조용필에 열광했듯 우리는 신화, 동방신기에 열광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핸드폰이 보편화되면서 세상은 조금 더 빨라졌고, 우리는 새로운 놀이에 눈뜨게 되었다. 친구와의 비밀이야기는 손편지나 쪽지 대신 인터넷 메신저 버디버디로 주고받았다. 친구들끼리 CD를 빌려 소니, 슈퍼마리오 게임을 하기도 했으며, ‘주니어 네이버’, ‘아후 꾸러기’의 유행으로 각종 심리테스트, 옷 입히기 게임 등 플래시게임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우리의 놀이 공간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플래시게임 캡처 모습. 왼쪽 사진은 여자의 얼굴에 다양한 메이크업을 시도해볼 수 있는 메이크업 플래시게임 모습, 오른쪽 사진은 캐릭터의 몸에 원하는 옷과 헤어 스타일을 앉혀 볼 수 있는 플래시게임 모습이 캡처로 담겨 있다.

베짱이는 더 이상 놀지 않는다

다양한 브랜드의 소주병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모습. 대학생이 되면 ‘마냥 놀자!’라고 했던가. 다양해진 것 같지만, 대학생의 놀이란 사실 그렇지 않다. 대학생의 놀이 공간은 오히려 학교 근처의 술집, 카페, 클럽 등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제는 친구들과 인형을 들고 역할놀이를 하지도 않고, 만화영화를 보며 흉내를 내거나 따라 하지도 않는다. 일차원적인 ‘놀이’ 개념이 사라짐과 동시에, 제대로 놀 수 있는 ‘놀이’가 그 형태를 감추고 마는 것. 우리는 어쩌면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상 속에서 점차 놀이에 대한 생득적인 개념들을 차례로 잊어가는지도 모른다.

놀이를 잃어버린 우리가 어른들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맞는 놀이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저 성숙한 성인들의 놀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윗세대의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어가는 존재로 그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놀이란 무엇일까? 네덜란드의 학자 호이징거는 말했다. 인간은 놀면서 큰다고, 역사는 놀이와 함께 발전한다고. 비록 놀이라는 것이 먹고 입고 자는 생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놀이는 ‘문화’라는 생활양식의 출발점이 된다. 비생산적인 활동, 그래서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쓸데없는 행위이지만 그래서 더 자유롭고 창의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놀이는,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신께 제사를 지내고, 동굴벽화에 손바닥 그림을 남기고, 사후세계를 위해 피라미드를 만드는 행위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놀이가 없었다면? 인간의 삶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놀이가 있었기에 풍요롭고 새로운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감히 말한다. 인간은 놀아야 살 수 있으며, 놀아야만 한다. 신생아기부터 인간은 놀이와 함께 성장하고 발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이를 잃어버린 우리는 궁금하다. ‘논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여전히 놀고 있는 걸까? 혹시, 어느 새부턴가 우리의 놀이는 이미 끝나버렸던 건 아닐까?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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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네요! 어릴땐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없이도 동물놀이, 소꿉놀이를 하며 정말 재밌게 놀았는데... 오히려 더 재밌게 놀 수 있는 나이가 된것 같은데도 놀지 못하는? 놀지 않는? 현실이 신기하고 또 조금은 답답하네요 :( 은혜기자님 같이 놀아요!
  • 위풍당당원이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하는 노래도 있잖아요.. 단순히 일하지 말고 놀자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재밌게 한바탕 놀아보자~라는 뜻이잖아요.. 옛 선조들이 이렇게 노래까지 불러가며 잘 놀던 것에 비하면 요즘 세대는 참으로 못 노는 것 같아요..
  • 유이정

    우와 은혜기자님 ㅋ_ㅋ 기사를 읽으며 과거 좀 '놀았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네요 ㅎㅎ 7살 때 피아노 선생님께서 집에 오셨는데 만화영화 끝까지 보고 싶어서 레슨을 계속 미루던 기억, 초딩 4학년 때 친구들이랑 같이 아바타 옷 입히고 꾸미고 했던 기억, 초딩 6학년 때 버디버디에서 남자친구랑 닭살스런 대화를 했던 기억,... 미스터케이 잡지도 정말 많이 봤는뎅ㅋㅋㅋㅋ 치즈스틱 요리법도 그 잡지에서 배운 걸 기억하는 거거든요 ㅎㅎ 그 잡지에서 참 많은 걸 배웠더랬죠. 우유 미백법, 쌀뜨물 세안법 등등 다양한 피부관리법은 물론 연예인들 이야기, 그 뒤에 부록으로 실린 편지지까지 잘라서 아이들이랑 주고 받고... 아... 추억돋아요 ㅎㅎ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저희보고 대학생이 되면 맘껏 놀 수 있다, 지금은 공부하고 그 때 원없이 놀아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시절 더 잘 놀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갈 수 있는 데가 오히려 너무 획일적이 되버려서. 그래도 은혜 기자님이랑 어디서든 또 놀고 싶어영~~~~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ㅋㅋㅋㅋㅋㅋㅋ 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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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엠알케이... 그 암흑의 흑역사를 떠올리게 되다니. 러브장 생각만 하면 타자를 치는 지금도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그라들어 심신이 참 괴롭네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그지 없지만, 그 때는 그 러브장 하나로 친구와 우정을 확인하고 소속감도 느끼고 참 중요했던 것 같아요ㅋㅋ 우리 어디서 놀까요?

  • 이유진

    추억을 곱씹으며 '추억의 놀이' 기사 재밌게 읽었습니다 :)
    쓸데없는 짓, 비생산적인 짓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 시킬 만한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싶네요 흐흐
    그러고 보면 우리말 중에는 버릴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놀고있네~'라는 비꼬는 말이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주로 가만히 있거나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때 '논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진짜 대차게 놀아본지는 오래된 것 같아요! 매일 놀고 있지만 우리가 정말 놀고 있는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항항 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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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정말인가요? 정말 놀아본 지 오래된 거 맞나요? ㅋㅋ장난이라능. 아 추억이 마구 떠오르네요. 특히 변신만화 보면서 친구들이랑 역할놀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참고로 전 앗싸 담당이었어요. 웨딩피치에서는 사루비아, 세일러문에서는 플루토. 그러나 역시 주인공을 가장 탐냈던 것 같아요. 내가 체리 할거야! 내가 핑크야! 내가 궁극의 세일러문이야! 나야! 내가 주인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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