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방랑 슈바이처

병원장실은,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칭얼거리고 보채는 아이들 소리가 여과 없이 들리는 곳에 있었다. 문을 여니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으로 업무 중이던 김동수 원장이 반갑게 맞는다. “들어오는 인터뷰마다 모두 거절했는데 ‘학생’이라는 말에 선뜻 해야겠구나 생각이 들었다.”라며 인사를 건네는 김 원장. 청춘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가 빨리 듣고 싶었다.

죽음에서 꽃 핀 소망

20대, 때늦은 사춘기를 겪는다. 내 꿈은 뭐였지? 문득 되돌아볼 때, 순수했던 어린 시절과의 간극에 새삼 놀란다. 어느 새부터인가 꿈이란 게 사라져 버린 우리의 학창 시절. 좋은 대학을 목표로 꿈은 잠시 접어두고 문제집 속으로만 파고들었다. 뒤늦게 꿈이 뭐였을까 떠올려 보려 해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내 꿈은 뭐였을까. 김동수 원장 역시 꿈으로 고민하던 20대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 가셨어요. 갑자기 숨이 차다고 하셔서 입원했는데, 주말이 겹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진단도 못 받고 3일 만에 돌아가셨죠. 그렇게 공허하고 허무할 수가 없었어요. 7남매 중 막내로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했었는데 그 든든한 울타리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예요.”

처음부터 의사의 길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 미술 선생님께서 미술가로 키우겠다고 할 만큼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김 원장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꿈’을 꾸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그는 이 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등의 원초적인 것부터 생각하면서 나중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좀 더 현실적인 물음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직도 생각나요.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 배재고등학교 교훈이거든요. 그 교훈을 들으면서 늘 ‘나는 크고 높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남을 도와주고 섬기며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라고 생각했죠. 세상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서 내 존재만으로도 사회가 아름답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아픈 사람을 보며 느꼈던 슬픔,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특히 어린아이가 아픈 걸 보면 가슴이 저몄다. 어른은 어른이니까, 살다 보면 아플 수 있지만, 갓 태어난 아이가 아픈 모습, 그 아일 부둥켜안고 우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기로 하고, 의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돈을 버는 의사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내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돕고 섬기는 삶을 살고 싶었죠. 아픈 아이가 내 도움으로 회복되어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해, 사회 구성원으로 쓰임 받았을 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뿌듯한 마음이 들었어요. 단지 치료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어요.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믿었지.”

열혈 의대생 봉사에 미치다

그렇게 들어간 의대. 70년대 초반인 예과 2학년 시절부터 봉사를 시작했다. 의학적인 지식이 거의 없는 예과생이 할 수 있었던 건 접수를 받고 식사를 나르는 일뿐이었다.

“진료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봉사하는 게 기쁘고 즐거웠어요. 소망이 있었으니까. 보잘것없어 보여도 내가 이 세상을 조금은 아름답게 만들어나가고 있구나, 라고 느꼈으니까요.”

소망을 품고 봉사를 시작했다는 김동수 원장. ‘사람을 돕고 섬기는 의사가 되자.’는 꿈에서 출발했지만 세상은 책으로만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직접 마주친 환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본과 1학년이 되고 전북 김제 음성의 나환자 정착촌을 찾았어요. 너무 충격이었죠. 손발이 다 썩어 들어가, 악수하는데 마른 장작을 만지는 느낌이었어요. 딱딱하게 몸은 굳었지, 눈썹은 다 빠져 있지, 얼굴도 망가져 있지. 큰 충격이었죠. 그 순간 깨달았어요. 이런 사람을 위한 봉사를 해야겠다고요. 세상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봉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죠.”

또 한 번은 태국 고산족 진료를 가게 되었다. 그곳 추장에게는 부족원의 결혼 첫날밤에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동침하는 ‘초야권’이 있었는데, 문제는 추장이 에이즈 환자였던 것이다. 때문에 마을 인구의 80%가 에이즈 환자였다.

“처음엔 장갑을 끼고 진료했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봉사하러 왔다면서, 저들과 별개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봉사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적어도 그들과 동등한 위치 또는 더 낮은 위치로 내려가서 섬기고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는 장갑을 벗고 피고름을 일일이 다 만져가며 진료를 끝냈지요. ‘그래 이거다, 이것이 진정한 봉사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지금까지 아무 일 없는 걸 보면 에이즈에 걸리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해 가을은 매주 나환자 정착촌을 돌며 봉사를 했다. 학기 중이었기 때문에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 버스를 타고 나환자촌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진료하고 밤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반복됐다. 그렇게 레지던트 3년 차가 될 때까지 여름, 겨울 방학이면 어김없이 봉사를 다녔다. 그러다 1986년부터 1988년 말까지 미국에서 공부하게 됐다. 다음 해 1월, 귀국한 즉시 김 원장은 다시 국내 봉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 놀랐어요. 분명 산골짜기 시골이었는데 사람들이 의료혜택도 많이 받고, 무엇보다 아이들 옷이 남루하지가 않았어요. 2년 사이 나라의 복지가 많이 발전해서 더이상 옛날의 못 사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죠. 그때부터 세계의 어려운 이웃에게 눈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의 계획은 마냥 순탄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을 갔을 때였다.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가 생소했던 때. 전쟁 중이라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선 현지 사람의 보호가 필요했다. 군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고통받는 마을 사람과 우두머리라고 불리는 사람 등 많은 이들을 치료했다. 콩팥이 안 좋았던 우두머리와는 어깨동무하고 사진까지 찍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단체가 알 카에다였던 것이다. 또 이라크 전쟁 때는 눈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곳까지 봉사하러 들어가기도 했다. 여러 차례 위험한 순간이 반복됐다. 겁이 나진 않았을까?

“겁나죠.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해요. 나도 모르는 사이 위험의 한복판에 있었으니까요. 목숨 내놓고 다니는 거죠. 하지만 인천공항에 내려 서울에 발이 닿는 순간엔 아픈 이들을 도울 수 있어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특히 지진이나 해일 피해를 입은 지역은 비행기에 올라서도 걱정이 돼요. 가족을 내버리고 가는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요. 한 번은 지진 지역에 갈 땐 데, 딸이 편지를 써서 주더라고요. ‘여진도 있다던데 이번에 가시면 살아 돌아오셔서 다시 얼굴 볼 수 있을까요?’ 라고. 비행기 안에서 펑펑 울었죠. 내가 왜 이러고 다녀야 하나, 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저 도와주고 싶어요. 섬기고 싶고.”

상황이 어떻든, 어떤 분쟁이 있든. 그저 본인의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해 소신을 갖고 봉사를 한다는 김동수 원장. 아무나 못 할 일에 언제나 발 벗고 나서는 그는, ‘도움이 되고 있다니 행복하다.’라는 말만 전한다. 조건 없이 나누는 삶, 섬기는 삶이 ‘진정한 봉사’라며 말이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주치의입니다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 중에서도 여전히 그의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은 터키 지진 현장에서의 경험이다. 진료를 보던 중 한 남자가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데리고 찾아왔다. 남자는 아이가 계속 열이 나고 5일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했다. 눈과 얼굴이 노란 걸 보니 간염이었다. 지진으로 집도, 엄마도, 형제도 잃고 생명마저 위태로운 아이를 보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김 원장은 아이를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린 뒤 링거를 놔 주고 잠시 다른 환자를 살피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아이를 돌아보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다.

“눈에 띄게 황달이 옅어졌더라고요. 그러더니 두 시간 후에는 배가 고프다고 먹을 걸 찾아요. 마침 빵 배급차가 왔길래 빵을 쥐여 줬더니 어적어적 씹어 먹었어요. 하루 만에 좋아진 거죠. 아이의 아버지는 통역관을 통해 ‘당신은 우리 딸의 영원한 주치의입니다. 우리 딸의 절을 받아주세요.’라고 하더니 딸에게 춤을 추라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터키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법이었죠. 그저 감사했어요. 내가 좋아서 내 꿈 이루려고 하는 일인데 그런 대접까지 받고.”

한 번은 서산의 한 노부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뇌졸중으로 사지가 마비되어 누워 계신 할아버지와, 연세가 지긋해 병간호가 힘든 할머니가 생활하는 집이었다. 방 안은 먼지가 수북이 쌓여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다. 김동수 원장은 할아버지를 직접 씻겨 드리고 머리카락을 잘라드린 후 면도까지 해 드렸다. 할아버지는 연신 ‘아이고, 좋다!’를 연발하셨고, 그 모습을 바라본 할머니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으셨다. 시간이 되어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김 원장에게 삶은 밤 한 바구니를 건네셨다. 젊은이들이 노인들 사는 데 와 줘서 고마운데 줄 건 없다면서, 뒷산에서 주운 밤을 찻간에서 먹으라고 주신 것이다.

“그걸 어떻게 받을 수 있겠어요? 한사코 거절했지만 기어이 쥐여 보내시더라고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밤 하나를 까먹는데 저도 모르게 펑펑 눈물을 쏟아졌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직접 찾아 나서고, 의술이 아닌 마음을 나누고. 그래서 그를 만난 사람들 역시 언제나 마음으로 보답한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주치의!’라는 메시지를 담아서 말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

여전히 꿈꾸는 중이라는 김동수 원장. 그래서일까. 환갑의 나이에도 이십 대의 젊음과 열정이 느껴진다. 방문한 곳을 표시한 세계지도의 작은 점들이 다닥다닥 늘어갈 때마다 은근한 감동을 느낀다고.

“소망 하나만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는데, 그동안 세계를 주름 잡는 봉사를 했구나 하면서 감개가 무량해지기까지 해요. 젊었을 때 품었던 꿈을 환갑이 된 지금도 이루고 있으니까요. 나중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도 기쁘게 눈을 감겠구나 생각하죠. 꿈이란 나이 육십이 되어 뒤돌아 볼 때, 내 발자취를 보며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현실에 쫓겨 꿈꾸기 힘들다는 말은 어쩌면 핑계일지 모르겠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요즘의 20대는 번듯한 학교, 번듯한 직장, 만족스러운 연봉을 위해 진짜 원하는 꿈을 미루거나 포기한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 꿈을 찾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 생활기록부를 보면 장래희망이 죄다 의사예요. 그래서 말했죠. 꿈이라는 것은 의사냐 법관이냐 대통령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어떤 존재로,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가 비전이자 꿈이라고요. 부모로부터 받은 재능, 소질은 내가 타고난 것이잖아요? 그것은 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최종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죠. 만일 의사가 일생의 소망이라면, 의사가 되는 순간 꿈은 사라지게 돼요. 그다음에는? 60년 넘게 남은 인생에서 아무 꿈도 없이 살 건가요? 목표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다 보면 인간은 소비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꿈이 없는, 혹은 전력으로 달려갈 자세는 되어 있는데 꿈을 찾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김동수 원장의 답은 “나에게 있는 재능을 빨리 발견하는 작업을 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지’, ‘가장 즐겁고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라는 것이 그의 조언.

“꿈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에서 소망을 품고, 자신의 모든 삶을 집중시켜 투자해나가는 과정. 그것이 꿈을 찾고 이루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이 사라졌다. 아니, 잠시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먼저 나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내가 과연 무엇에 가슴이 뛰었었는지 돌이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가출한 꿈을 불러들이자. 돌아온 탕자와 같이 당신의 뜨거운 품속에 찬란한 꿈이 걸어 들어오도록.


김동수
∙ 연세대학교 의학과 학사
∙ 동 대학원 석∙박사
∙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원장
∙ 베트남, 태국, 아이티,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말레이시아, 세네갈, 중국, 북한 등 재난∙분쟁 지역 의료봉사
∙ 적십자 박애자 금장, 세계 참의사상 수상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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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진

    읽는 내내 뭉클했어요.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라는 생각만 계속 했네요. 그래서 사랑이 넘치는 글이 나왔나봅니다.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 받는 것보다 주기 위해 사시는 모습을 보니 반성도 하게 되고, 준 만큼 받으신 마음들이 부럽기도 하네요. 저도 사랑을 내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보다 으네기자를 더 아껴줄게요(?) 뜬금 마무리..
    p.s. 첫번째 선생님 사진 너무 멋있으신데 설정인거죠? :)
  • 의사라는 커리어만으로도 상위 1%의 풍요로운 삶을 평생 누릴수있었을텐데...
    환자를 '돈'으로만 보는 양심불량 의사들이 김동수 원장님을 반만큼이라도 닮는다면 세상은 참 아름다워질꺼에욤~
    우선 저부터 더 늦기전에 가출해버린 꿈을 다시 찾아볼래욤~ㅋ
  • 민성근

    와우. 잘봤습니다!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곳을 위한 의사가 되신모습. 멋있네용
    역시 성공은 무언가 깨달음에서 시작되는것같네요ㅋㅋ
    세계를 돌며 여러사람을 치료해준 경험담역시 감명깊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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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그렇게 많은 환자들을 만났는데 단 한 사람도 잘못된 적 없대요. 흠... 이거슨 신의가 아닌가ㅋㅋㅋ

  • 이미선

    반가운 김동수 원장님 기사! 여전히 꿈을 꾸고 계셔서 그런지 아주 동안이시고 미중년이시네요:D 성적, 취업에 치여사는 우리는 그런것들을 꿈이라고 착각하고 있던게 아닌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은혜기자님 글은 항상 예뻐요! 앞으로도 좋은 기사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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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미선기자 부럽다 김동수 원장님과 동문?!ㅋㅋㅋ

  •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 멋진 것 같아요....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타인을 도우며 늘 배려하는 삶은 본받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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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봉사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나를 위해 시작한 일이 남을 위한 일이 되었으니까요. 이타적 유전자의 산 증인bbb

  • 유이정

    오랜만에 나온 리더의 20대 기사! 반가운 은혜기자님의 기사! 그리고 진한 깨달음을 주는 기사네여*0*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김동수원장님처럼 소신을 갖고, 확신을 갖고, 남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여! 물론 그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지만, 저 역시도 세상에 촛불하나를 켤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태국 고산족 사례를 비롯해서 김동수 원장님께서 하신 일들이 절 반성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감사해여 은혜기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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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혜

    제 꿈이기도 해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 정말 어렵겠죠? 하지만 김동수 원장님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더 노력하기로 했어요. 무엇보다 참 신기하더라구요. 여태까지 원장님이 치료해서 잘못된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대요b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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