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빛으로 풀어낸 한글의 아름다움 KBS 아트비전 영상디자인팀 김성태




여의도 KBS 아트비전 연구동 영상디자인 팀에서는 방송의 이미지 를 담당하는 디자이너들이 근무 한다. 방송에서 필요한 디자인 작업물이 모두 만들어지는 이곳 한 켠에는, 먹의 향기가 가득하다. 방금 전까지 작업이 이루어진 듯 아직 마르지 않은 붓과 화선지가 놓여 있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생방송에 사용될 타이틀을 쓰고 있는 김성태씨. 오랜 기간 작업해 온 숙련된 캘리그라퍼는 망설임 없이 글을 내려 썼다. 약 두 시간 후면 방송 으로 나오게 될 작품 이다.

“생방송 프로그램은 이렇게 방송 몇 시간 전에 최종 타이 틀이 선정 되어 넘겨집니다. 하루에 최소 4개는 쓰는셈이 니 붓을 놓을 일이 잘 없죠. 이곳 디자이너 한 명이 담당 하는 프로그램이 약 20개 정도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쇼오락프로그램인 <샴페인>, 드라마의 경우 얼마 전 종영된 <전설의 고향> 등을 담당했었죠.”

KBS 아트비전에 입사한지 올해로 10년. 원광대 서예과를 졸업한 김성태씨는 학원을 운영하며, 서예 작가로 활동하던 중 붓글씨를 쓸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입사하였다. 기존의 디자 이너들이 입사 후 붓글씨를 배우기도 했지만 캘리그래피를 소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 하지만 캘리그래피가 단지 붓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붓 이외에도 펜이나 나무젓가락, 손가락 등으로 글씨를 쓰기도 합니다. 종이 역시 화선지 말고 좀더 매끄러운 A4용지를 쓰기도 하고, 번짐을 극대화하는 경우 젖은 휴지에 글씨를 쓰기도 합니다. 특별히 붓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붓과 화선지가 만나 생기 는 미묘한 번짐이나 거친 갈필 등 붓으로만 나올 수 있는 선이 머리 속으로 그려왔던 단어의 이미지를 좀더 가깝게 표현해 주기 때문이죠.”

어떤 붓을 사용하느냐, 어떻게 붓을 잡느냐에 따라 글자의 느낌 은 천차만별. 게다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에 따라서도 이미지가 달라진다. 김성태씨가 작업하는 곳에는 여러 용도와 쓰임에 맞게 구별된 다양한 종류의 붓과 화선지가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국에 소속된 디자이너로서 작업 하는 방송 타이틀 이외에도, 상품 패 키지나 책 표지, 광고 등의 작업을 하 기도 하는 김성태씨. 이것들은 거의 디자인 업체를 통해 의뢰가 들어온 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몇몇 의 캘리그래피 시안을 제시하면 그에 맞는 작품이 최종 선정된다.

서예를 전공했기 때문에 한문 캘리그 래피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 한문 혹은 한글 캘리그래피 분야의 경우 문자의 특성상, 외국의 사례를 찾아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 디자이너로서 한국 고유의 특성을 살려야 할 독자적인 분야에서 활약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캘리그래피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트랜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국캘리그래피디자인협회(Korea Calligraphy Design Association, KCDA)가 만들 어지기도 했죠. 사실 우리 디자인 분야가 외국과 비교했을 때, 뒤쳐진 점이 없지 않아 있어요. 기술적 으로 부족한 면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살리는 부분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캘리그래피는 우리의 글씨, 우리의 디자인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 분야가 아닐까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창의적인 글쓰기에 대한 답으로 고통을 즐기는 자세를 제안했다. 아무것도 없던 무의 상태에서 유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른다. 캘리그래피도 마찬가지. 글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는 과정 역시 쉽지 않다.

“2008년 캘리그래피 전시 작품을 준비하느라 서너 달을 거의 꼬박 새웠습니다. 방송 타이틀 하나 작업하는데도 길게는 일주일, 적게는 사나흘이 걸립니다 다양한 시행착오와 시도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죠. 시놉시스와 기획의도, 제작의도 등을 꼼꼼히 읽고 그에 맞는 타이틀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그는 캘리그라퍼를 글씨를 만들어내는 작곡가로 비유했다. 작곡가의 손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음악이 탄생하듯이, 캘리그라퍼의 손에서는 음악과 같은 글씨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글자에서는 강하고 크게, 어떤 글자에서는 약하고 부드럽게 적다 보면 글씨에도 화음이 생깁니다. 이 화음을 조화롭게 만드는 작곡가인 셈이죠. 방송 타이틀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여러 분야에서 캘리그래피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분야예요.”

캘리그래피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자격증이나 조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글씨를 아름답게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문이 활짝 열려있는 분야라는 것.

“펜에 익숙한 사람이 많을 겁니다. 일단 펜으로 쓰는 글씨가 확장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표현해내는 법을 배우세요.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차별화된 글씨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하나하나 배워갈 수 있다는 것이 캘리그래피의 매력입니다.”

자신이 가진 필체와 감각이 가장 큰 경쟁력이 되는 직업, 캘리그라퍼. 한국적인 디자인,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서예에 기교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캘리그래피는 한편으로는 단아하게, 한편으로는 강하고 힘차게 춤을 추는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그 춤은 단순히 몸을 흔드는 동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질서와 규칙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었다. 붓을 휘두를 때마다 다르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캘리그래피에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었다.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캘리그라퍼의 손길이 더욱 더 바빠질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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