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만화, 어깨동무하고 함께 가는 길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앨리스는 붉은 여왕과 함께 어딘가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문득 앨리스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붉은 여왕님, 정말 이상하네요. 지금 우리는 아주 빨리 달리고 있는데 주변의 경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아요.” 그러자 붉은 여왕은 말했다. “제자리에 남아 있고 싶으면 죽어라 달려야 해.”

인권 만화, 10년의 발자취

여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처럼 끝없는 마라톤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10년째 인권 만화를 그려온 손문상, 박철권을 포함한 열 명의 만화가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인권을 그려낸 것. 제주 강정마을의 눈물, 성폭력 피해 소녀의 눈물, 병원 청소 아줌마의 눈물이 한 권의 책으로 응집됐다.

손문상(이하 손) : 사실 저희는 인권 운동을 하거나, 인권을 위해 삶을 바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인권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죠. 그저 우리는 사람들과 같이 고민하고 싶었어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처음 워크숍을 할 때도, 우린 ‘흡연권이냐 협연권이냐’를 두고 장시간 토론을 할 만큼 인권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죠. 그저 대중들이 느끼는 울분에 지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세 권의 책을 내면서 내가 이해하고 있던 인권의 개념이 확장되는 게 느껴졌고, 10년이라는 시간과 함께 사회도 서서히 변화되는 게 느껴졌어요.

이번에 출간된 <어깨동무>는 2003년 <십시일反>, 2006년 <사이시옷>에 이어 세 번째 인권 만화다. 이 전의 두 권이 ‘차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어깨동무>는 인권의 개념과 함께 평화권, 환경권까지 포함한 광의적인 인권을 다뤘다. 인권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첫 출발을 알린 <십시일反>은 예상외의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16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만화가들은 그저 책이 계속해서 찍혀 나가고 포털 사이트에 책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움을 느낀다.

: 아이가 다니는 학교 도서관에 책들이 꽂혀 있는 걸 보면 뿌듯함을 느껴요. 그리고 실제로 현재 초, 중, 고등학교 공교육 현장에서 인권 만화가 가장 많이 다뤄지고 있고요. 때때로 그 영향력을 피부로 느끼기도 하죠. 실제로 인권 만화를 접한 고등학생들이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촛불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선생님들께서 이 책들을 가지고 숙제를 많이 내주신다고 해요. 그렇게 일선의 교육 현장에서 계속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게 저희에겐 참 고마운 일이죠.


물론 아무런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비교적 순탄하게 책을 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들에게도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다. 취재원과의 관계가 만화를 그리는 일보다 어려운 것 같다며, 손문상 작가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취재를 갔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한 달 동안 강정마을에 머무르면서 취재원을 파악하고, 그곳에서 느낀 점들을 토대로 한창 만화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물론 취재 허락도 받았다. 중간중간 그의 만화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연재되기도 했다. 책의 출간을 코앞에 둔 어느 시점, 갑자기 ‘은별이’의 대상이 되었던 아이와 가족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손 작가는 여러 사람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얽고 일의 순차를 바꾸는 노력 끝에 겨우 출간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박철권 작가 역시, 한 대학병원 식당 아주머니들의 인권을 다룬 만화에서 특정 병원의 외관을 그대로 그렸다는 이유로 1쇄가 끝난 시점에서 그림을 수정해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인권 문제와의 싸움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철권(이하 박) : 처음엔 내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특정 집단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적군이 되기도 하고 아군이 되기도 하고. 하지만 어느 순간 헷갈리는 시기가 오더라고요. 양쪽의 얘기가 모두 맞아 보이는 거죠. 판단을 위해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인권 문제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죠. 매일 아이디어와 씨름하면서 마감이 다가오면 그나마 최선의 입장을 뽑아 이야기에 올리지만 결론은 없는 거죠. 다만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해서 정답에 근접하게 다가가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그게 저에겐 매력으로 다가온 거죠.

청소년,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어른에게

이날 뉴스에선 한 국회의원의 고등학생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집단 따돌림이 아닐까 의심되는 상황에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박철권 작가는 이 소식을 전하며 11년 전 한 잡지에서 읽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부족한 것 없이 생활하던 한 남성의 집에 난데없는 불행이 찾아왔다. 공부는 물론 성격도 쾌활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던 고등학생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파트 15층, 계단 옆 좁은 창문으로 몸을 던진 아들은 차 위에 떨어져 온몸이 골절된 상황에서 다시 계단을 올라 똑같은 곳에서 한 번 더 몸을 던졌다. 그 후 아버지는 청소년 자살 관련 센터를 운영하며 학교와 가족에서 억압받는 청소년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다.

: 그 아버지가 말하길 고독에 빠져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청소년을 만났을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는, ‘나도 네 시기 겪어 봤는데, 나도 다 아는데, 다 똑같아. 지나가면 괜찮아.’라는 말이라고 하셨어요. 극도의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겐 삶의 의미 자체를 상실시키는 말이라고요. ‘다들 똑같다면 나는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좌절해 버릴 수 있으니까요. 인권의 담론 자체도 자신이 좀 특별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나라서, 너는 너라서 특별하고 소중한 거죠. 그걸 획일화시키고 분류하고 무력화시키는 과정이 모든 인권 문제의 시작이라고 봐요. 이 책들이 학생들에게 읽히면서 그들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지 깨닫고 자신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그런 인권 작품이 많아졌으면 좋겠고요.

하지만 여전히 왕따, 자살문제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암 덩이다. 갈수록 왕따 문제는 심각해지고 TV에서도 연일 학교폭력 이야기가 다뤄지고 있다. 이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청소년도 꾸준히 늘고 있다.

: 과연 나아졌나? 생각하면 솔직히 회의적인 입장이에요. 아무리 인권교육을 강조하고 있다고는 해도 나아진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여전히 아이들은 그저 경쟁력 있는 임금 노동자로 키워지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이런 노력들은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덧붙여 손문상 작가는 오히려 중장년층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 이미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세대는 공황이 발생하든, 질서가 붕괴하든, 무언가 삶을 바꿔야 할 커다란 자극이 있기 전까진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아요. 그래서 변화는 더더욱 어렵겠지만 절망만 하고 있지도 않아요. 이렇게 계속해서 책을 출간하는 게 그 증거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그럼에도 앨리스는 달린다

앨리스가 붉은 여왕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렇게 빠르게 오랫동안 달린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아주 먼 곳에 도착했을 거예요.” 붉은 여왕은 대답했다. “네가 살고 있는 곳은 아주 느린 나라인 모양이구나. 여기서는 이 정도의 속도로 달리면 같은 장소를 벗어날 수 없어.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려면 적어도 지금 속도의 두 배로 달려야 한단다.” 붉은 여왕의 말처럼 우린 어쩌면 아주 느린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너나없이 빛의 속도로 달리고 있으니, 아무리 빨라도 눈에 띄지 않는다. 불행히도 인권 문제는 결코 빠르게 달릴 수 없다. 의미 없는 체력소모일까? 뒤처지지 않으려는 노력, 함께 가려는 의지만으로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변화가 아닐까?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emoticon

스티커 댓글

스티커를 사용해서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달기
  • 감동
  • 부들부들
  • 눈물
  • 두근두근
  • 좋아요
  • 사랑해요
  • 멋짐
  • 하하
  • 신남
  • 행복
  • 멘붕
  • 헉
  • 시무룩
  • 하이파이브
  • 응원
  • 쓰담쓰담
  • 뽀뽀
  • 박수
  • 선물하기
  • 고마워
  • 귀여워
  • 셀카
  • 저요
  • 열공
  • 쓰러짐
  • 씻기
  • 팩

소챌 스토리 더보기

대학생 집콕러를 위한 월간 소비

편지가게 글월,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은 게 언제예요?

비전공자를 위한 교양서

비전공자를 위한 전공자의 교양서 큐레이션

일본어 번역가 강민하 | 마음까지 전하는 번역

VEGAN ESSAY 의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입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식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먹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입문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12년, 빙의하고 싶은 영화 속 주인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