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그 치명적인 유혹] 제2강 내가 권하는 책 (1)

   
 
 

가운데 첫손을 꼽는다면 주저 없이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세종서적)를 들고
싶다. 시력을 거의 잃은 작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했던 망구엘은, 독서란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독자가 책에 감성, 직관, 영혼을 불어넣은 재창조 행위라고 말한다. 길거리에
버려진 종이조각까지 읽었던 세르반테스, 나체로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었던 영국 시인
셸리 등, 독서광 열전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 책을 보면 눈으로만 읽는 묵독이 읽기의 혁명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4세기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이상한 책읽기’, 즉 소리내지
않고 눈으로만 책을 읽는 행위에 크게 놀랐다. 오늘날 도서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면 당장 쫓겨나겠지만, 서양 중세의 수도원이나 도서관은 책 읽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히려 묵독을 하면 책은 읽지 않고 딴 생각한다고 오해받기 십상이었던 것. 서양에서 10세기에
들어와 본격화된 묵독은 책 읽는 사람 나름의 사색을 가능케 했다. 책 내용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책과 사람이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독서의
역사』
가 서양의 책 문화만 담고 있는데 아쉬움을 느낀다면 정민 교수의
『책 읽는 소리』(마음산책)를 읽어보자. 다음은 이 책에 실린 몇 가지 이야기. 정인지(1396-1478)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한 옆집 처녀가 밤에 담을 넘어 정인지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정인지는
정식 혼인절차를 밟겠다는 말로 처녀를 달랜 뒤 이튿날 이사를 가버렸다. 처녀는
상사병으로 죽었다. 글 읽는 소리가
낳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다.
조선 중기의 선비 송준길(1606-1672)은 남에게 책을 빌려 주었다가 돌려 받을 때
책에 보풀이 일지 않았으면 책을 열심히 읽지 않은 것으로 보고, 몹시 나무라며 다시는
책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빌려간 이들은 야단 맞지 않으려고 일부러 책장을 험하게
넘겨 보풀이 일게 한 다음 돌려주곤 했다.
빌려 준 책 돌려 받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하던가. 허균(1569-1618)은
빌려간 책을 돌려 받기 위해 정구(1543-1620)에게 편지를 보냈다. ‘옛 사람은
책을 빌려주면 항상 돌아오는 것이 더디다고 했다지요. 더디다는 것은 1년이나 2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 또한 벼슬길에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이것을 읽으며 무료함을 달래려 합니다.’
그런데 이 편지 내용은 책을 돌려 받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서법을
안내하는 책들도 적지 않은데 일본의 저명한 저술가이자 ‘엽기적인 독서광’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청어람미디어)가 압권이다. 한 권의 책을 저술하기 위해 500권
이상의 책을 독파하며 4만 권 가까운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다치바나의 독서법은 실전 독서법,
즉 각자의 필요에 따라 대량의 지식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습득, 정리하기 위한 독서법이다.
다치바나가 말하는 실전 독서는 검색 독서, 즉 인터넷 검색엔진으로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과 비슷한 독서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의 주제를 정확히 알기 위해 그 주제와 관련
있는 다양한 분야의 다른 책을 두루 읽는 하이퍼링크식 독서이기도 하다. 책의 각 장의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을 빠르게 읽어 책의 요지를 파악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찾는
특유의 속독술도 인상적이다. 이 책은 독서법을 넘어서 지식정보 구축법의 차원까지 포괄한다.
   
 

서평을 단행본으로 펴낸 드문 경우로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의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50여 권의 책은 그 장르나 성격이 무척 다양하다.
『로빈슨 크루소』, 『허클베리 핀의 모험』,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는가 하면, 플라톤,

사르트르, 엘리아데, 프로이트도 있으며, 김지하, 박노해,

최창조, 이윤기 등 우리나라 저자들의
책도 있다. 동서고금을 종횡으로 넘나드는 독서 편력기라고 할 수 있는데, 남의 독서 체험을
엿보는 불온한(?)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저자는 왜 게으름뱅이로 자처했을까? 책을 제대로 즐기려면 어느 정도까지는 게으름뱅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책을 읽을 물리적인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책이 내게로 올 수 있도록 마음 속 빈자리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늘 분주하기만 한 마음에 책이 제대로 들어올 리 없다.

그리고…
위에 소개한 책들 이외에 다음과 같은 책들을 각별히 추천하고 싶다. 책 보관 및 정리의
역사는 물론 25가지에 달하는 책 정리 방법까지 소개하는 헨리 페트로스키의 『서가에
꽂힌 책』
(지호), 못 말리는 독서광 가족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서재
결혼시키기』
(지호), 파피루스, 양피지의 시대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을
거쳐 책의 대량 생산 시대에 이르는 과정을 풍부한 사진 자료와 함께 전해주는 브뤼노
블라셀의 『책의 역사』(시공사),
저자의 오랜 책 순례의 체험이 녹아 있는 고품격 에세이를 읽다 보면 서양의 책 문화에
흠뻑 젖어들게 되는 이광주 교수의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
(한길사).

 

히딩크 감독은 치밀하고 수준 높은 작전을 구사하는 전형적인 지장(智將)이다. 그런 그는
소설이나 역사책을 무척이나 즐기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우리 대표팀을 이끌고 유럽 전지훈련에
나섰을 당시 코치들은 책만 잔뜩 들어있는 히딩크의 가방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직업상
워낙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히딩크는 그런 여정에서 늘 책을 벗삼았던 것이다. 월드컵
직전에도 스포츠 심리학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으며 치밀하게 준비할 정도였다니, 그가
책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알 수 있다.
 
책과
사람이 사귀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미국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대로, 어느 시대에서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오스틴 펩스의 말대로, ‘낡고
오래된 코트를 입을지언정, 새 책을 사는데 게을리 하지 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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