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미경]제3강 장길산, 시대가 민중의 영웅을 만들다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유명한 성호 이익의 글을 모아놓은 「성호사설」에는 그가 정치·경제·인물·사건·사상 등에 대해서 쓴 「인사문(人事門)」이 있다. 인사문 중에는 ‘임거정’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글의 제목은 ‘임거정’이지만 내용은 조선시대의 이름난 도적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이 글에서 이익은 홍길동, 임꺽정(임거정), 장길산 이 세 사람을 대표적인 도적으로 꼽았다. 홍길동은 시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서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행적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았으나, 임꺽정은 명종 때의 가장 큰 괴수로, 장길산은 숙종 때의 교활한 도적이라고 평하면서, 그들의 활동에 대해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고 있다. 그리고 장길산을 끝내 붙잡지 못한데 대해 나라가 지략이 없었음을 크게 한탄하고 있다.

이익이 보는 장길산은 말 그대로 도적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떠오르는 장길산의 이미지는 보통의 도적이 아니라 의적이다. 장길산 뿐만 아니라 이익이 말한 다른 도적, 홍길동과 임꺽정도 우리에게는 의적이다. 왜 이익이 도적으로 생각했던 이들이 우리에게는 의적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장길산에 대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몇 가지 기록에서 그의 생애나 활동에 대해 단편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장길산은 원래 곤두박질(갑자기 몸을 거꾸로 떨어지는 것)을 잘하는 광대 출신으로, 용맹스럽고 몸이 날래 마침내 도적의 괴수가 되었다고 한다. 장길산의 무리는 주로 황해도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지만, 여러 도를 왕래하고 대낮에도 수십 명이 무리지어 말을 타고 다닐 만큼 규모가 크고 재력도 갖추었다.

그런 까닭에 장길산 무리가 반역을 꾀하는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다. 예컨대, 1696년 서울에서 양반 서얼과 노비 출신들을 엮어서 반역을 도모하다 체포된 이영창이라는 사람은 금강산 승려 및 장길산 무리와 손을 잡고 역모를 꾀했다고 자백하였다. 조정에서는 장길산 무리를 소탕하는데 온갖 노력을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나 수령은 물론, 중앙에서도 장길산 무리를 체포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일당 중 일부를 잡는데 그쳤을 뿐, 장길산은 행적조차 자세히 밝히지 못했다. 장길산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기록을 통해 대체로 확인할 수 있는 장길산에 대한 사실의 전부이다. 위의 사실에서도 장길산을 의적이라고 볼 만한 내용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장길산은 우리에게 여전히 의적으로 남아 있다.

장길산이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역사가 아니라 소설을 통해서였다. 1974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된 황석영의 장편소설 <장길산>은 그때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장길산이라는 역사 속의 인물을 현대 사회에 되살려 놓았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길산에 대한 이미지도 이 소설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임꺽정이나 홍길동도 마찬가지이다. 임꺽정의 이미지는 홍명희가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임거정>에 의해 형성되었다. 홍길동은 조선시대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보다는 신동우 화백의 만화 <홍길동>과 이를 원작으로 1967년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영화 <홍길동>으로 더 익숙하다. 민중에 대한 수탈을 일삼는 악덕 관리나 봉건적 모순에 대항하여 싸우는 의적인 장길산이나 임꺽정, 홍길동의 이미지는 곧 이들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민중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작품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소설 <장길산>이 나온 것은 유신체제라는 박정희의 독재통치가 행해지던 시기였다. 당시 독재정치의 가장 커다란 희생자는 노동자, 농민 등의 민중이었으며 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궁극적인 힘도 민중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런 민중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었던 것이 소설 속에 나타난 장길산이었다. 임꺽정이나 홍길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을 억압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민중의 영웅이 현대 사회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이 활약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이었다. 장길산이 활약했던 조선후기 사회는 커다란 변화에 휩싸여 있었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당파들 간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지고,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였으며 신분제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지고, 관리나 양반지주들의 수탈은 심해졌으며 농민들은 갖가지 조세에 시달렸다. 이에 대한 농민이나 노비 등 피지배층의 저항도 활발해졌다. 도망을 하거나 떠돌아다니면서 조세나 수탈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때로는 무리를 지어 도적 활동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비록 도적 집단이지만, 이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자신들을 억누르고 수탈을 일삼는 봉건 관리나 지주들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행위가 민중을 위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기도 하였다. 장길산이 당시 사회에서도 커다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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