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예술에 대한 반성으로 라오콘을 가지고 고대로 돌아가자고 이야기
한 것이다. 1764년의 ‘고대미술사’에서는 라오콘 군상에 대해 극도의 고통 중에
극도의 아름다움을 시사한다고 극찬을 했을 정도.
1766년 레싱은 “미술가가 재현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이다”라며 미술가는 창조적이고
이행적인 순간을 잘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라오콘을 가지고 공간과 시간, 신체의
형상화와 행위의 형상화를 구별한 것이다.
라오콘에 대한 칭송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비판도 존재했다.
빌헤름 하인제는 라오콘이 “보면
볼수록 억지로 꾸며져 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라오콘‘을 가지고 그리스인들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었음을 입증하려 하는
것은 독이 퍼져 부어 오른 육신이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라고
말했다.
괴테는 라오콘에서 균제와 다양성,
정지와 운동, 대비와 변화가 감성적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작용하여 높은 파토스(pathos)의 표상에서 쾌적한 감각이 고취되고,
수난과 고통, 열정의 격랑은 우미와 미로써 완화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Die welt als will und Vortellung’에서
조각의 작용법칙과 문학의 작용법칙간의 경계를 이야기했다. “각각의 예술에는 한계가
있기에 라오콘의 고통을 비명으로 표현할 수 없다. 이에 미술가는 비명을 모두 운동으로 바꾸어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이야기 했고, 19세기의 다니엘 호손은 “영원한
운명으로까지 확장된 일순간의 경악”이라고 표현했을 정도.
야곱 부르크하르트는 고통에 맞서는 투쟁을 중심테마로 간주하고 이 투쟁의 목적을 미적 이유가 아닌 도덕적 이유에 있다고
생각했다. 1889년 슈타우퍼 베른은 라오콘에서 바로크 미술의 모태를 보았으나 ‘라오콘’만큼
세상에 유해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 했다.
간략하게 이야기 하긴 했지만 이‘라오콘 군상’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절대적인 평가가 내려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시대의 상황과 자신의 입장에 따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다를 수밖에 없는 상대적 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라오콘에 대해 이야기 했으리라.
괴테는 “예술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예술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거기에는 예술 전체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시대의 라오콘은 어떤 모습일까? 얼마 전 뉴스에서 카드 빚에 못 견뎌 자식들과 함께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오콘을 만들었던 작가가 현재의 라오콘을 만든다면 커다란
신용카드에 눌려 고통스럽게 압사당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