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그 치명적인 유혹] 제3강 내가 권하는 책 (2)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책, 읽으면서 계속 웃어야만 했던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노인 개그 만화’를 표방하는 윤태호의 <로망스>(애니북스)가
있다. 팬티 차림으로 TV보기가 생활의 유일한 낙인 김이용 노인, 월남전에서 날렸다는
뻥으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마저 잠재워버리는 자칭 파랑새 노인, 휴대폰 생겼다고
다른 노인들에게 자랑하지만, 정작 벨이 울리자
통화하는 방법을 몰라 음악소리에 맞춰
춤만 추는 반치매 노인, 동네 미장원에서 깍두기 스타일로 머리 잘라달라는 전직 조폭 노인.
그냥 웃어넘기기엔 여운이 찡한 우리 어르신네들의 일상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다.
노인들의 성(性)에 대한 고민도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낡고
녹슨 내 열쇠. 초라한 내 열쇠. 늙으면 역시나 조강지처라는데….농담 아니다. 여보∼문
좀 열어!” 여기에서 열쇠가 무언지, 문 좀 열라는 애절한 부탁이 무얼 뜻하는지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다.
 
 
미디언
고(故) 이주일 선생이 유흥업소 광고에서 즐겨 쓰던 표현으로 ‘일단 한 번 와보시라니깐요’가
있다. 그만큼 서비스에 자신있다는 뜻인데, ‘일단 한 번 읽어보시라니깐요’에 해당하는
책으로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의 소설집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이세욱 옮김,
문학동네)가 있다. 에메의 작품 세계를 일컫는 표현은 무척 다양하다.
‘두 세계를 넘나드는 이야기꾼’,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기적적인 배합’, ‘일상적인 것의 위조’.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으면 이런 표현들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줄거리. 등기청 하급직원 뒤퇴유욀은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지녔다.
의사는 그 능력을 없애 줄 약을 처방해주지만, 뒤퇴유욀은 한 알만 먹고 나머지 약은 완전히
잊어버린다. 뒤퇴유욀은 그 능력을 이용해 평범한 회사원에서 도둑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등기청 하급직원에서 괴도가 되었던 것. 결국 체포되지만 벽을 통과하는
그를 잡아둘 수 있는 감옥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아스피린인 줄 알고 먹은 약이 예전에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없애기 위해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었다. 뒤퇴유욀은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벽을 통과해 나오다가 벽 속에 응고되어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밖에도 ‘속담’,
‘천국에 간 집달리’, ‘생존 시간 카드’, ‘칠십리 장화’ 등 모두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개인적인 독서 취향은 처세 실용서와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와 취향이 다소 바뀌었다.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콕콕 찍어주는 처세 실용서가 많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살아라>(베르너 퀴스텐마허, 로타르 자이베르트 지음,
유혜자 옮김, 김영사)는 보다 여유 있고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건과 시간과 인간
관계를 단순화시키라는 메시지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담은 실용 지침서다.

끊임없이 부피가 늘어만 가는 서류철이나 파일에서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하나 찾을 때마다
불필요한 것 세 개를 없애라는 ‘1대 3 원칙’. 선반이든 서류함이든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75% 정도 찼을 때 버리기 시작하라는 ‘4분의 3 원칙’. 다른 사람의
부탁이나 제안에 대해 확실하게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지침들이 아닐까 한다.
 
 
화,
소설, 처세 실용서 다음으로 자서전 한 권을 각별히 추천하고 싶다. 1991년 당시 핀란드
헬싱키 대학에서 전산학을 공부하는 스물 한 살의 대학생이던 리누스 토발즈. 그는 새로운
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를 개발하고 그 소스를 완전히 공개했다. 리눅스는 현재 MS사 윈도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성장했다. 리누스 토발즈의 자서전 <리눅스, 그냥 재미로>
(안진환 옮김, 한겨레신문사)에서 우리는
토발즈의 독특한 삶의 태도와 만날
수 있다.
애플사, 선마이크로시스템즈 등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 것은 물론, 명예 이사직만 맡아주면
120억 원을 주겠다는 기업의 제의도 거절한 토발즈. 그는 현재 미국 산타클라라의 침실
세 개 짜리 연립주택에 살면서 리눅스와 상관없는 회사의 하드웨어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왜 제2의 빌 게이츠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마다했을까?
토발즈는 리눅스를 개발하여 소스를 공개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전 세계 컴퓨터 전문가들과
함께 보다 발전시켜서 다시 공개하고, 이런 일들을 책 제목대로 ‘그냥 재미있어서’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윤을 추구하려는 동기나 이름을 드날리려는 동기가 아니라, ‘그냥 재미로(just
for fun) ‘했다는 것이다. 토발즈의 ‘재미 철학’에 따르면, ‘재미’야말로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움직여 사회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독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정말 부지런히 많은 책을 읽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책을 탐하느냐고 물으면, 아마도 ‘그냥 재미로’라고 답하지 않을까 한다. ‘그냥 재미로’
책을 읽는 것의 반대편에는 어떤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독서가 있다. 예컨대 고시생이나 자격증 시험
준비생의 법률 도서, 수험 도서 읽기가 재미와 상관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특정 목적을 지닌 독서를
나는 ‘닫힌 독서’라고 말하고 싶다.
시인 서정윤의 <홀로서기>는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로 시작된다.
입소문, 베스트셀러 목록, 무책임한 서평, 출판사의 광고 물량 공세, 이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책 선택과 책 읽기에서 ‘홀로 서고자’ 한다면, 목적을 가지고 읽는 닫힌 독서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독서가 의무나 부담이 아닌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 되도록 하자. 토발즈의 표현을 빌려
‘그냥 재미로!’ 책을 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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