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미경]제4강 이순신,민중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불멸의 영웅’

 

이순신이 이처럼 뜬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도 이순신이 특히 강조되던 시기가 있었다. 1970년대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4월말 ‘충무공 탄신일’을 전후해서 들려오던 <충무공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보라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 으로 시작해서, ‘충무공 오 충무공 민족의 태양이여, 충무공 오 충무공 역사의 면류관이여’ 로 끝나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군인 출신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던 박정희로서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했고 그 이상적인 모델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1960년대 후반 ‘국적있는 교육’ 이 강조되면서, 이순신에 대한 신격화가 본격화 되었다. 이순신의 활동을 자세히 소개한 교과서가 만들어지고, 학생들에게 이순신 정신을 가르쳤다. <충무공 노래>가 널리 불려진 것은 물론이다.

학교뿐 아니라 사회교육을 통해서도 이순신은 대중의 뇌리 속에 깊게 뿌리내렸다. 충남 아산에 있는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보수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고 이순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서울 광화문의 동상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 즈음이다. 이제 이순신은 영웅을 넘어서 ‘성웅(聖雄)’ 이 되었다. 국가에는 충성하고, 자식들에게는 자애로웠으며, 부모에게는 효성을 다하는 인물로 묘사된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순신은 곧 박정희 자신이었다. 당장 이순신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이순신 같은 인물이 되겠으니까 지켜보고 지지해 달라는 호소였고, 세뇌였다.

1979년 박정희가 죽고 난 다음에도 이순신은 여전히 ‘민족의 영웅’ 이었다. 사실 이순신은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한국인에게는 영웅이었으며, 존경하는 인물 1, 2위에 꼽혔다. 그렇지만 이후 박정희가 조금씩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지듯이, 이순신에 대한 이미지도 조금씩이나마 약해져 갔다. 그러던 이순신이 다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이순신은 구국의 위인이다.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구했기에 더욱 빛나는 인물이 이순신이다. 따라서 이순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어려움에 처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던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기에 이순신 전기물들이 간행되었던 것도 이를 말해준다. 박정희 시기에는 집권자에 의해 사회의 위기가 강조되었다.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며, 박정희 자신이 바로 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요즈음의 위기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다. 계속되는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감, 그것이 위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서 그런 불안감을 말끔히 씻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한다.

모든 위인이 그렇듯 이순신도 시대가 만들어 냈다. 요즈음의 ‘이순신 열풍’ 도 그런 사회적인 산물로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영조 때 김시위라는 사람이 말했듯이, 이순신은 뛰어난 인물이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없었다면 한 고을의 수령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순신은 현대 사회에서만 높게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도 이순신의 전공과 충성에 대한 평가는 「실록」에 나오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숫자다. 정조는 이순신의 충성을 기리고 무공을 높이 평가하는 상충정무비(尙忠旌武碑)를 세우면서, 그 비명을 자신이 직접 지을 정도였다. 이 때 우의정을 하던 이병모는 이순신을 가리켜, 제갈양 뒤의 일인자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정책을 본받아 군대를 육성하고 전함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한 것처럼 둔전을 설치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전공을 둘러싼 논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순신의 후손에 대한 대우가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논란도 대부분 이순신의 공적이 과대포장 되었다는 것보다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에 대한 대우를 주장하면서, 이순신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결국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이순신의 공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는 셈이었다.

이순신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대중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이 때문에 지배층뿐 아니라, 대중들도 이순신을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대중의 이순신’ 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마음 속의 구세주였다. 무속인들이 모시는 대표적인 인신(人神)이 이순신이라는 것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에서 죽은 것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이순신이 대중의 마음 속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대중이나 지배층 모두에게 영웅이었기에, 이순신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논란이 이순신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자살하였다는 이야기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한 나라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사람이 철수하는 군대를 공격하다 죽었다는 것이 잘 납득이 되지 않는데다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너무 소략하며, 몇 가지 정황도 의심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제기되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죽은 것이 실제로는 자살이라는 설도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대중에게 있어 이순신의 인기가 워낙 높았기에 이는 전쟁 때는 이순신을 뒷받침하는 힘이지만, 전쟁이 끝나면 오히려 그로 인해 조정의 의심을 살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 역적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토사구팽(兎死狗烹)론이다. 현명한 이순신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임진왜란 중에도 이미 한 차례 비슷한 위기를 겪은 바 있다. 그래서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자살설보다는 덜 언급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은둔설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가장한 채 전투의 혼란 중에 몰래 빠져 나와 조용히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이순신이 정말로 죽은 것은 이후 6년이 지난 다음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 차원의 지원을 하였음에도, 이순신의 장례는 죽은 지 80일만에야 치루어졌다는 점과, 그 후 15년 만에 다시 이장을 하였다는 사실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자살설보다 오히려 더 체계적인 셈이다.

그러나 자살설과 은둔설은 명확한 자료에 근거하고 있지 않는, 그야말로 추정일 뿐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경위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가 자살이나 은둔을 하였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지는 못한다. 그저 명확히 알지 못해 궁금한 점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방영될 TV사극에서는 이순신을 21세기의 지도자상으로 보고 있다. 역사의 전환점을 리드해나갈 인물, 무한 국가경쟁 시대의 경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인물, 애국심과 용기를 가지고 개혁을 실천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임시로 붙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TV사극의 제목처럼 우리에게 이순신은 ‘불멸의 이순신’ 이었으면 좋겠다. 국가나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불멸의 이지미가 아니라, 언제나 위기에 처한 국가와 민중을 구원하는 그런 ‘불멸의 이순신’ 말이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emoticon

스티커 댓글

스티커를 사용해서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달기
  • 감동
  • 부들부들
  • 눈물
  • 두근두근
  • 좋아요
  • 사랑해요
  • 멋짐
  • 하하
  • 신남
  • 행복
  • 멘붕
  • 헉
  • 시무룩
  • 하이파이브
  • 응원
  • 쓰담쓰담
  • 뽀뽀
  • 박수
  • 선물하기
  • 고마워
  • 귀여워
  • 셀카
  • 저요
  • 열공
  • 쓰러짐
  • 씻기
  • 팩

소챌 스토리 더보기

프로젝트28cc 김태윤 대표가 청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맥 알 못 다모여라

한 번쯤, 이런 생각 해보지 않았어?

좋아하면 하GO 싫어하면 말GO

시간을 따라 수상버스 여행

긴 밤에 바치는 나만의 소장각 채널

자아에 대한 고민이 열리고 닫힌다, <인형의 집 Part 2>

프로 영상러의 즐겨찾기 목록

2012년, 빙의하고 싶은 영화 속 주인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