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의 젊은 논리] 참을 수 없는 전제의 무거움!

   
 
아직 한 해를 정리하기는 이르지만 돌이켜 보면 올해는 월드컵 4강,
아시안 게임 2위 등 각종 스포츠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잘 나간 한 해였다. “대-한민국”
구호가 연이어 우리 가슴을 흔들었고, 안 그래도 벌건 “BE the Reds!”
티셔츠를 걸친 남남(南男)들은 아시안 게임 때 가세한 아리따운 북한 응원단 낭자들 때문에 몸달기도
했다. 그런데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지는 법인가. 이렇게 잘 나가는 이면에 세계 1위, 아시아 1위를
차지하는 안 좋은 기록, 부끄러운 기록도 널려 있다고 ‘삐따기’ 사이트들은 목청을 높인다. 바로
이런 부끄러운 기록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낙태 세계 챔피언이라는 기록이다. 그것도 부동의 1위라지
않는가? 아, 1999년인가 2위로 떨어진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새 천년에 다시 1위로 복귀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도대체 한 해 낙태 건수가 몇 건이기에 챔피언 자리를 고수할 수 있을까?
이미 낡은 수치인지는 모르나 낙태 건수는 연간 150만 건에서 200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이
연간 100-150만 건 정도라는 소문인데 미국 인구는 우리의 한 여섯 배쯤 되니 상대가 안 된다고
보아야 하겠다. 우리나라 성인 여자 10명 중 9명이 낙태 경험이 있단다. 이 중 기혼 여성의 낙태
경험률은 39%이며, 전체 낙태의 60% 이상이 기혼 여성의 낙태라는 소문도 들린다. 한 해 보통
태어나는 아이가 평균 60만 명이라 하니 직행 타고 바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는 아이가
더 많은 셈이다. 어떤 사람은 낙태가 세계 챔피언인 것도 문제지만, 더 문제인 것은 이렇게 낙태
문제가 심각한데 사회적으로 전혀 쟁점이 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라고 입에서 불을 토한다. 맞는 말
같다. 사태가 그 정도라면, 시청 앞에 모여서 “낙-태 반대” 구호라도 외치든지,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도 보살펴 줄 수 있는 제도와 시설을 늘리기 위해 운동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사회는 낙태를 여성 개인의 문제로만 밀쳐 놓고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낙태에 대하여
무관심해 하는 것이다.
왜 이리 낙태가 많을까? 여러 가지 사회적 원인이 분석될 것이다.
남아선호, 성교육 부재, 가부장적 문화 등등. 그런데 항상 끼어 드는 것이 인명경시풍조라는 요인이다.
그런데 이 요인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낙태와 관련된 이론적 쟁점은 우선 낙태가 살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논리적으로는 바로 태아가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쟁점과 직결된다. 왜냐하면 만일 태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다면 낙태는 살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태아를 완벽한 인간으로 볼 수 없다면 낙태도 살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이른바 종교계로 대변되는 보수주의와 여성계로 대변되는
자유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더 근본적인 쟁점이 이 문제 밑에 놓여 있다.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태아가 인간으로 판단될 수도
있고, 완벽한 인간은 아닌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에 대한 규정이 이 문제에서
근본적인 숨겨진 전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두 경향의 접근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자연적인 접근이다.
즉 인간을 생물학적이고 유전학적인 차원에서 보아, 특정한
유전 인자를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종으로 보는 접근이다.
이렇게 보면 태아는 완벽한
인간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완벽히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접근에 서게 되면 심지어 인간의 수정란도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따라서 수정되었더라도 착상을 방해해서 임신을 막는 응급피임약도 결국 살인약이
될 것이다.

이와는 대립하는 접근법은 인간에 대한 문화적 접근이다.
인간을 인격체(person)로 보는 것이다. 즉 자의식과
반성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패륜아를 보고 “이 인간도 아닌
놈아”라고 할 때 바로 이런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입장에 서게 되면 태아를 인간으로
보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까지 가지고 있는 정보에 따른다면 태아가 자의식을 가진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태아가 엄마 태내에서 자신의 미래인 출산을 의식하면서 자궁벽에 하루하루
금을 그어가며 ‘D-30’이라고 헤아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처럼 낙태 문제의 경우,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숨겨진 전제로서
움직이기 힘든 무게를 가지고 우리의 사고와 논의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낙태하는 사람들이 태아를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낙태했다면 바로 인간 생명을 경시한 것으로 평가해야 하겠지만, 만일 낙태한 사람이
태아를 완벽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입장에 서있다면 거기에 인명경시풍조라는 분석을 갖다 대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전제를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참을 수 없는 전제의 무거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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