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세상읽기] 문화와 과학기술의 移轉에 대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한국에서 서구 학문을 받아들이자는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유교와 한문에 근거한 구학(舊學)의 틀을 벗고 윤리학, 정치학, 수학, 물리학, 지리학
등 서구식 학문 체계를 세우고, 교과서를 번역해서 이를 습득하려 했지만, 당시 그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수입하려던 서구의 학문이 서구의 대학이라는
제도 속에서 “연구<-->교육<-->학습”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되던 것이었지만, 우리는 대학이라는 제도적 기반 없이 학문의 내용만을 (그것도 교과서적인 내용만을)
받아들이면 된다고 소박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이라는 교육 기관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구자들이 나왔고 대학의 설립 운동이 불붙었지만, 식민지 통치의 권력을 쥐고 있던 일제는 문과 중심의 경성제국대학
하나만을 허가하고 사립대학을 불허했다.
“낱개”와 “네트워크”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는 숱하게 많다.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을 수입한 나라들이 많았다. 증기기관이 영국 산업혁명의 상징(symbol)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입된 증기기관이 영국과 같은 폭발적인 산업혁명을 가져온 예는 전혀 없었다. 증기기관이란 것은 제련기술과 광산기술,
철도나 증기기관차와 같은 수송기술, 기계로 가득한 공장, 팽창하는 국내외 마켓에 대한 공격적인 점유,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등으로 이루어진 영국 산업화의 거대한 네트워크의 한 부품이었다. 이러한 산업의 네트워크에서 달랑 떨어져서 다른
나라로 이전된 증기기관은, 물론 같은 피스톤 운동은 수행했겠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같은 혁명을 추동하는 동력으로는
기능하지 않았다. 이러한 예는 서구의 기술이나 제도가 비서구 지역으로 이전 될 때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19세기에 프랑스는 세계 최고의 비단을 만들던 일본의 양잠기술을 이전하려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일본의
양잠기술은 농촌 주부들의 강도 높은 노동과 이를 가능케 한 일본의 가부장제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양잠
산업은 농촌의 가부장제가 아닌 자본주의 공장과 노동을 더는 기술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기독교적인 절대신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플라톤의 자연철학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거부했다. 17세기 과학혁명기를 주도한 유럽의 과학자들은 고대 자연철학 중에, 원자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대신 아리스토텔레스를 배격했다. 18세기 프랑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자연철학에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뉴튼의 힘(force)의 개념을 배제한 채로 뉴튼 과학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프랑스 역학의 전통은 라그랑쥬, 라플라스의
해석역학(analytic mechanics)으로 정점을 이루었다. 프랑스의 해석역학은 19세기 영국으로 역수입되었는데,
뉴튼의 전통에 있던 영국의 수학자들은 프랑스 해석 역학 중에 물리적 해석을 배제하고 그 수학적 테크닉만을 받아들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동양에 들어올 때, 중국의 천문학자와 사대부들은 지구가 운동을 한다는 지전(地轉) 이론은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은 중국이 평평한 지구의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는 중화사상과 마찰을 빚는 관계로 거부했다.
  17-18세기에 중국에서 서양과학을 받아들일 때, 중국 사람들은 서학중원(西學中源)의 이론을
만들어서 스스로 만족해 했다. 즉, 서양과학이 본래 고대 중국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중국 학자들은 피타고라스 정리와
같은 서양 기하학, 지전설과 같은 서양 천문학이 본래는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태도는 역시 동서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것이었다. 중세 서양의 학자들이 이슬람을 통해 그리스 과학을 재수입할 때도 비슷한 식의 정당화가 있었다.
즉, 자신들이 수입하는 과학은 야만 민족인 이슬람의 문화가 아니라 원래 유럽이 고대의 황금기에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 문화를
재발견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유럽 학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이 이슬람에 의해 덧씌워진 외피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 중국에서는 서양 과학기술에 대해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새로운 태도가 등장했다. 서양의 무기와 여타 기술에
감복하고 두려워했지만 아직 스스로의 정신적인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유지하던 시절, 서양의 用(technology)을 가지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면서 중국의 體(value and culture)를 보존한다는 얘기다. 이것의 한국판이 동도서기(東道西機)이며,
일본판이 화혼양재(和魂洋才)이다. 둘 다 동양의 정신에 서양으로부터 수입한 기술을 접목한다는 의미였다.
   
   
  “미국 문화”에 대한 찬반 양론이 팽팽한데, 미국 문화가 대체 무엇인가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단일한 덩어리라기 보다 무척 이질적이고 불규칙한 패턴을 가진 패브릭(fabric)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문화에는 코카콜라, 맥도널드, 스타벅스와 같이 세계화된 패스트푸드 소비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이나 투자 금융사에 의해 유포되는 엘리트 문화, 페미니즘이나 환경주의와 같이 학문과 지식의 형태로 유포되는
지식인들의 문화, TV나 락뮤직과 같은 대중음악이 전파하는 개인주의, 권위에 대한 도전, 성의 해방과 같은 “하위
문화”의 메시지가 혼재해 있다. 미국의 대중 문화가 미국 소비 자본주의의 연착륙을 위한 전초전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멕시코의 진보적 지식인 칸클리니는 미국의 미디어에서 조장하는 대중 문화가 멕시코의 정부나 사회기관에서 시민들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질 좋은 공공 서비스, 공정과 정의, 배상, 관심의 중요성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상기함으로써, 멕시코 상류층의
권위적이고 엘리트적인 문화에 대항하는 범국민적인 하위문화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제 3세계로 확산되는 서구 문화 중에
민주주의, 개인주의, 남녀평등의 사상과 제도와 같은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무차별적인 일방향의 전파력을 가진 범세계적인 미디어에 대해서도 다양한 “국소적”(local)인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같은 TV 프로그램 을 시청해도 문화적 배경과 맥락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조금씩 다르게 읽는다. 이러한 국소적 해석은 비록 큰 힘을 가진 것은 아닐지라도, 창조적일 수 있다. 즉
미디어의 확산은 범세계적이지만 그 수용은 국소적이며, 사람들은 외국 프로그램에 수동적으로 동화되기보다는 이를 보면서 자신의
문화와 외국 문화 사이에 상징적 거리를 인식하는 경향이 더 크다. 관객은 항상 적극적(active)인 것이다.
하버드대학교의 인류학자 제임스 왓슨은 서울을 비롯한 아시아 5개 주요 도시의 맥도널드에 대한 연구에서, 미국의 맥도널드에서는
음식을 먹고 바로 나가는 것이 가게와 손님 사이의 암묵적 합의임에 반해, 아시아에서는 맥도널드가 10대들이 숙제를 하고
친구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애용되는 등, 비슷한 음식을 팔아도 다른 패스트푸드 문화를 발전시켰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성 상에서 최근에는 국소적인 것의 중요성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미국 문화의 범세계적 전파를 그 특징으로
하는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의 과정에는, 지역적이고 국소적인 것이 범세계적인 마켓이나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즉 국소적 사건이나 변화도 시공간을 압축하는 네트워크에 의해 전지구적 사건으로 바뀌는 특성이
나타난다. 따라서 글로벌리제이션에는 미국의 문화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균질화, 보편화의 과정만이 아니라, 그것과 국소적
문화가 섞이고 그 과정에서 국소적 문화가 재발견되고 그 중 어떤 것은 글로벌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이질화, 파편화와
같은 정반대의 경향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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