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안에 세상을 담다, 화폐 디자이너

당신 지갑 속에 보관된 형형색색의 화폐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게 단순한 면이 아닌 미세한 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0.03mm(30미크론)의 아주 가는 선으로 아름다운 화폐를 만들어내는 돈 예술가, 한국조폐공사의 화폐 디자이너이다.

말 그대로 화폐를 디자인하는 일


화폐가 시중에 유통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위조지폐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화폐는 디자인이나 제작 패턴을 똑같이 유지할 수 없다. 모습이 바뀔 때마다 화폐의 위조방지 기술과 디자인 역시 발전하게 되는데, 이런 특수한 작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바로 화폐 디자이너다.

화폐 디자이너는 국내에 7명밖에 없는 희귀직업 중 하나이다. 화폐 디자이너는 말 그대로 화폐를 디자인하는 것이 주 임무이다. 평상시에는 화폐 설계에 관한 기술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는데, 그 외에도 수표와 같은 유가증권, 여권〮공무원증〮청소년증 등의 신분증, 상품권, 기념주화, 메달 등도 함께 디자인하고 있다.

입사 전에도 일반 상업 인쇄는 경험이 있었어요. 그런데 입사 후 처음 접한 화폐 디자인 분야는 그것과 많이 달랐죠. 그래서 전체 과정을 이해하고 작업하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어요. 하지만 점차 적응하고 직접 디자인에 관여하면서 만들어진 화폐, 여러 종류의 상품권, 기념주화 등 자식 같은 제품들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죠.

2000년 한국조폐공사 디자인 팀에 입사하여 올해로 13년째를 맞는 홍소영 연구원. 총 15명의 디자인 연구센터 직원 중 화폐의 디자인을 담당하는 디자인 파트는 7명뿐이라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화기애애하게 일하고 있다.

화폐 디자인, 주의력과 끈기를 요하는 과정

사실 돈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디자인 과정 자체가 복잡하고, 화폐 디자이너가 디자인에 필요한 관련 자료들을 직접 찾으면서 모양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은행권 주제가 될만한 인물이나 유물에 대한 가치나 의의, 이미지 등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화폐 디자인은 발권기관인 한국은행과 제조기관인 조폐공사가 함께 제작한다. 한국은행에서 새로운 화폐 발행 계획을 세우면 먼저 한국조폐공사로 디자인을 의뢰하게 된다. 이후 공사에서는 은행권 주ㆍ부제 및 위조방지요소, 기기감응요소 등을 고려한 기초 설계부터 최종 인쇄물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투입돼 여러 번의 회의를 통해 이견을 조율하고 이를 수렴해 완벽한 은행권이 나올 때까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간다. 특히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초상이 결정되면 인물을 뒷받침할만한 디자인 소재들을 정해야 하는데, 상당한 지식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역시 화폐 디자이너들의 몫.

화폐의 ‘채문’은 1mm의 두께 안에 30μm의 가는 선 3개를 겹치거나 꼬아서 만듭니다. 디자이너가 원하는 문양이 나올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결과물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위조방지 효과가 높은 채문을 만들기 위해서 프로그램에 명령을 주고, 그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하루 이상을 기다릴 때도 있어요. 각각의 채문을 부분적으로 만든 후 은행권 특성에 적합하도록 배치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원도(최초의 도면)가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죠. 화폐 디자인 많은 주의력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한국은행에서 확정한 디자인이 정부 승인 및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을 거치면 디자인을 최대한 잘 표현할 수 있는 ‘원도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 작업은 특수 보안인쇄용 전문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이뤄지는 과정이다.
화폐 디자이너는 보안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채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한마디로 아이디어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 생활의 모든 것이 아이템이 될 수 있는데, 때론 주변 사물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고. 그래서인지 홍소영 연구원의 예리한 눈은 인터뷰 중에도 입고 있는 니트를 유심히 바라봤다.

전통문양, 짜임을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니트류, 복잡해 보이는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도 등 일상에서 발견하는 모든 문양이 화폐 디자인에 적용하는 ‘채문’의 소스가 될 수 있어요. 일반 사람이 무심코 지나는 것들이 화폐 디자이너에게는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관찰력’은 화폐 디자이너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요.

오랜 시간 노력으로 나타나는 결실


화폐 하나를 디자인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년.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만큼 제작과 관련된 일화도 많을 것이다.

한창 화폐를 디자인할 때는 팀원들과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고생했어요. 실제 은행권이 시중에 통용됐을 때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하니 인쇄할 때의 고려 사항도 워낙 많았죠. 원도 수정하고 다시 인쇄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는 것은 당연했어요.

디자인은 한국조폐공사에서 하지만 인쇄는 경산에 있는 화폐 본부에서 진행한다. 그래서 인쇄 원도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른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정해진 계획을 맞추기 위해서 결과물을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화폐 본부에서 인쇄 결과물을 확인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다음날이 되는 것은 부지기수.

힘들기도 했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까지 동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좋은 기억도 있어요.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힘들게 노력해서 디자인한 화폐가 세상에 나왔을 때지요. 화폐가 회사 밖에서 제대로 유통되기 전까진 저희는 그냥 제품이라고 생각해야 하거든요. 실제로 은행권 작업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거의 매일 같이 모니터나 회사 인쇄기계에서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돈’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기도 하고요. 언젠가 새 화폐가 발행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마트에 갔었는데 어느 분이 그 ‘제품’을 물건값으로 내시는 걸 보고 아주 잠깐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조금 지나서 ‘그 제품이 밖에 나오면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돈이니까 당연한 광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뿌듯했어요. 은행권이 나오기까지 고생했던 일이 정말 보람되게 느껴지더라고요.

MINI INTERVIEW
한국조폐공사 기술연구원 디자인 조각연구실 홍소영 선임연구원 탐구


럽젠Q : 화폐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택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디자인 실무 부분을 가르쳤던 강사님께서 조폐공사 디자인 팀 직원이셨어요. 어느 날 우연히 학과 사무실에 일이 있어서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조폐공사 사보를 보게 되었죠. 그때 화폐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고 ‘내가 만든 화폐를 전 국민이 쓰게 된다.’는 매력에 이끌려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럽젠Q :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처음에 화폐 디자인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고 하셨는데요.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화폐 디자인은 디자인 초기 작업부터 위조방지요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에요. 디자인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도 필요하지만, 일반 디자인과는 다른 화폐 디자인만의 설계, 인쇄 과정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죠.
은행권이나 상품권과 같이 위조방지요소 기능이 추가된 인쇄를 일반 상업 인쇄와 구분하여 보안인쇄라고 부릅니다. 보안인쇄 중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은행권 디자인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실제 경험을 쌓지 않으면 참여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처음 상품권 등을 디자인하다가 화폐 디자인에 참여했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로웠어요. 또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같은 기본적인 그래픽 프로그램 이외에도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은행권 원도 제작용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정말 많은 공부를 했지요.

럽젠Q : 화폐 디자이너라는 직업만의 장ㆍ단점이 있다면요?

화폐라는 게 만들고 싶다고 아무 때나,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가 직접 디자인한 화폐를 전 국민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화폐 디자이너가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디자인에 비해 아주 오랫동안 보관될 수도 있고요.
일을 하다 보니 직업병도 생기고 조금 예민해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손바닥만 한 화폐를 분석하거나 미세한 선을 조절하는 일 등을 자주 하다 보니 디자인이 복잡한 인쇄물을 볼 때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서 보게 되더라고요. 집에 걸린 액자가 조금 삐뚤어진 것을 보고 못 참은 적도 있었죠. 완벽을 추구하는 일을 하다 보니 그런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단점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럽젠Q :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목표라기보다는 화폐디자이너로서 개인적인 바람이 있어요. 우리나라 은행권은 디자인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조금 경직된 것 같아요. 수차례에 걸쳐 디자인이 변화했지만 큰 틀은 똑같거든요. 그런데 외국의 경우에는 재미있는 화폐가 많아요. 그래서 한 번쯤은 저만의 획기적인 화폐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 경험이 언젠가 다시 바뀌게 될 실제 화폐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고요.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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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이정

    매일 주고받는 돈, 화폐! 화폐가 디자인되기까지 2년이 걸린다는 사실 진짜 몰랏네용 *_* 앞으로 돈을 쓸 때 화폐 디자이너 분들의 노고를 생각하게 될거같다능!?ㅎ.ㅎ 옛날 천원권을 보니 왠지 어색해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화폐도 어색해질 날이 오겠죠?ㅎㅎ 10만원권이 나오면 어떤 위인이 들어가려나~ 벌써부터 기대되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을 만나고 온 경현기자님 대단해요 :) 크킄
  • 유다솜

    내가 디자인한 화폐를 '전국민'이 쓰게 된다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네요O____O
  • 화폐디자인 하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지 알게되었네요..
    굉장히 생소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내용으로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 고은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은 남길 수 있어도 돈은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분들은 세상에 돈을 남기고 가시겠네요. 어찌 보면 모든 사람들의 로망. 얼마나 뿌듯할까요? 모든 사람들이 내 손으로 만든 돈을 쓰고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저였다면 너무 자랑스러워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질 거 같아요. 이거 제가 만든 거에요! 이 돈 제가 디자인했다구요!!
  • 이유진

    와 과정이 정말 복잡하네요. 한 장의 지폐가 새롭게 디자인되기까지!
    개인적으로 1983년형 지폐의 디자인이 아직도 그리운데...언제 디자인이 새롭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옛날의 디자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바람이 있어요
    하지만 화폐디자이너님들이 더 예쁘고 세련된 디자인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시겠죠??? 준비과정은 힘들지만 다 끝나고 지폐가 나오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
    특이한 직업이라 재밌게 읽었어용 뿌잉
  • 민성근

    이렇게나 장황한 이야기가 저의 손과 지갑 속에 항상 담겨있었는지 몰랐어요.
    앞으로는 돈을 더욱 깨끗이 써야겠네요..
    그리고, 인터뷰처럼 왠만한 섬세한 소질과 끈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아무나 이 일을 하긴 힘들겠네요.
    아하!
    김경현 기자의 성격과는 딱 일수도 있겠네요. 추천합니다! ㅋㅋㅋ꾸욱
    ㅋㅋ 기사 잘봤어용!ㅋㅋ~
    댓글 달기

    김경현

    제 성격과 딱맞는다.... 뭐 부정할 수는 없는거 같네요ㅋㅋㅋ 하지만 화폐디자이너 분들 만큼의 끈기를 따라가긴 힘들거 같네요ㅜㅜ

  • 정민하

    돈을 만든다고만 생각했지 '디자인'한다는 생각은 많이 해보지 못했는데!
    예쁘기만 한 디자인이 아니라 위조방지같은 기능까지 생각해야된다니 디자이너 중에서도 참 독특한 직업인거 같아요~
    댓글 달기

    김경현

    디자인을 잘한다는 것이 곧 위조방지 기능이 완벽하고 국민들에게 거부감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독특하면서도 힘든 직업중에 하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 이미선

    화폐 디자인이 바뀔 때 빼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걸까 궁금했었는데! 평상시에도 위조지폐 방지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힘쓴다니~ 정말 보통의 디자이너와는 다른 특별한 디자이너 답네요ㅎㅎ
    돈이 중요한 만큼 그 디자인 과정도 정말 까다롭고 복잡하군요@.@ 하지만 과정이 어려운 만큼 그 보람도 배가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화폐디자이너 분들께 앞으로도 우리 돈을 잘 부탁드리며... 경현 기자님 수고하셨어요~ㅎㅎ
    댓글 달기

    김경현

    감사합니다! 화폐디자이너 분들을 생각해서 화폐를 소중이 다뤄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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