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현장의 숨은 보석, 분장사

영화 <아저씨>의 장면을 기억하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잘생긴 원빈의 얼굴이 아닌 바로 그의 얼굴에 묻은 피다. 얼핏 보면 그냥 묻은 것 같아도 이 ‘튀어서 흐르는’ 피는 조금은 조작적인 연결로, 극 중 등장인물의 상황과 심리에 따라 신중하게 결정되는 사안이다. 이 장면의 경우, 원빈의 얼굴에 피가 튄 후 지저분해 보이는 잔방울은 지우고 얼굴이 강해 보이는 핏줄기는 강조해서 피가 튄 얼굴의 이미지를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음 컷부터 계속 연결된다.

사진_이미선/제19기 학생 기자(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사진제공_영화분장사 황현규

영화 '아저씨'의 한 장면이다. 검은 수트를 입은 주인공 원빈이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총을 겨누고 있다. 얼굴에 핏자국이 묻어 있어 혈투가 진행중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얼굴에 묻은 피 하나, 눈가 주름 하나만으로도 ‘극의 흐름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느냐’ 혹은 ‘배우의 상태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느냐’까지 결정된다. 그 때문에 이런 일들은 매우 섬세하고 꼼꼼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심한 작업을 통해 영화를 한 층 빛내주는 것이 바로 분장사의 몫이다.

’치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수많은 사람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들에게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작품을 위해 조용히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있어야 하나의 작품이 비로소 탄생할 수 있기에 그들은 꼭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분장사는 등장인물의 상황, 감정, 이미지, 특징을 잘 드러내도록 아주 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 써야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영화 ‘박하사탕’과 ‘마더’의 포스터. 왼쪽의 ‘박하사탕’ 포스터에는 기찻길 위에서 절규하는 설경구의 모습이 나타나 있고, 오른쪽의 ‘마더’ 포스터에는 순진무구하고 조금은 덜 잘생긴 시골총각으로 완벽 변신한 원빈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영화에서 분장의 종류는 헤어를 포함해 크게 특수분장, 성격분장, 뷰티 메이크업,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특수분장은 극 중 상황에 맞게 무언가를 제작하고 작업해야 하는 ‘보철’의 개념이다. 더미 제작 외에 영화 <미녀는 괴로워> 속 김아중의 뚱뚱한 모습이나 <은교>의 박해일, <이끼>의 정재영이 했던 노역 분장이 이에 해당하며, 일반 분장보다는 부피감을 더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일반분장은 특수분장보다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 인물을 창조하고 현장에서 계속 자리를 지키며 배우들의 모든 외형적인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 작업이다. 영화 <박하사탕> 중 철로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던 설경구의 눈가 아래, 그 미세한 실핏줄도 영화분장사의 손을 거친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뷰티 메이크업은 배우를 최대한 예쁘게 만들어주는 하는 화장이라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분장은 가끔 이를 거꾸로도 만들 수 있다는 것. 예컨대 영화 <마더>의 원빈을 표현하기 위해선 ‘뷰티’가 아닌 ‘분장’이 필요하다. ‘뷰티’로는 할 수 없는 모습, 인물의 예쁘지 않은 모습까지도 표현해내는 게 바로 ‘분장’인 것이다.

디테일이 살아있네! 분장사로 가는 길

분장사가 배우의 손에 굳은살을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이다. 분장사가 한 손으로는 배우의 손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얇은 붓을 쥔 채 배우의 손에 그림을 그리듯 굳은살 모양을 구현해내고 있다. 손의 주인공인 배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영화분장사가 되기 위한 자격 요건은 무엇일까? 국내에도 분장사 자격증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꼭 필수 요소는 아니다. 자격증이 없어도 얼마든지 분장사가 될 수 있다. 보통 분장 학원을 거친 사람들이 현업으로 많이 진출하는 편이다. 학원에서는 분장교육 외적으로 일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분장학과가 있는 대학들도 있기는 하지만, 자격증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기 위해 분장학을 반드시 전공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일에 대한 애정과 센스,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연습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손재주까지 있다면 금상첨화.

분장사는 어디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프리랜서’적인 성격이 강하다. 어떤 영화사의 작품을 계속 같이 하는 게 아니라, 매 작품마다 제의를 받는 형식이다. 연락이 오는 통로는 매우 다양하다. 대부분은 감독이나 영화사가 자신들의 영화 콘셉트에 맞는 분장사를 찾는다고. 그 외에 미술팀이나 배우의 추천으로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다.

MINI INTERVIEW
내면을 분장하는 분장사, 그 아름다운 이름! 황현규 영화 분장사를 만나다

올해로 18년째, 지금까지 참여한 영화만 해도 총 30여 개. 영화 <마더>, <아저씨>, <오아시스>, <완득이>, <살인의 추억>,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시>, <박하사탕>, <후궁 : 제왕의 첩> 등 제목만 들어도 탄성이 나오는 이 굵직굵직한 한국 영화 모두가 그녀의 손을 거쳐갔다. ‘영화 분장계의 대모’라고도 할 수 있는 황현규 분장사를 만나 분장사로서의 삶과 그 세계를 더 알아보았다.
황현규 분장사가 영화 ‘아저씨’의 주인공 원빈의 손에 박힌 굳은살 분장을 해 주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왼쪽에는 황현규 분장사가 원빈의 손을 잡은 채 굳은살 분장을 해 주고 있으며, 그녀의 오른쪽으로 갖가지 도구가 놓인 책상이 위치해 있다.

럽젠Q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와 독일 뮌헨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시고 32세, 조금은 늦은 나이에 독일 최고 분장 명문이라 불리는 메피스토 분장학교에 입학하셨어요. 신문방송학 전공에서 갑자기 전공을 바꿔 분장사의 길을 가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독일에 가서 개인적인 변화가 생겼던 것 같아요. 우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삶과 독립에 대한 개념이 생겼어요. 또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공부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독일에 와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이런 환경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제 인생에 대해 솔직하게 고민을 하게 됐어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또 ‘잘하는’ 게 뭔지에 대한 생각을 좀 많이 했죠. 워낙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했고 사람을 좋아했거든요. 손으로 하는 것 중에 사람과 관련된 일을 찾다 분장을 택하게 됐죠.

본인의 작업실에서 인터뷰 중인 황현규 분장사의 모습이다. 짧은 커트머리가 활동적인 인상을 더해주고 있다.
럽젠Q : 12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시다가 전혀 다른 길을 택했을 때 주위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겠어요.

주위에서 너무 반대들을 하니까 ‘도대체 얼마나 열악하길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가 잘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은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분장사를 꿈꿨을 때 머릿속에 미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져 이 직업에 대한 확신도 들었고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또 저 자신에게 당당하기 위해 분장학교 처음 입학할 때 ‘수석 졸업’을 목표로 세우기도 했었죠. (결국 그녀는 그 목표를 이뤘다.) 늦게 시작해도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럽젠Q : 분장을 잘하려면 배우와 그 배우가 맡은 역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어떤 방식으로 분장 콘셉트를 정하나요?

배우가 정해지면 우선 그 배우 사진을 다 찾아보죠. 기존에 했던 영화 속 이미지가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이 작품엔 이랬고 저 작품에선 이랬고 드라마에선 어땠는지 다 챙겨봐요. 사진을 보다 보면 그 배우의 얼굴 특징들을 알게 되고, 그 다음 제가 생각하는 이미지 그림들을 모아요. 예를 들어 긴 생머리를 원한다면 원하는 스타일의 긴 생머리 자료들을 모아, 그 배우의 현재 헤어 스타일과 긴 생머리 사진을 다 취합하는 거예요. 그렇게 제가 생각하는 인물 이미지와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조합하는 작업을 통해 접점을 찾아 나가죠.

럽젠Q : 사진이나 기존 자료로도 부족하면 어떻게 하세요?

직접 등장인물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그 장소에 찾아가죠. <살인의 추억>에서는 극 중 백광호가 화상이 있는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화상자료도 너무 부족했고 실제 화상 환자들도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화상치료로 유명한 병원을 찾아 ‘한강성심병원’에 갔어요. 며칠 드나들었더니 결국엔 의사 선생님께 화상 자료를 얻을 수 있었죠.

황현규 분장팀의 작업실 사진이다. 철제 선반 위에 여러 종류의 분장 도구가 앉혀져 있다. 바구니, 상자 등으로 담긴 수많은 도구들이 자리해 있으며, 오른쪽 맨 위에는 사람의 머리 모양을 딴 마네킹이 가득 늘어져 있다.
럽젠Q : 분장 재료들이 궁금해요. 특히 피 흘리는 장면은 무엇으로 연출하나요?

특수분장, 뷰티, 헤어 등에 필요한 모든 물품은 기본적으로 다 사용한다고 보시면 돼요. 그 외에도 주변 소품들이 다 도구로 쓰여요. 예를 들어 한겨울 액션신에 보온밥통은 물수건을 따뜻하게 보관할 수 있어 유용하죠. 입에 넣거나 몸에 닿는 피는 재채기나 알레르기 등을 유발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라 인체에 무해하다고 검증된 제품만 쓰죠. 바닥에 뿌리거나 신체에 직접 닿지 않는 피는 보통 식용색소와 물엿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요. 옛날엔 닭피나 돼지피처럼 동물 피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거죠. 잘 상하고 병균들도 많으니까요.

그녀의 작업실에서 인터뷰 중인 황현규 분장사. 책상에 앉아 두 손을 맞잡은 채 환하게 웃고 있다.
럽젠Q : 이 일을 하면서 언제 가장 뿌듯하세요?

우선 분장하고 ‘이거 괜찮다’는 느낌이 딱 올 때. 그때가 제일 좋아요. 또 사람들이 저를 다시 만나게 된 걸 반가워하고 즐거워할 때, 그 진심이 전해질 때 뿌듯하죠. 단역을 맡았던 친구가 연극에 출연한다고 절 초대한다든지, 주인공이 됐다는 기쁜 소식을 알린다든지, 그럴 때마다 정말 기뻐요.

럽젠Q : 1996년 영화 <러브스토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활발히 현업에서 활동하고 계세요. 본인의 지치지 않는 ‘롱런’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솔직히 말하면 가끔 저도 의아해요. 현장에선 항상 제가 최고령이에요. 영화인들의 수명이 짧은 편인지라 현장에서 50대는 제가 거의 유일하고 40대 보기도 힘들어요. 오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이 일을 좋아하고 항상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강의 외에 현장을 비운 적은 없어요. 사실 좀 현장을 꼬박꼬박 지키는 게 비합리적일 때도 있는데, 그러다 보면 느슨해질 거 같기도 해서요. 미리 가서 준비하고 있고, 현장을 지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얘기를 의외로 많이 들어요.

황현규 분장사의 저서 ‘황현규의 분장 이야기’ 책 표지. 책 가운데로는 ‘영화판의 작은 거인, 황현규의 분장 이야기’라는 제목과 함께 ‘상상하라, 그것은 현실이 된다’라는 카피가 씌어져 있다. 또한 제목을 중심으로 위아래에는 그녀가 작업한 여러 배우의 분장 모습이 사진으로 나열되어 있다.
럽젠Q : 분장사를 꿈꾸는 대학생들에게 조언 한마디!

모든 일에는 투자와 노력이 필요해요. 헌데 분장사를 꿈꾸는 많은 친구들이 이 직업에 대한 열의는 보이면서도, 순간의 이익에 돌아서거나 시간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더라고요. 단기간에 너무 승부를 보려고 하지 말고, 5~10년 정도 길게 보세요. 그리고 정말 이 일이 좋아서 가슴이 뛰는지, 어떤 꿈이 그려지는지가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또 대학생 여러분들 모두에게는 예전엔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요. 지금은 ‘잘하는 걸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잘하는 걸 하다 보면 지속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일에 대한 즐거움도 생길 거예요.

작업중인 황현규 분장사의 모습. 두 컷의 사진 중 왼쪽 사진은 배우의 손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작업중이고, 오른쪽 사진은 즐거운 이야기라도 나누는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내면을 분장한다’는 말을 참 좋아한다는 황현규 분장사. 자신이 하는 일, 그리고 함께 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있었기에 그 사람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보듬어 줄 수 있었던 게 아닐는지. 언제나, 묵묵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작품을 빛나게 해주는 보석 같은 그녀를 보며 ‘분장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롤모델이 돼주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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