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은 나의 힘, 열정은 나의 꿈




홍대 앞 조용한 카페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궂은 날씨에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왔다. 단 몇 분의 짧은 시간이라도 준비할 여유를 주기 때문에 그는 항상 약속 시간보다 서두른다.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뭘 보여야 할지 걱정되네요.”
쑥스러운 웃음이 번진다. 꽤 수줍은 표정이다. 실제 나이보다도 어른스러워 보이는, 선이 굵은 얼굴과, 동시에 수줍은 아이의 표정을 가진 이 남자는 차를 시키고, 한참 후에야 어색하게 말을 시작한다. 질문에 대답하는 자세가 진지하다. 가벼운 질문이라도 가장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씹고, 또 씹는다.

1983년 10월 31일 생. 전갈자리. A형.
전갈자리의 진지함, A형의 내성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성격이 바로 유기선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조용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학창시절 내내, 나서는 것보다 조용히 할 일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그가 변하기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다.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를 다녀서 사실 남자애들끼리 어울리는 게 더 편했어요. 제 성격 중에 조금이라도 초(macho)스러운 면이 있다면 중ㆍ고등학교 생활 때문이겠죠. 하지만 대학에 오고 난 후,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면서 서로 다른 성별, 성격, 전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법을 배웠어요. 특히 우리 학교는 학교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잖아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대학교에서 맞게 된거죠.

1학년 초, 영화 동아리와 복싱부에 들어갔다. 영화 동아리에서는 단편영화 스텝과 배우를, 작년에는 전국 대학생 아마추어 복싱대회에서 3등을 했고, 2학년 말에는 학교 인터넷 사이트(‘연세인닷컴’)에서 ‘얼짱’으로 뽑히기도 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변한 게 아니냐는 말에 ‘원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서운 법’이라며 웃는다. 사실 그에게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면과 동시에 과감한 면이 내재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운동을 좋아해요. 음식을 편식하지 않는 것처럼 운동도 마찬가지에요. 검도, 농구, 축구, 수영 등. 대학 와서 도전하게 된 것이 복싱이구요. 복싱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굉장히 매력적인 운동이에요. 대부분 상대방과의 매치를 생각하지만 실제로 복싱은 자신과의 싸움이거든요. 자기 control 없이는 할 수 없는 운동이죠. 기회가 되면 프로 복서 자격도 따고 싶은 게 제 마음이지만, 실제로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일 년에 옷을 3~4벌도 채 사지 않을 만큼 그는 외모에 무심하다. 외적인 면에 신경 쓰는 시간에 더 많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작년에 연세인닷컴에서 ‘얼짱’으로 뽑힌 게 의외다.
“연세인닷컴이라는 학교 사이트에 가입하면서 기본적으로 올린 사진이 얼짱 후보로 올라갔어요. 처음엔 얼짱으로 뽑힌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는데, 나름의 장단이 있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스스로를 돌아보고 행동을 조심하게 되죠. 어디서나 자기관리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저에겐 플러스였어요.”

그럼에도 ‘얼짱’이나 ‘연대 조한선’이라는 호칭에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도 있다. “많이들 지적하고 있지만 최근의 얼짱 문화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잖아요. 루키즘(lookism)이나 일류주의나…. 그런 한 부분에 제가 동참한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도 들어요.”

유기선을 표현할 때, 꼭 빼놓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바로 영화, 만화, 방송이다. 오래 전부터 신문방송학과에 오고 싶었다는 그가 관심이 있는 분야는 단연 대중문화. 시간만 된다면 하루 종일 영화를 보고 싶다는 그는 일단 초보 영화 스텝으로서 테이프를 끊었다. 단편영화 스텝과 배우. 기회가 되면 자신만의 스타일의 영화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한다.

“영화, 만화, 방송. 모두 장르 나름의 특징과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만화를 대개 어린이들의 장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많이 읽다보면 어떤 대중 예술 장르보다도 창의적이고 예술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친구들이 우스개 소리로 제가 만화에 들인 돈이 2천 만 원은 넘을 거라고 해요. 그만큼 만화에 푹 빠져 살았어요.” 일본 만화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을 좋아한다고 하는 그는 우리나라 만화계가 일본만큼 체계적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영세하고 비효율적인 국내 만화 출판 시스템이 개혁되어야 새로운 문화 컨텐츠인 만화가 발전할 기반이 잡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학교에 강연오신 MBC 드라마 <다모> 이재규 PD의 말씀에서 느낀 점이 많았어요.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방송 PD의 길에 대해서도 조금 확실해졌구요. 단순히 멋진 직업이라는 동경에서 시작하면 안 되겠다는 열정도 배웠습니다.”
그의 현재 목표는 방송 PD. 많은 사람들이 방송 프로듀서를 꿈꾸고,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가 두려운 것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에요. 나 자신이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답을 해요.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이 질문에서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 내려졌을 때, 그것에 매진하려구요.”

인터뷰를 끝내고 카페를 나오니 어느새 눈은 그쳐있었다. 끝나고 어디로 가냐고 묻는 그를 보니 왠지 2시간 동안 꽤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어찌 보면 지금 유기선이란 남자는 성숙과 미성숙, 냉정과 열정의 문지방에 서 있는 듯하다. 22살의, 그래서 배울 것이 더 많은, 신중함과 과감함이 공존하는, 우리를 기대하게 만드는 남자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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