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 플레져, 싼 티가 아닌 또 하나의 ‘취향’

“오렌지 캬라멜? 완전 유치 찬란하지.”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발언하는 윤모 씨(34, 직장인). 그의 주머니 속 굴러다니는 mp3의 플레이 리스트엔 ‘마법 소녀’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이중 취향에 대한 커밍아웃을 권하는 마음으로.

우리 사회에는 문화를 고급과 저질로 나누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존재한다. 당신의 학창시절 꼭 한 명쯤은 존재했을 힙합(락으로 바꿔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마니아 친구 K와의 대화를 한번 떠올려 보라. “한국 대중가요? 그런 거 왜 들어? 난 힙합 아니면 솔직히 음악도 아닌 거 같아.” 그의 혀끝에 달랑달랑 매달린 것이 힙합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애정인지,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이에 대한 모욕인지 한없이 헷갈렸던 기억이 있는가? K는 단지 남보다 일찍 깨달았던 거다. 취향은 ‘나, 이런 사람이야~.’를 입증할 수 있는, 무엇보다 확실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프랑스 석학 피에르 부르디외는 일찍이 ‘취미는 계층을 구분하고, 구분한 자를 구분시킨다.’라고 말했다. 말인즉, 취향은 사람의 사회적 계급을 대변해 주는 척도라는 것. 이 사실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을 즈음, 우리는 급격히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를 느낀다. 그토록 열망하던 동방신기, 신화의 노래와는 안녕하고 슬슬 나의 이상적인 사회 지위에 맞는 취향을 계발하고 싶은 것. 바다 건너온 음악을 찾아 듣고, 안 가던 영화관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는 것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 같은 취향 개조 작업에 한계가 오는 순간이 있다. 눈앞의 현대미술 조각품을 보고 드는 생각이란 오직 ‘문화 귀족은 이걸 보면 딱 ‘삘’이 올까?’ 뿐이건만, 삼류 드라마는 자존심 상하게도 왜 그리 재미있단 말인가. 하지만, 어디 가서 이런 드라마가 좋다고 말하는 건 창피한 일 같다. 취향이 저렴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두려움에 떤다. 집에선 신나게 즐겨도 밖에 나가면 입에 자물쇠를 걸어 잠근다. 어느 순간 남 보기에 낯부끄러운 취향은 조용히 마음속 동굴에 처박는다. 오직 내 방 안에서만 꺼내볼 수 있는 그 가여운 취향, 그것을 우리는 죄책감 어린 행복 ‘길티 플레져’라고 부른다.

‘싼티’ 취향, 방문을 나서다

하지만, 최근의 길티 플레져는 오랜 은둔생활을 벗어나고 있다. 너도나도 슬쩍 자신의 ‘길티 플레져’적 취향을 공개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져’ 봉인의 살아 있는 증인은 바로 ‘오덕용’ 아이돌에서 사랑스러운 프로 그룹으로 격상된 ‘오렌지 캬라멜’이다. 걸 그룹 ‘애프터스쿨’의 유닛(소수의 멤버를 이뤄 따로, 혹은 같이 활동하는 그룹) ‘오렌지 캬라멜’과 그녀의 노래 ‘마법 소녀’는 첫 등장 당시 인터넷상에서 가히 파란을 일으켰다. 그 뜨거운 반응의 절대다수는 짐작 가능하게도 최악을 그렸다. ‘부끄부끄부끄럽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어떡해 어떡해.’라는 구절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가사, 오글거릴 정도의 의도적 귀여움, ‘카드캡터 체리’에나 나올 법한 의상 컨셉트. 그 과장의 삼박자를 접한 네티즌은 그들에게 가감 없는 비웃음을 날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슬슬 다른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오렌지 캬라멜’의 게시물에 달리는 댓글의 뉘앙스는 서서히 비난 조에서 찬양 일색으로 변해갔다. ‘솔직히 처음엔 욕했지만, 오렌지 캬라멜의 무대를 매주 챙겨보고 있다.’고 고해성사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드림 하이> 또한 공인된 수작이라고는 할 수 없음에도, 다수 팬을 양산해낸 케이스다. <드림 하이>는 애초 기획 단계에서부터 숱한 논란을 달고 다녔다. 주연 대부분이 현직 아이돌이라는 점은 ‘대체 저 드라마에서 연기는 누가 하느냐.’는 비웃음을 불렀다. 소녀 감성을 자극하는 류의 인생사-재벌가의 서자라거나 노래와 춤에 완벽한 재능을 지닌 예고 학생이 멋진 가수가 되려고 고군분투한다는 스토리는 중학교 시절에 애독하던 인터넷 소설을 연상시켰다. 그렇게 만인의 걱정과 짜증을 뒤로하고 뚜껑을 연 <드림 하이>는 손발을 펴지 못하게 하는 설정, 잘 보다가 고개를 갸웃할 만큼 부족한 개연성 등 우려한 예상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그럼에도, <드림 하이>는 클리셰적인 설정도 사랑스럽게 느껴지게 하여 마니아를 대량으로 양산하는데 성공했다. 최근 네티즌이 지어준 이의 별명은 드림 하이와 뒤통수의 합성어인 ‘드림통수’다. 기본적으로 등장 인물이 뜬금없는 배신과 배신을 거듭하여 붙은 별명이지만, 알고 보면 그 속에 숨어 있는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저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은 실제로 다소 저질인데 종종 허를 찌르도록 괜찮은 구석이 있다는 의미다.

후진 게 아니라 ‘취향’의 일부로 마주하기

우리가 ‘길티 플레져’를 마주하는 태도가 변화된 이유는, 절대성에 대한 거부감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쿨하지 못해 미안하다.’를 외치며 화제의 검색어 1위를 석권했었던 UV를 떠올려 보라. 이 요상한 2인조가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쿨함에의 강요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많은 이들은 이제, ‘이게 바로 가장 좋은 거’라고 규정하는 사회의 움직임에 동조하기보다는 도리어 반감을 느낀다. 문화의 질이나 타인과 사회의 시선에 대한 의식은 이제 의무가 아닌 피로감으로 다가온다. 취향을 솔직 담백한 태도로 마주하고자 하는 이들의 ‘싼 티’ 취향에 대한 커밍아웃은 이제 사회 각지에서 속속 일어나고 있다. 작년 10월에는 그간 예술계의 변두리 중의 변두리에 있었던 소위 ‘이발소 그림’을 예찬하는 독특한 전시회 ‘삼각지 미술 예찬전’이 열리기도 했다. 이발소 그림은 독창성을 최고로 치는 미술계에서 저급 문화로 규정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던 처지다. 이 전시를 주최했던 황하연 큐레이터는 “문화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나는 떳떳하게 이발소 그림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뜻을 밝히며 말을 이어갔다.

문화를 나눌 때 예전에는 수직, 상하로 나누었다고 한다면 요즘에는 문화가 곧 수평, 좌우라고 할 수 있어요. 과거와는 달리 소수의 문화도 인정받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전에는 감추었던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죠. 또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그것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타인을 만나게 되는 것이 현대 사회인의 바람이 아닌가 싶어요.

한때는 저질로 치부되었던 키치와 B급에 대한 예찬은 이제 생소한 모습이 아니다. 온라인을 필드로 삼은 사람들은 표현과 소통을 통해 취향을 나누며 향유하고 있다. 수줍기만 했던 저급 취향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화려한 포장 속에서 엄연히 빛나는 나름의 미학을 발견해낸다. 절대성에 대한 조급함은 접어두고 오늘은 당신의 취향을 담백하게 마주하기를 권한다. 그러다 보면 당신의 즐거움에 깃든 길티guilty가 어느덧 이노센트innocent로 변모해 있을지니.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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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면서 혼자 참 재밌었던거같애요 ㅋㅋㅋ 재밌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히히 듀림하이는 짱이죠
  • 박상영

    저의 길티플레져를 공개하자면...사실 저는 괴짜가족을 15년 째 한 권도 빠짐없이 읽고있습니다...ㅋㅋㅋ짱구도요.....ㅋㅋㅋ
  • 박상영

    우와 경신기자 글을 이렇게 위트있게 쓰다니. 멋지네요
  • 천혜진

    기사가 쭉쭉 읽힐만큼 재밌었어요 :) 스스로의 취향에 당당한거 멋진거같아요
  • 황태진

    아아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취향은 사람의 사회적 계급을 대변해 주는 척도라는 것이라는 말 공감합니다.가끔 친구의 mp3를 보며 뭐 이런 노래를 듣지? 라고 마치 수준이 떨어지는냥 생각하지만,
    정작 제 mp3플레이어에도 그런 노래가 그득하다는 아이러니한,,, 정말 시선 의식을 버리고 담백하게 나 자신을 마주해야겠군요 후후
  • N

    '좋은 취향'은 'better'가 아닌 'good'이죠. 자신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고 소통하는 취향. 전 음악도 비즈니스도, 뮤직 비즈니스도 좋아하는 사람의 하나로써 오렌지캬라멜 지지하는편입니다. 퍼포먼스적으로 새롭잖아요.정말 싫은건 그런 B급이 아니라 재능없이 '비즈니스'만 하고있는 문화컨텐츠들일것같아요. 글 잘읽었습니닿ㅎ
  • 삼다

    와- 기사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 드림하이 엄청 챙겨보면서 좋아했는데, 저 말고도 많이들 그러더라구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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