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민규┃지금으로도 당신은 충분하다

강의명 박민규 <더블> 북 콘서트
강사명 박민규
강의 일시 2010년 12월 15일 오후 8시
강의 장소 홍대 상상마당 라이브 홀

빨간색 재킷과 겨자색 터틀넥 티셔츠, 눈썹까지 가리는 짙은 선글라스, 잘 관리된 수염과 길게 늘어뜨린 장발. 무대에 등장한 작가 박민규의 모습은 한 명의 로커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터프하게 관중을 사로잡을 것만 같았던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수줍고 조심스러웠다. 한파 속에서도 객석을 가득 메운 1백여 명의 청중을 향해 그는 ‘한 땀 한 땀’ 정성껏 꿰어내듯 이야기를 수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이너리티’다

인생은 흔히 달리기에 비유된다. 무엇인가의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과정의 연속. 우리는 그 경주에서 승리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강요받았고, 또 그렇게 믿는다.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박민규는 말한다. 잠깐 쉬어가도 좋다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이끄는 자리에 앉아야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힘든 운명이에요.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승리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해서 패배가 아니라는 거죠. 과연 뭐가 뭘 이긴 거죠? 무엇을 패한 거고요? 살아가잖아요, 같이.

그는 스스로 ‘마이너리티’라고 정의하고 이를 응원하지만, 소위 ‘메이저리티’로 표현되는 승자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

예전에는 패자나 빈자를 ‘마이너리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마이너리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모두가 다 ‘마이너리티’인 거에요. 다 불행을 안고 있고, 외롭고 불쌍한 존재들인 거죠. 부자도, 승자도 마찬가집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마이너리티’를 차차 극복해가는 게 과제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많이 위로해주고 싶어요.

‘평범함’의 위대함

<지구영웅전설>을 시작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 그의 삶은 평범함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이제까지 한국문학에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글쓰기였고, 독자의 반응도 뜨거웠다. 이효석 문학상과 황순원 문학상, 이상 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평단의 인정도 받았다. 이제 박민규라는 이름은 공공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제가 작가가 되어 인터뷰하고, 지금 이런 자리에도 있지만 사실 굉장히 싫어하는 일들이거든요. 이태까지 매체에서 고글이나 선글라스를 쓰고 사진 찍은 것들, 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에요. 일종의 코스프레죠.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최악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예전에 광고회사나 잡지사 일을 하면서 옆에서 여러 사람을 지켜봤어요. 유명해서 망가지고 불행해지는 사람들. 차단하고 싶었어요, 제 삶을. 작업실에서 집에 돌아오면 ‘츄리닝’을 입고 나가서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오고. 그런 게 보호하고 싶은 제 삶이에요. 그거 되게 행복하거든요. 그런 거 상상하기도 싫어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데 ‘혹시 박민규 작가님 아니세요?’라고 알아보는 거.(웃음)

그는 인터뷰하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신간이 나오면 으레 언론 인터뷰와 여러 마케팅 행사에 참여해 홍보하기 마련인데 그는 출판사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행사에만 참여한다. 인세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글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독자가 읽었으면 하는 게 저자의 바람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말한다.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우리는 더 올라가야 할 것 같지만 사실 내려갈 곳도 굉장히 많거든요. 잃어버려야 할 게 이만큼 많은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세상이에요. 우린 진짜 많이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계속 ‘더, 더, 더!’를 외치잖아요. 자발적으로. 정말이지, 가장 위대한 삶은요. 평범한 삶이에요.

‘각오’가 아닌 ‘각성’하는 삶

재즈 가수 말로의 공연과 낭독이 끝나고 북콘서트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그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작가 박민규가 아니라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의 대통령을 비롯한 기성세대들. 제 세대도 마찬가집니다. 실은 불쌍한 세대에요. 여태까지 평생 ‘각오’만 하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전쟁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잘살기 위해. 이제 더는 올라갈 수 없는데도 더 잘 살아야만 할 것 같아서 지금도 각오하고, 다짐해요. 아마 죽을 때까지 각오밖에는 못할 거에요. 저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여러분마저 각오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여러분은 ‘각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는지, 앞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각성하는 세대가 한국사회의 주류로 올라서길 바랍니다.

그가 말하는 ‘각성’이란 현실에 안주하라는 뜻이 아니다. 끊임없는 경쟁의 굴레 속에서 잊어버린 목적의식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야를 되찾으라는 것이다.

우쭐거리지도 말고, 비하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느끼세요. 하나하나 ‘패치’한다고 할까요. 속도 낼 때는 속도를 내고, 가끔 풍경을 보면서 쉬기도 하고. 조화를 이뤄가야죠. 정말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고 드라이브잖아요.

우연히 박민규 작가의 2003년도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너무나도 소탈한 모습의 사진 때문이었고, 다른 한 번은 7년이 지난 지금과 같은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마이너러티’를 위한 글을 쓰고자 하는 그의 포부는 지금도 유효했다. 문득 본인이 땅바닥에 떨어진 낙엽 한 장만도 못하게 느껴질 때 그의 글을 읽어보자. 마치 파릇파릇한 새싹으로 돌변한 듯 그의 따뜻한 응원이 위로해 줄 것이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emoticon

스티커 댓글

스티커를 사용해서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달기
  • 감동
  • 부들부들
  • 눈물
  • 두근두근
  • 좋아요
  • 사랑해요
  • 멋짐
  • 하하
  • 신남
  • 행복
  • 멘붕
  • 헉
  • 시무룩
  • 하이파이브
  • 응원
  • 쓰담쓰담
  • 뽀뽀
  • 박수
  • 선물하기
  • 고마워
  • 귀여워
  • 셀카
  • 저요
  • 열공
  • 쓰러짐
  • 씻기
  • 팩

소챌 스토리 더보기

대학생 집콕러를 위한 월간 소비

편지가게 글월,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은 게 언제예요?

비전공자를 위한 교양서

비전공자를 위한 전공자의 교양서 큐레이션

일본어 번역가 강민하 | 마음까지 전하는 번역

VEGAN ESSAY 의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입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식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먹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입문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12년, 빙의하고 싶은 영화 속 주인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