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미경]제5강 고려,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한 자주국가

 
국왕의 즉위식. 조정의 관리 중 가장 높은 직책인 문하시중의 선창에 따라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황상 폐하 만만세”를 외친다. 조회의 장면. 좌우로 길게 앉아 있는 문신들과, 무장을 한 채 그 뒤에 서 있는 무신들.
“짐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라고 왕이 말문을 연다. 국왕과 실권을 가진 신하가 만나서 나랏일을 의논하는 자리,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 받았습니다. 언젠가 광대한 옛 땅을 되찾아야 합니다..” 북쪽으로 진출해야 함을 강조하는 신하의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인다.
고려의 건국과 통일 과정을 다룬 <태조 왕건>으로 시작하여, 광종이 군주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을 다룬 <제국의 아침>, 사회 변화가 가장 심했던 무신집권기를 다룬 <무인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한결같이 고려를 ‘황제국’으로 그리고 있다. 무신집권자들에 의해 추대되어 실권을 가지지 못한 허수아비 노릇을 한 무신집권기의 국왕의 모습이나 신하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고려는 황제가 다스리는 당당한 제국이고, 사람들은 북으로 넓은 영토를 꿈꾸는 자주적인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역사책에는 고려시대 왕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대외적으로 송, 요, 금, 원나라 등 중국 여러 나라 국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고려의 국왕은 왕이라고 칭하였다. 이들 나라의 연호를 받아서 사용하였으며, 국왕이 즉위할 경우에는 사신을 보내서 인정을 받고는 하였다.
그러나 외교적으로 이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고려가 중국의 제후국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보기는 이르다. 구태여 중국과 외교에서 ‘황제’를 칭함으로써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유는 없었으며, 국왕의 입장에서는 중국 황제의 인정을 받는 것이 그 지위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또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와 같은 책들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엄격히 하였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설사 고려 때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를 고쳤을 가능성도 많다.

고려는 국내에서는 황제국에 해당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격식을 갖추었다. 국왕은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부르고, 아들을 제왕(諸王)이라고 하였다. 명령을 내릴 때는 제후국의 왕들이 사용하는 ‘교서(敎書)’라는 말 대신 ‘조서(詔書)’나 ‘칙서(勅書)’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짐’이나 ‘조서’,’칙서’는 황제만이 사용하는 말이었다.
수도인 개경은 ‘황도’ 또는 ‘황성’이라고 불렀으며,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원구단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족이나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작위를 주었다. 왕족에게는 백작부터 주었으며, 일반 신하들에게는 남작부터 주었다. 물론 작위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토지와 녹봉의 지급과 같은 경제적 대우가 뒤따랐다. 이와 같은 작위는 황제국 체제에서 제후들에게 부여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행정기구에서도 고려사회의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다. 고려의 기본적인 중앙 행정기구는 중서성, 문화성(또는 중서문화성)과 이, 호, 예, 병, 형, 공부로 이루어지는 3성(또는 2성) 6부였다. 3성의 ‘성(城)’은 1, 2품과 같은 가장 높은 품계의 관청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6부의 ‘부(部)’는 3, 4품 정도의 관청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성’과 ‘부’의 호칭은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6부에 해당하는 관청을 조선시대에는 6조라고 하였던 것과 비교될 수 있다. 6조의 ‘조(曹)’는 ‘부’보다 낮은 등급의 관청에 사용하는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는 황제국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을 대하는 고려의 태도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제국의 아침>의 주인공인 광종 때는 고려의 자주적이고 당당한 모습이 잘 드러나는 시기였다. 광종은 호족과 개국공신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호족들의 군사적 기반인 노비 중 원래 양민이었던 자를 가려내서 풀어주고 과거제를 시행하여 관리 임명의 기틀로 삼은 것은 이를 위한 조치였다. 그런 광종이 자신을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국왕으로 내세움으로써 권위를 세우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광종은 황제의 통치시기를 나타내는 이름인 ‘광덕’, ‘준풍’ 등의 연호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중국 황제와 대등한 위치에 있음을 과시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천수’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후, 다시 중국의 연호 대신 고려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가 문벌귀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해가면서 중국에 대한 태도는 조금 달라졌다. 문벌귀족들은 고려의 대외적인 자주성보다는 기존의 권력을 지키는 데 열중하였다. 윤관 등이 점령한 동북 지방의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고, 힘이 강해진 여진이 금을 세우고 조공을 요구하자 이에 굴복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인종 때 묘청이 서경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할 것(칭제건원)과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고려 문벌귀족의 이러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묘청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고려 조정의 분위기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다.
안으로 황제국을 지향하던 고려의 제도와 격식은 몽고의 간섭을 받으면서 철저히 사라졌다. 고려의 국왕은 왕자 시절 몽고의 공주와 결혼을 함으로써, 고려는 몽고의 사위 나라가 되었다. ‘폐하’,’짐’,’태자’와 같이 황제국의 용어도 ‘전하’,’고’,’세자’와 같이 제후국에서 사용되던 용어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최근 막을 내린 사극 <무인시대>의 무대인 무신집권기는 어떠하였을까? 무신집권기는 문벌귀족사회와 몽고간섭기의 과도기였다. 언뜻 보기에 무인이라고 하면 문벌귀족에 비해 진취적이고 중국에 대응하는 태도도 당당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무신집권기의 고려는 사극에 나오는 모습과 같이 황제국을 표방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황제라고 일컬어지는 주체가 국왕이라는 점이다. 무신집권기 국왕은 무신 통치자에 의해 추대되는 나약한 존재였다. 60여 년간의 최씨정권을 연 최충헌의 경우, 20여 년간의 집권기 동안 무려 4명의 왕을 갈아치웠을 정도였다. 무인들의 입장에서는 구태여 국왕의 권위를 더욱 높여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비록 당장은 힘을 가지지 못하였지만, 국왕은 어느 때인가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으로 가장 강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신권력자들이 특별히 중국과 외교관계를 강화하거나 고구려의 옛 땅을 찾아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기에는 권력을 사이에 놓고 다투었던 국내의 상황이 너무 급박하였는지도 모른다. 무신집권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최충헌의 집권 시기에는 거란, 몽고 등의 침입으로 고려가 대외적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결국 무신집권기 동안에도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조공을 하고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에 버금가는 제도나 격식을 유지하는 등 기존의 체제를 지속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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