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상욱┃긍정의 큰 울림

시 쓰는 것이 좋아 글쟁이를 꿈꾸던 시골 소년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느 날, 전교생 7백여 명 중에 530등이라는 고2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는 야단치며 말씀하셨다. “너 도대체 나중에 뭐 해먹고 살래?” 반항기가 가득했던 그 소년은 말했다. “기자나 되죠! 뭐.”
Abracadabra(아브라카다브라)!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편상욱 앵커는 기자의 꿈을 이뤄 15년간 현장을 누볐다. 3년 전부터 앵커로서 새벽 3시에 퇴근하던 생활리듬이, 아침 뉴스인 <출발! 모닝 와이드>를 맡으면서 새벽 3시에 출근하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마감 뉴스를 진행할 당시, 항상 클로징 멘트를 통해 시청자와 소통하려고 했다. 한 번은 30초 남짓의 ‘조금 긴 클로징 멘트’를 통해 소신 있는 발언을 한 뒤, 격려와 항의가 섞인 메일을 수천 통 받기도 했다. 아침 뉴스로 옮겨가면서 이제 긴 클로징 멘트를 들을 수 없게 됐지만 시청자와 교감하려는 그의 노력은 얼마 전 4월 28일 뉴스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계피겨선수권대회 뉴스를 전하며 주먹을 불끈 쥔 채 해맑은 미소로 외친 그를 기억하는가. “김연아 선수, 파이팅!”

긍정은 좋은 결과를 담보한다

그의 마감 뉴스가 윤도현의 ‘사랑TWO’의 노래 가사처럼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편안한 분위기였다면, 아침 뉴스는 하루의 시작인 만큼 박진감 있는 분위기로 진행한다. 금요일 마감 뉴스를 마치고 바로 월요일 아침 뉴스에 투입돼야 했던 상황에서 그는 시차 적응 따위 문제시 삼지 않았다. 하니까 다 되더라며 오히려 넉살 좋은 웃음으로 답한 채.

이런 그의 태도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대학 4학년 당시 두 학기에 21학점을 꽉 채워 들으며 취업준비를 병행할 때도, IMF 외환위기 때 회사 월급은 안 나오는데 부인이 임신하고 어머니가 갑작스레 몸져누우신 상황에서도, 그의 긍정의 끈은 늘 단단했다. 힘들기로 악명 높은 수습기자 생활 때도, 그는 몸은 피곤했지만 즐거웠단다. 방송 생활 중 겪은 위기의 순간도 재치 있게 정면 돌파했다.

입사 후 편집부에 있으면서 TV에 나갈 일이 없어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겨울밤, 폭설이 쏟아져 서울 시내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죠. 토요일이라 마감 뉴스가 없어 속보를 내야 하는데 방송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임시방편으로 머리에 구두약을 바른 채 5분짜리 뉴스특보를 전했죠.

방송을 마친 뒤 머리를 감을 때 빨랫비누로 6번을 감는 고역을 견뎌야 했다. 그날을 회상하던 그는 서랍을 뒤지더니 아직도 간직하는 추억의 구두약과 솔을 보여줬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보람찬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엔 어린애처럼 신나게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에게 도대체 힘든 기억이란 건 있는 것일까? 단호히 고개를 젓던 그는 입을 열었다.

모든 힘든 일도 방송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힘들지 않아요. 저는 운이 좋은 거죠. 제가 즐기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하고 싶다면, 열정을 쏟아 연애하라

그의 대학 시절은 군부독재 타도가 시대정신이었던 때였다. 축제 기간이면 한다는 게임이 ‘화염병 만들기 대회’라니 말 다했다. 당시 그는 교내 영자신문사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학교로 ‘출근’했다. 큼지막한 사건들이 속속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수업 대신 취재를 택했고, 학점이 좋을 리 없었다. 한 번은 시위현장에서 잡혀서 하룻밤을 경찰서에서 보낸 적도 있었다. 결국, 그 길로 상경한 어머니의 눈물과 만류에 못 이겨 신문사를 관두게 됐다.

거친 신문사 생활을 그만두니까 굉장히 그리워지더라고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과 마음이 그쪽으로 가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치 뜨겁게 연애하던 애인과 헤어진 것 같은 심정에 시달렸어요. 다시 그 안에 들어가 세상의 소리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졸업 후 기자가 되기로 했는지도 모르죠.

그가 6∙29 선언이 나온 그 해를 학생 기자로서의 에너지로 물들였다면, 2학년 땐 연극과 연애하는 나날을 보냈다. 학과 내의 원어 연극반에서 방학을 포함해 한 학기 내내 독일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작품을 연습했다. 대학 시절엔 이성과 단 한 번도 연애를 못한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한 가지 일에 빠지면 모든 열정을 쏟는 사람이었다. 대학생 때 한 여학생으로부터 받았다는 연애편지는 그의 이러한 모습을 느끼게 했다.

제가 2학년 때, 한 1학년 여학생이 저에게 편지를 줬는데, 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어요. “오빠의 에고ego의 껍데기가 그렇게 두껍지 않았더라면, 난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최악의 순간에도 루틴(routine)을 잃지 마라

그는 ‘꿈의 적’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꿈의 적’은 나의 꿈을 과소평가하고 좌절시키는 사람이다. 그가 가족과 친구에게 기자의 꿈을 얘기할 때마다 다들 콧방귀를 끼곤 했다. 고등학생 시절 문학반 활동에 빠져 지내느라 성적이 13등급까지 떨어졌던 그에게, 아버지는 직업 훈련원으로 진학해 기능공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기자가 되기 위해 대학 진학을 마음먹고 ‘사당오락(四當五落)’의 정신으로 공부했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는 1등급이란 성적을 거머쥐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최악의 순간에도 루틴(routine)을 잃지 마라.”라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와도 꾸역꾸역 할 일을 하라고요. 오늘 100을 하기로 했는데 50밖에 못했어도 내일 더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머지 50이 차 있는 거지, 난 50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포기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거죠.

이후 대학 시절에 그가 지킨 루틴은 다름 아닌 독서였다. 삶의 지혜를 발견해줄 뿐 아니라 힘들 때마다 위안을 얻는 원천인 이유였다. 특히, 그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좋아한다. 살렘의 왕이 양치기 소년에게 했던,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하나 되어 너를 도울 것이다.’라는 말을 진리라 믿는다. 기자를 준비하며 언론사 공채에 응시한 족족 떨어졌지만, 그는 계속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다. 결국 공채가 몇 개 안 남은 상황에서 연합뉴스에 합격했다. 서류평가에서 학점의 최소 기준이었던 3.3에서 0.01이 높은 3.31이 그의 학점이었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를 최초 등정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누군가 물었어요. “어떻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죠?” 그의 대답은 정말 제 무릎을 탁 치게 했어요. “방법이 어디 있나. 그냥 두 발로 계속 걸어 올라가는 거지.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면, 어느 순간 하늘이 돕고 있다는 게 느껴질 걸세.” 이것 아니면 안 되겠다는 ‘열망’이 있다면 계속 도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운명이 내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걸 느낄 거에요.

그의 현재는 지난 98년 당시 외환위기와 함께 가장으로서의 시련을 겪으며 진로를 고민하던 찰나, SBS 경력직에 지원해 약 300 대 2의 경쟁률 속에서 뽑힌 결과물이다. 그는 모든 것에는 경쟁률이 있지만, 그 숫자에 속지 말라고 조언했다.

만약 십만 명 중의 한 명을 뽑는다고 해도 내가 될 만한 사람이면 되는 거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안 되는 거에요. 인생은 절대평가라고 생각해요. 경쟁률에 기죽거나 그것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굉장히 바보 같은 짓이에요.

1분 1초에도 명암이 엇갈리는 방송 생활을 오래 해서일까?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오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동 시간을 아끼다 보니 몸에 밴 탓이었다. 인터뷰 내내 한 가지 더 놀라웠던 것은 마치 순간을 스냅 촬영한 것 같은 세밀한 표현력과 기억력이었다. 마치 그의 과거 속 어딘가에 존재했던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생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운 좋게도’, ‘재수가 좋았던지.’라는 수식어구를 붙였다. 하지만 쉼 없이 공부하고 시간을 지배하며 사는 중년 남자의 아우라는 “노력은 운을 운반해온다.”라는 어느 영화의 대사가 명대사임을 실감케 했다.

1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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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럽젠집착남

    @황덕현기자, 제 글솜씨라기보다는 편상욱 앵커님의 말솜씨 덕이라는 표현이 맞겠네요.
    전 해주신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 뿐이랍니다.
  • 황선진

    진장훈 기자님, 글 잘 쓰네요!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히네요!
  • 럽젠집착남

    @항서팍, 젊을 땐 걱정은 잠시 뒤로 하고 쉼없이 달려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박상영 기자, 메이크업을 다 지우신 상태에서 제 허접한 사진 실력으로 저 정도 나왔으니 원판이 좋으신 거겠죠?ㅋㅋ
    @라라걸, 지못미...ㅋㅋㅋ 전 라라걸님이 계속해서 도전하면 운명이 손을 들어줄거라 믿어요.
    @Wjsgna, 바로 그게 포인트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
    @pilot, 소신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알프레도, 저도 인터뷰 내내 생각했습니다. 내가 정말 간절히 원하고 노력했던 일이 있었나. 하지만 있었더군요. 결과는 안 좋았지만ㅋㅋㅋ
  • 간절히 원하면 길이 열리는 법이네요.
    뭐 하나 되는 것이 없다고 불평하기 전에
    나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서 노력한 적이 있는지 자문해봐야겠습니다.
  • 네이트 기사를 보면 '할 일 없으면 기자나 해야지'와 같은 글이 베플이 되고있는데
    편상욱 앵커님과 같이 흔들리지 않고 자기 일에 소신을 갖는 사람들도 많아져서 좋은 글과 말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네요
  • Wjsgna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하나되어 너를 도울 것이다. 라는 문구 굉장히 와닿네요. 자신이 하고싶은 일에 열정을 쏟아 열심히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는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글 너무 좋네요
  • 럽젠 편집실

    @라라걸 운명이 무릎을 꿇는 날도 올 것 같습니다만-
  • 라라걸

    힘든 시기에 읽은 글이라 더 공감가고 힘이 됩니다.
    저도 열망을 가지고 도전하면 언젠가는 운명이 손을 들어주겠죠? ^^
  • 박상영

    학점 레기인 저에게 루틴을 잃지 말라는 조언 정말 절실했습니다 ㅋㅋ 저도 책만큼은 열심히 읽겠사와요. 그나저나 요즘 카메라기술이 별론가봐요. 사진으로 보는 게 훨씬 멋지시네요 편 앵커님ㅋㅋ 장훈님의 사진 실력인가??
  • 항서팍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생활했지만 다짐했던것들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며 후회하곤 했는데
    쉼없이 달리시는 열정이 부럽기도 하며 닮고싶네요 .
    좋은글 잘보고 가요.
  • 럽젠집착남

    "20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것이 제 첫 질문이자 마지막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기자의 부족한 인터뷰 진행에도 불구하고
    살아오신 이야기를 (사소한 숫자들까지 다 기억해내시면서) 세심하고 재미있게 전달해주신
    편상욱 앵커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럽젠집착남

    @황태진 기자, 당신의 감동이 한 문장에 전해지는군요. 울림이 길게 가길 바라요.
    @꿈꾸는팩미, 감사합니다! 팩미님도 저도 최악의 순간이 오더라도 루틴을 잃지 말고 중심을 잡으며 살아요!
  • 꿈꾸는팩미

    '루틴을 잃지마라'는 큰 울림을 마음에 담아갑니다.^^ 글을 읽으면서 긍정에 대한 힘을 다시 한번 느끼네요~!!!지금은 기자 지망생이지만 저도 언젠가 '현장'에 나가는 기자가 되어 편 앵커님의 겸손함을 닮고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황태진

    최근 본 어떠한 글, 책이나 영화보다 가장 공감하며 읽었어요... 좋네요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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