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세상읽기] 잡종과 정치적 실천

   
     
 

잘 지냈지? 대통령을 뽑는 네 생애 첫 선거를 앞에 두고 좀 들뜬 듯 하구나. 후후.
네 편지를 받고 나도 선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단다. 네가 지적했듯이 너나 나 같은 ‘잡종’들에게 선거는
약간의 딜레마를 안겨주는 게 사실이야. 우리의 정치적 선호는 어느 정당이나 정치인과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선거를 할 때는 경쟁하는 두, 세 후보 중에 한 명에 투표해야 하기 때문이지. 우리나라 만이 아니라 다른 선진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들이 점점 더 정치와 정부에 대해 냉소와 불신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야. 선거율의 하락은
일반적인 현상이고.
   

반면 정치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는 게 또 사실이지. 무엇보다 사람들의 고용이 더 불안정해지고,
빈부차가 확대되고, 생태계의 파괴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광의의 ‘정치적’ 과정 밖에는
없거든. 또 건전한 정치적 과정은 미덕과 상식을 유지시키며, 타협의 모델을 제공하며, 나와 내 이웃의 복지를 위한 사회적
연대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사람들이 목적하고 지향하는 것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할 수 있고.

물론 나도 정치적 참여가 선거를 위주로 한 대의민주주의 모델에서 더 확장되어서 다양한 참여민주주의의 형태를 띄는 것이
중요하고 생각해. 사실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불신은 사람들의 정치적 참여가 선거에만 몰려있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선거철이
지나고 ‘뽑아 놓고 나니 그 x이 그 x이다’는 후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물릴 수가 없잖아 ^^). 그래서 중요한
정책 결정에 지속적으로 시민의 숙의를 반영하는 ‘합의 회의’와 같은 모델이 확장될 필요가 있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아마 참여민주주의의 확장이 정치적 불신과 무관심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거야.

   
  그렇지만 지금 형태의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너는
아마 ‘지금과 같은 매스 미디어와 선거 동원의 시대에 내가 던진 한 표가 무슨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바로 너같은 한 표, 한 표가 모아져서 큰 민의를 이루는 것이잖아. 몇 표, 수십 표, 수백 표,
아마 몇 천 표도 당원을 사고, 동창회를 조직하고, 선전선동을 하고, 언론을 회유해서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몇 백만 표를 그렇게 할 수는 없거든. 유럽에서 선거와 의회제도가 처음으로 정착하던 시절에는 신분과 부에 따라 투표권이
차이가 있었잖아. 배운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부자나 빈자나, 귀족이나 노동자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산술적으로
평등하게 1인 1표를 가지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무척 힘든 싸움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이거든. 그 결과 투표권은 포기할
수는 있어도 사고 팔 수는 없잖아.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투표권을 포기할 수도 없도록 규정해 둔 (즉 권리가 아니라
의무로) 나라도 있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뚜렷하지 않니? 주주총회를 보면 투표권이 주식의 보유에 따라 다르지. 100주를
가진 사람과 1만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권력에서 100배 차이가 있잖아. 게다가 경제적 투표에서는 이 투표권을 매매해서
가진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도 가능하고. 결국 보편·평등 선거에 기초한 우리의 정치 제도는, 어떤 의미로는, 강자가
약자를 끊임없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약한 다수가 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을 제공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고 볼 수 있어.

너의 정치적 선택에 도움을 줄 몇 가지 얘기를 해 볼게. 대신 선택은 네 것이야. 남의 얘기를 듣는 것은 좋지만, 최종
결정은 네가 내려야 함을 명심할 것.

   

잡종은 차이와 다양성을 중시하고, 다양한 세상을 만드는 실천을 높이 산단다. 이를 정치적
판단과 잠깐 결부시켜 생각해 볼까? 다양성을 외치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싶은 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
바로 다양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지.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대로 못 살고 있다는 사실이야.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다양성은 정치경제적 평등과 밀접히 관련이
있단다. ‘평등은 모든 차이를 (즉 다양성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잘못 파악하면 다양성과 평등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평등한 상태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함으로써 결국 다양성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완벽한 평등이라는 이상만을 강조하다 보면 기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해칠 수도 있는 것 또한 사실이야. 결국 평등의
조건을 가로막는 권력과 부의 편향을 비판하고 극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등이라는 이상 자체가 화석화하고 권력화해서
현실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것도 극복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봐. “잡종적 다양성”은 이렇게 두개의 극단적
입장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가는 것이란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여기서 보듯이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고, 이론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실천이며, 현재형이라기 보다는 미래지향형이지. 네가 관심있는 여성정책, 교육정책, 환경정책, 남북정책 등에
주목하면서, 결국 어느 후보의 정책이 “잡종적 다양성”을 구현하는 데 더 가까운가를 살펴보렴.

   

잡종은 차이를 소중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차이를 만들어 내는 실천을 높이 평가하고
이에 동참하는 존재이기도 해. 우리의 주변에는 마치 공기처럼 매일 들이마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모르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옥죄는 문화적 코드들이 아직 많거든. 학벌이나 연줄이 아니라 실력과 독창성을 높이 사는 사회적 환경,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존중, 폭력과 차별에 대해 눈감지 않는 태도, 튀는 것과 다름에 대한 관용, 지속적인 대화와 의견 수렴을
존중하는 자세, 공정한 경쟁의 결과의 수용, 극단적인 주장에 현혹되지 않는 건강함, 사회적 정직함 등이 우리에게 바람직한
문화적 코드라고 봐. 장기적으로는 너의 작은 실천이 모아져서 이러한 건강한 문화적 코드를 정착시키는 데 불씨가 될 수
있겠지. 우선은 후보들의 공약을 잘 살펴보면서 누가 이러한 “잡종의 문화적 코드”를 정치적으로 구현하려고
하는 지 살펴보렴.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린 다음에, 신나게 투표소에 가서, 즐겁게 투표 해.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투표를 권하는 것 잊지
말고. 이것도 투표 만큼이나 중요한 정치적 참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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