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초와 싸움하는 속기사

0.001초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직업이 있다. 흘러가는 시간과 숨 가뿐 경주하듯 여러 사람이 뱉은 말을 신속, 정확하게 기록하는 속기사速記士. 시간의 뒤안길에 사라질 순간을 잡아챈, 촌각을 다투는 기록자의 놀라운 세계.

전방위로 확대된 ‘속기사’의 세계

속기사速記士는 단어 뜻 그대로 ‘빠르게 기록하는 사람’이다. ‘문자’와 ‘말’이 생겨난 이후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적 순간에는 숙명적으로 ‘속기사’가 존재했을 터. 찰나의 ‘소리(말)’를 전부 ‘문자’로 변환시켜 기록하는 그들의 모습은 조선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적 기록물로 짐작해보건대, 기록이 필요한 현장엔 늘 그들이 있었다.
현재 속기사는 청와대, 국회, 의회, 법원, 검찰청, 자막 방송국, 속기 사무소, 대학교 등 정부부처 및 관공서, 학교, 기업 등 많은 곳에 분포되어 있다. 모든 공공기관, 기업 회의의 투명화로 회의록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고 있고, 장애인차별 금지법 때문에 각종 방송사 프로그램의 자막방송, 청각장애 학생 자막 교육 지원 등 사회적으로 속기사의 활동 범위는 전방위로 확대되는 중이다.

속전속결 기록의 팔 할은 진득한 인내심

속기의 방법은 크게 수필 속기와 기계 속기로 나뉜다. 전자는 손으로 직접 쓰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한 음절을 한 획으로 신속하게 기록하고자 만들어졌다. 후자는 일반 컴퓨터 키보드와 다른, CAS컴퓨터속기(Computer Aided Steno, 이하: CAS) 기기를 통해 한 글자를 한번에 입력할 수 있다. 현재 디지털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현직 수필 속기사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 이제 속기사가 되고 싶다면 사설학원 및 동영상 강의를 통해 기계 속기를 익힌 다음, 1년에 두 번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는 한글속기 자격증(1~3급)을 반드시 취득해야 한다. 자격증을 취득하면, 국회 속기사 외 대부분 분야에서 면접만으로 취업할 수 있다.

대한 상공회의소 주관 한글속기 국가기술자격 시험 안내
http://license.korcham.net/index.html
속기사 공무원의 분야 및 채용 현황
http://www.smartsteno.org/job_0
‘속기사’에 관련된 시험 및 취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커뮤니티
http://cafe.daum.net/comsok


속기사가 되는 일련의 과정은 어떻게 보면 국가 공인 자격증 하나로 성취할 수 있는 직업으로 보인다.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이 자격증을 따는데 평균 1~2년이 소요된다. 자격증은 1급부터 3급까지 나뉘어 있어 속기에 입문해 최고 등급인 1급을 취득하려면 2년이란 연습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득하게 앉아 장시간 집중할 수 있는 인내와 끈기를 갖춘 사람에게 적합한 직업인 셈. 그 때문에 성격이 급하거나 매사 꼼꼼함이 부족하다면 이 직업을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회속기사’는 국회사무처 시행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1차 필기시험-국어, 영어, 헌법, 행정법, 행정학, 2차 실기시험-1급 수준, 3차 면접)을 통과해야 하는 난공불락의 과정도 존재한다. 순간을 기록하는 말의 사진사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진득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국회속기사 채용관련 사이트 http://gosi.assembly.go.kr/
국회속기사의 역할을 알아볼 수 있는 국회방송 의정기록과 영상 http://assembly.webcast.go.kr/natv/natv_vod.asp?p_code=377&p_num=18

 
빠른 손보단 말랑말랑한 식견이 필요하다

속기사가 되기 위한 소양으로 ‘빠른 타자 능력’이 최우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 들리는 것이 확연히 달라진다. 따라서 자신이 소속된 기관의 시스템과 이곳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 정확한 이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국회는 다양한 정치, 경제적 사안들이 회의하는 곳이기 때문에 각종 뉴스를 자주 접하면서 사회적인 이슈와 친해져야 한다. 또한, 영어발음과 팔도 사투리가 난무하는 회의가 많으므로 평소에 ‘언어’에 대한 애착도 필수 소양이다.

MINI INTERVIEW

국회 사무처 의정기록과 김희숙, 류태문의 속기사 탐구
대한민국의 법이 만들어지는 국회. 현재 국회는 정기회 기간(9~12월)이 지났지만, 정기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안건들이 1월까지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 바쁜 와중에도 입사 2년 차인 김희숙 속기사와 입사 5년 차인 류태문 속기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묵묵히 담아내는 사명감 때문인지, 몸에 밴 배려와 친절로 화답했다. 30년이 넘은 선배 속기사 앞에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그들은 속기사 특유의 섬세하고 정직한 인상으로 명징하게 기록되었다.

럽젠Q 국회속기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대체로 ‘속기사’라고 하면 ‘회의장에서 한 회의 내용을 빠르게 쓰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되어 있는데, 국회속기사는 의정사를 기록할 뿐만 아니라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까지 그 업무 영역이 생각보다 복잡해요. 그래서 세부적인 역할이 네 가지 정도로 나뉘어 있죠.
회의장을 출입하는 ‘실무 속기사’는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회의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의사에 관한 발언을 기록해요. 경력이 오래된 ‘편집 담당 속기사’는 기록된 내용을 회의록의 체제에 맞게 다시 한번 검토, 교정하는 일을 하죠. ‘보존부록 담당 속기사’는 검토 과정을 거친 ‘본호회의록’ 외에도 회의록에 게재하도록 규정된 보고서(ex. 검토보고서, 서면질문서, 답변서) 등을 모아 별도로 ‘보존부록회의록’을 작성하고요. 그리고 ‘전자회의록 담당 속기사’는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작성된 ‘본호회의록, 보존부록회의록’ 등을 책자로 발간함과 동시에 ‘국회회의록시스템’에 등록하여 국민에게 제공하는 일을 하죠.

럽젠Q 속기사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낀 적이 언제인가요?

류태문 : 대한민국의 역사를 생생히 눈으로 보면서 직접 작성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죠.
김희숙 : 저 또한 국회에서 정사政事를 기록할 수 있다는 자체가 큰 영광이에요. 한편, 서울대학교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교육속기사로 일하며 청각장애 학생들을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내 몸에 달린 내 귀가 다른 사람의 귀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에 큰 행복을 느꼈어요.

럽젠Q 속기사 업무의 단점은 뭘까요?

류태문 : 속기사도 공무원인데, 보통 공무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시간이 많이 유동적이에요. 특히 정기회 기간에는 평균 오전 10시에 시작해 일찍 끝나면 오후 6시인데, 회의가 늦어지는 경우는 오후 12시를 넘어가는 때도 있고요. 또한, 마음을 졸이며 회의 상황과 의원들에 말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니까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장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기 때문에 근골격계의 통증이 가끔 있어요.

럽젠Q 속기를 놓치거나 잘못 적은 경우엔 어떻게 수정하죠?

속기와 함께 녹음을 같이 해요. 따라서 속기를 마친 뒤 녹음 파일과 속기록을 대조하는 작업을 가지죠. 따라서 잘못 적거나 놓친 부분은 그때 수정이 이루어지고요. 15분 녹음 분량을 번문飜文(속기에서 부호로 적힌 속기문자를 글자로 옮겨 쓰거나 각종 오탈자를 수정, 띄어쓰기 등을 하는 과정)하는데, 1~2시간 정도 소요돼요.

럽젠Q 다른 사람이 한꺼번에 말했을 경우도 있을 때는요?

한번에 다 적을 수 없기 때문에, 누가 말했는지 의원의 이름을 적어 놓고 녹음 파일을 참고하죠. 그런데 녹음 파일을 들어도 전혀 알 수 없는 외계어가 나왔을 때는 선배들과 모여서 공청을 하기도 하고 그래도 모르겠다면 직접 발언한 의원에게 직접 녹음 파일을 보내 준 뒤에 무슨 발언을 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죠.

럽젠Q 녹음을 하는데, 굳이 속기할 필요성이 있을까요?

회의장에 직접 참석하여 속기하는 이유는 회의장 분위기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단지 녹음된 말만 들어서는 그 말의 문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요. 그리고 대부분 화자가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투리, 외래어 등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입 모양도 같이 봐야 하기 때문이에요.

럽젠Q 속기사 업무를 하면서 생긴 ‘직업병’이 있나요?

김희숙 : 얼마 전에 <하이킥3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박하선 선생이 서지석 선생으로부터 받은 연애편지를 보고 빨간 줄을 그으면서 틀린 글자를 체크하는 모습이 나왔어요. 저희 속기사도 우리말 사랑을 넘어서 이제는 우리말 감시자가 됐다고 해야 할까요? 길거리 간판에서든 방송 자막에서든 신문에서든 띄어쓰기, 맞춤법, 표준어 등 어문규정을 꼭 짚고 넘어가야 속이 시원하답니다.(웃음)
또 하나는 독서의 속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거예요. 속기를 배우고 나서는 누가 말을 하든 영화 자막을 보든 자꾸 손과 머리가 그 글자를 만들어 내느라고 분주해요. 독서할 때 집중도가 떨어질 때가 있다는 이야기죠.
마지막으로 평소에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는 거예요. 업무 시간에 녹음을 통해 번문 작업을 하기 때문에, 종종 불명확한 발음을 확인하느라 매우 큰 소리로 녹음을 확인하는 작업이 많거든요. 그래서 평소에는 이어폰으로 음악 듣는 일을 가급적 삼가려고 합니다. 제 귀는 소중하니까요.(웃음)

럽젠Q 의정회의 속기 중 생긴 에피소드가 있나요?

류태문 : 2008년 여야 간 심한 의견이 대립하는 안건이 있었는데요. 모 위원회에서 그것을 기습 상정하려고 했어요. 그때 회의장 문 앞 쪽에서 실랑이를 하느라고 당직자 몇 백 명이 모여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죠. 그런데 ‘속기사’는 어떻게든지 회의장에 들어가야 하는 사명이 있거든요. 회의장 한 층 위에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나와 금색 창을 잡고 내려갔던 기억이 있죠. (웃음)

럽젠Q 속기사의 보물 1호는 무엇인가요?

류태문 : 들어야 하는 귀도 굉장히 중요하긴 하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손이죠. 손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니깐.(웃음)
김희숙 : 손, 귀, 눈 다 중요해요. 어느 것 하나 속기를 위해 저버릴 수 없는 보물이죠. 정말 어느 순간에는 ‘손, 귀, 눈 다 따로따로 보험을 들어놔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예요.(웃음)



럽젠Q 속기사를 꿈꾸는 청춘에 한마디 한다면요?

류태문 : 일단, 수많은 직업이 있기 때문에 속기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 신중히 생각해보세요. 만약 속기사 되고자 결정했다면, 평소 신문 등을 통해 뉴스를 자주 접하면서 사회적인 이슈와 다양한 분야의 식견을 넓히면서 차근차근 준비하셨으면 좋겠어요. 속기사는 인내와의 싸움이고 이를 견디지 못하면 이룰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에요.
김희숙 : 속기사는 고유의 자질이나 소양이 필요하니 그것이 자신에게 맞는지 점검하고 그것이 확정되면 쉼 없이 달려가세요. 저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을 국회에 들어오면서 실감했거든요. 자신을 탐구하는 일이 끝났다면, 자신을 믿고 끈질기게 노력하세요!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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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소룡 글자들이 한번이 써지는데 굉장히 신기했어요^^
    @ 뿌리다 실제로 판매하고 있는거예요ㅋㅋㅋ 뿌리다님도 이김에 한번??
  • 뿌리다

    실제로 출시되면 좋겠어요;;;
  • 삼다

    우와, 저 분들이 쓰시는 자판은 진짜 멋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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