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의 젊은 논리] 선거 판을 속뜻 찾아 읽기 훈련장으로 여기길…

   
 
   
선거철입니다. 선거판은 정말 골치 아픈 곳 같습니다. 후보 본인이나 참모진은 온갖 자질구레한
이해관계까지 다 신경을 써야 하니 정말 골치 아플 거예요. 유권자는 또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골치 아프죠. 죽으나 사나
춘향이 일편단심으로 한 후보에 마음을 정한 사람들은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매일매일 살피느라 골치 아프고,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마음을 줄지 고민하느라 골치 아플 겁니다. 우리 <미래의 얼굴> 독자 중에는
처음으로 한 표를 던지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이 선거 판에서 후보들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기준으로
표를 던질지 더더욱 고민스러울 것입니다.
 
언제가 인기를 끈 연극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고, 남녀 주인공의
속마음을 말하는 분신들이 함께 등장해서 주인공이 무어라 말하고 나면, 분신이 그 주인공의 속마음을 말해주는 연극. 왜
가끔 코미디 프로에서도 이런 형식을 써먹잖아요. 사실 선거 판이야말로 바로 전국민을 상대로 이런 연극이 펼쳐지는 공연장
같습니다. 후보가 무어라 말하고 나면, 신문이나 방송은 그 후보의 분신처럼, 그런 말 뒤 숨겨진 괄호 안에 들어 있는
후보의 속마음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나서서 말하죠. 그런데 분신들이 여럿인 데다가 다 제각기 다른 말을 하는 경우도 많아서
혼란스러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후보의 말을 글자 그대로,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선거판의 ‘게임의 법칙’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결국 괄호 안에 들어있는 속마음은 스스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사고가 정말 필요한 것이죠.
 
그러나 사실 이렇게 겉말과 속마음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 때문에 정치를 비하하거나 선거를
폄하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겉말만 보지 않고 괄호 속에 든 속뜻을 읽는 것이 사실 우리 언어 생활의 실제 상황이니까요.
선거판은 좋은 훈련장이라 생각하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실제 논리적인 관점에 선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명제’의
관점이 아니라 ‘진술’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명제는 어떤 주장의 겉말 부분입니다. 말이 가진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진술은 어떤 주장의 속마음까지 포함된 의미입니다. 즉 진술은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화자(話者)가 특정한
청자(聽者)에게 내뱉은 말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했는가에 따라서 그 속뜻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명제의 관점에서는 같은 주장도 진술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네’라는
주장은 명제의 관점에서는 누가 말하건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첫 소풍을 손꼽아 기다리던
유치원 꼬마가 소풍가기로 되어 있는 날 아침에 일찍 잠을 깨어 창문을 열고는 절망적인 톤으로 내뱉는 “비가 오네”라는
진술과, 며칠째 맑은 날씨 때문에 공치던 우산장수가 아침에 창을 열고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내뱉는 “비가 오네”라는
진술을 같은 것으로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내뱉는 말들은 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화자에게 하는 진술들입니다. 따라서 상황 속에서 하나하나 속뜻을
읽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속뜻을 제대로 헤아려 읽지 못하면 한때 유행했던 ‘썰렁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조폭 아저씨들이 모임을 하고 있다고 해보세요. 창문이 열려 있어서 찬바람이 들어오니 큰 형님이 막내를 부르면서
“아그야, 창문 열렸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충성심 강한 막내는 일어나서 큰 소리로 “예!
형님! 창문 열렸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큰 형님이 다시 한번 “야, 이 놈아 창문 열렸다니까”하니,
막내는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예! 형님! 정말 창문 열렸습니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말의 속뜻을 읽지
못한 막내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요?

 
책을 읽을 때도 심지어는 고전을 읽을 때에도 ‘진술’의 관점에 서야 그 고전에 주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책의 저자는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인류의 최대의 고전이라는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마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성서가 고전이니 한 번 읽어보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스럽고 심오한 교훈을 기대하면서 신약성서를
펴 든 사람은 바로 혼란과 당혹감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맨 처음인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성스러운 교훈은 찾을 수
없고 맨 ‘새끼치는’ 얘기만 나오기 때문이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지루한 기록들이 한참 지속됩니다.
성서의 ‘성’자가 한자로 무슨 ‘성’자인지 애매해지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일단 인내하고 2장으로 넘어가는 독자는 다시 한 번 짙은 배신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2장에는
예수의 처녀탄생 얘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부계 족보를 참고 읽었는데, 예수가 신이 직접 잉태시켜서 처녀 몸에서
났다면 앞의 부계 족보는 의미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급한 독자는 여기서 벌써 책을 던져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진술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갑니다. 마태라는 이 글의 저자는 유대지방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전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독자를 의식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독자인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두 가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메시아는 정통 다윗 왕가의 자손으로서 유대를 복원시킬 것이라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구약의 예언들에 대한 믿음입니다. 바로 이 두 믿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편으로는 예수의 부계 족보를 먼저 보여주고 다음으로는
예수의 처녀 탄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얘기가 좀 먼 길로 흘렀는데, 다시 돌아옵시다. 결국 선거판은 우리 젊은 친구들이 ‘진술’의 속뜻을 읽는 능력을 기르는
좋은 훈련장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기말고사만 신경쓰지 말고, 후보들의 겉말에서 속뜻을 캐는 재미에 한 번 흠뻑
빠져보기를 바랍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emoticon

스티커 댓글

스티커를 사용해서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달기
  • 감동
  • 부들부들
  • 눈물
  • 두근두근
  • 좋아요
  • 사랑해요
  • 멋짐
  • 하하
  • 신남
  • 행복
  • 멘붕
  • 헉
  • 시무룩
  • 하이파이브
  • 응원
  • 쓰담쓰담
  • 뽀뽀
  • 박수
  • 선물하기
  • 고마워
  • 귀여워
  • 셀카
  • 저요
  • 열공
  • 쓰러짐
  • 씻기
  • 팩

소챌 스토리 더보기

대학생 집콕러를 위한 월간 소비

편지가게 글월,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은 게 언제예요?

비전공자를 위한 교양서

비전공자를 위한 전공자의 교양서 큐레이션

일본어 번역가 강민하 | 마음까지 전하는 번역

VEGAN ESSAY 의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입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식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먹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입문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12년, 빙의하고 싶은 영화 속 주인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