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 우리의 자존감을 위협받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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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우리의 자존감은 왜 위협받는가

모두가 저마다의 입장에서 ‘감정노동의 피로감’을 호소하는 요즘, 인간관계에서 가장 다치기 쉬운 것이 바로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우리 사회의 노동환경이 바뀌기 시작한 때와 일치합니다.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비정규직이 폭증하고, ‘정규직’이라는 단어가 소수의 특권이 되어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끝없이 ‘누군가 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대적 빈곤’이 우리 사회의 커다란 화두가 되어가면서 자존감의 문제는 더 복잡한 사회문제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전보다 ‘절대적인 부’의 차원에서는 훨씬 큰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비칠지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비교’를 통한 자존감의 상실이 수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누군가 두 손을 모으고 있고, 손 위에 작은 나뭇잎이 자잘한 자갈과 함께 담겨 있다.

우리의 자존감이 위협받는 또 하나의 환경은 바로 매스미디어의 급증입니다. 예전 어린이들은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노래를 불렀지만, 지금은 인터넷에서 파워 블로거가 되거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등의 더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유명인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유명해진다는 것’은 곧 수많은 악플에 노출되고, 대중의 끝없는 질시의 시선 속에 내던져진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렸지요. 사람들은 그럼에도 주목받는 삶을 갈구합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끝없이 ‘스타가 되는 법’을 강습받는 현대인들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함께 학습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매스미디어의 화려한 스타 만들기 프로젝트들은 ‘저 사람은 저렇게 노래도 잘하고, 외모도 멋지고,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은데, 나는 왜 이렇게 평범할까’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오늘 내 삶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느낀 뒤에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보면서 ‘내 삶이 너무 하찮은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자존감에 상처를 받는 것일까요. 그리고 나의 존엄을 지키는 길, 그리고 타인의 존엄도 함께 지키는 길은 무엇일까요.

*편집자 주
1. <정여울의 관계학개론>은 독자 여러분이 보내주신 질문으로 그 내용이 구성됩니다. LG럽젠 페이스북을 통해 수시로 정여울 작가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받고 있으며, 질문을 해 주신 분들 중 추첨을 통해 선물도 드리고 있답니다. LG럽젠 페이스북을 늘 주목해 주세요!
2. 이 글에 채택된 질문들은 보다 많은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이나 개인적인 내용을 완화하여 수정/편집된 것임을 밝힙니다.
럽젠 Q 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소위 ‘악마의 편집’을 당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그 프로그램을 봤는데, 진실과 다르게 나온 일부 내용 때문에 그동안 잘 지내던 친구들이 저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저는 악마의 편집을 당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침해받은 기억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뒤로 사회생활에 트라우마가 생겨버렸습니다. 그때 스탭들은 저에게 잘해주는 척 하면서 다른 사람과 이간질을 시키고 저를 좋아하는 척 연기하면서 저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을 볼 때 예전처럼 순수하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인간관계에서 예전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정영모 님)

이런 사건은 꼭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한 두 번쯤은 그런 아픈 경험을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환경일수록 이런 상처에 노출될 위험은 커지지요. 나의 진실한 마음을 대다수의 타인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 나아가 나의 의도를 곡해한 잘못된 내용이 곧 나를 규정해버리는 심각한 상황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요. 저도 이런 경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상처에서 빠져나오는 데 거의 10년이 걸릴 정도로 아픈 경험이었지요.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예 폐허가 되어버려 어떤 씨앗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황량한 기분이 되곤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장 아픈 상처가 가장 커다란 구원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그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지요.

어떤 힘든 사건이 터졌을 때 내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마음은 아프지만, 그런 사람들과는 인연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터졌을 때마다, 저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제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일로 인해 우연히 새로운 인연을 만나 오랜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저는 생각해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었을까? 물론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내가 오해의 빌미를 나도 모르게 제공한 것은 없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린 셈이지요. ‘그 사람들이 잘못했어. 난 아무런 잘못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설사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됩니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은 없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 나를 오해하고 미워했던 사람들과 한 번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집단’이나 ‘프로젝트’에 속하게 될 때는, 개인의 자율성과 진심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순간, ‘대중성’이라는 기준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재단당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그 일을 꼭 하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강인한 마음가짐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누군가 회사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각종 조직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개인의 순수한 의도와 노력이 항상 왜곡당할 위험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수해야만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직이나 대다수의 결정을 무조건 따르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대다수의 횡포나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맞설 수 있는 나만의 자존감을 찾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내면작업’입니다. 외적으로 나를 가꾸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스스로 챙기는 자존감의 요새를 만드는 일. 그것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자신을 가장 기쁘게 만드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그리고 감정적으로 즐겁지는 않더라도 이성적으로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내면의 요새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자존감의 비밀스러운 방’이 나를 지켜줄 때가 많습니다. 저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단순한 일을 통해 마음이 아플 때마다 자존감을 얻곤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그 사람과 인연을 끊고서도 나는 괜찮을까. 그 사람에게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도 나는 잘해낼 수 있는가. 그 사람들이 없어도, 세상 모든 친구들이 내게 등을 돌려도,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하나하나 대답하다 보면,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희미한 미래의 설계도가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아픈 트라우마는 가장 큰 성장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럽젠 Q 갈수록 각박해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해가는 요즘, 나의 존엄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존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흐름과는 점점 멀어지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존엄. 어떻게 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요? (김정호 님)

정말 멋진 질문입니다. ‘나의 존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급증했지만, ‘상대방의 존엄도 나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요. 상대방의 존엄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사실 기본적인 인격의 문제를 넘어서서, 훈련과 학습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데는 열심이지만 ‘내가 어떤 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는가’를 고민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요. 얼마 전 저는 KTX 열차를 타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승객이 KTX 열차 앞에서 시간과 방향 등을 안내하는 여직원에게 무턱대고 반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어, 3호차 어느 쪽이야?” 저는 너무 기가 막혀 가던 길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반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여직원의 반응이 더욱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예, 손님. 저쪽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며 깍듯하게 오른 쪽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대접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처음이었다면 당황하는 빛이 조금이라도 드러났겠지요. 그녀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말을 던지며 하대하는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 순간을 재빨리 넘겨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마치 제 여동생이나 잘 아는 후배가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걸까요.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다른 곳에서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테지요. 서비스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상황들, 또는 이를 뛰어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한 백화점에서 저는 반가우면서도 가슴 아픈 팻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푸드코트에서 주문을 받는 여직원의 책상 위에 이런 팻말이 놓여 있습니다. ‘이분들은 저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주세요.’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제가 기억하기로 그 문장의 핵심은 ‘소중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신만의 이익과 감정을 생각하다 보면, 내 앞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각자의 ‘소중함’을 잊기 쉽지요. 아무리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의 분노나 갑갑함은 조금이나마 누그러지지 않을까요. ‘소중하다’는 말은 그 단어 자체에 엄청난 치유력이 있습니다. 나는 소중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소중합니다. 이 두 가지를 잊지 않는다면, ‘자존감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은 조금씩 치유되지 않을까요.

럽젠 Q 인간의 존엄성은 헌법 제10조에도 명시되어 있지요. 인간의 존엄성과 사형, 안락사 문제가 대두된지 오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 논의의 다양성이나 깊이가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현재 사형제도는 헌법재판관 찬성 4, 반대 5로 폐지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안락사에 대해서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수빈 님)

어떤 문제를 생각할 때 ‘폐지할 것이냐, 존속할 것이냐’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지요. 사형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형벌이 높아진다고 해서, 범죄율이 낮아지지 않는다’는 분석들입니다. 인간이 어떤 범죄를 저지를 때 ‘이 죄를 저지르면 내가 어떤 처벌을 받게 될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을 정도의 성찰이 가능하다면, 범죄율 자체가 낮아지겠지요. 하지만 범죄가 일어나는 끔찍한 순간들은 그런 성찰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형제도’라는 것 자체는 폐지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죄가 아무리 엄중하다 하더라도,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형을 집행할 때, 그 집행자의 인권 문제도 중요합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순간,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 또한 사형제도의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입니다. 진짜 문제는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형을 언도받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범죄가 이토록 자주 일어나는 사회’를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가 아닐까요. 이 문제는 이렇게 짧은 대화로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니, 저도 앞으로 계속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형을 암시하는 이미지. 나무 의자 하나가 놓여 있고 위에는 밧줄이 매달려 있다.

사형제도와 안락사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사형제도의 경우 ‘사회적 선택’이 더 중요한 문제라면 안락사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 훨씬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제도가 ‘죄인을 향한 피해자의 분노와 사회적인 처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면, 안락사의 문제는 ‘내 삶을 내가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하는 주체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안락사의 경우 의학의 윤리차원에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개인의 존엄과 인권의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 살고 있는 30대의 젊은 여성이 말기암의 고통이 너무 심해 가족들의 동의 아래 평화롭게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10년 전이라면 ‘평화롭게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표현은 불가능했겠지요. 하지만 이제 안락사의 문제는 아주 희귀하고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 언제든 나와 나의 가족들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평균수명은 폭발적으로 길어지고 있고, 생명연장을 위한 의학기술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진보하고 있으니까요.

웰빙의 열풍이 지나가고 이제는 웰 다잉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도 말들을 하지요.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웰빙과 웰다잉은 같은 문제입니다. 웰빙이 ‘살아있는 동안 행복해야 할 것’이라는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면, 웰다잉은 ‘평화롭게 죽어가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데요. 평소에 잘 존재해야만, 죽어가는 순간에도 평화롭게 삶을 끝맺을 수 있겠지요. 웰빙이 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담론이었다면, 웰다잉은 ‘어떻게 나의 존엄을 죽을 때까지 지켜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에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사회적 화두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발전했을 때 제기되는 문제이지요. 웰다잉을 생각하는 사회는 분명 이전보다는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한 것이겠지요. 웰빙이 밥상문화나 인테리어 같은 물질적인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었다면, 웰다잉은 ‘어떤 생각을 하며, 누구와 함께,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하는 보다 정신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죽음을 원합니다. 하루, 한 달, 일 년을 더 살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미소지을 수 있는 따스한 시간을 원합니다. 제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한 시간 속에서 행복을 느낄 때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인데요.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은 생각보다 일찍 올 수도 있지요. 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죽는 날까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건강함과 사리분별력을 지닐 수 없다면, 그때는 진정으로 ‘웰 다잉’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마지노선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할 때조차도 ‘웰 다잉’을 생각하는 삶이 진정한 ‘웰빙’이라는 점입니다. 지치고 힘들고 ‘여기가 끝이다’ 싶을 때 뒤늦게 웰다잉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처럼 ‘아직 시간이 많다’고 여길 때부터 늘 ‘웰 다잉’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향기롭게 빛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럽젠 Q 선임과 후임의 관계에서 심한 차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선임이고 나는 후임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을 볼 때, 저의 존엄이 침해당했다고 느낍니다. 선임이 잘못을 해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의 잘못을 후임에게 전가하고 그것을 은폐하려는 행위들을 볼 때, 심각한 자존감의 위협을 느낍니다.(이한경 님)

한국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문화가 바로 ‘나이’와 ‘경험’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군대뿐만이 아니라 직장, 학교, 병원, 은행,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선임자가 후임자를 차별하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문화’로 굳어져 있습니다. 심각한 악습이죠. 그런데 저는 살아가면서 그런 악습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후임자에게도 절대 텃세를 부리지 않고, 처음부터 친절하고 따스하게 감싸주는 사람들. 상대방의 나이나 성별, 직업이나 재산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완전히 똑같은 태도로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들. 선임자나 권력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감하게 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 실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늘 조직생활에서 좌충우돌하고, 심각한 대인기피증도 겪어보았지만, 지금까지 제한적이나마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분들의 따스한 배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그렇게 용기 있고, 소신 있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들은 그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대부분 그들의 능력과 인품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한 채 한직을 떠돌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요. 사회생활의 이런 비정한 측면 때문에 젊은이들은 ‘출세하려면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편향에 물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요새 ‘소시오패스’라는 말이 자주 이슈화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측면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이코패스가 주로 심각한 범죄와 연관된 문제라면, 소시오패스는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이지요. 문제는 현대사회가 ‘소시오패스를 양산하는 사회’로 흘러갈 위험이 높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출세가 자신의 모든 결점을 한꺼번에 덮어주는 황금열쇠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소시오패스는 급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달만을 철저히 챙기고, 타인의 인격은 철저히 무시하는 소시오패스가 급증할수록, ‘오직 착하고 순수하다는 이유만으로 존엄을 빼앗기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에겐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후임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선임이라는 이유로 모든 공과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후임의 재능까지 착취하는 사람들은 소시오패스의 성향이 다분한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그들이 아직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뉘우칠 시간이 남아있을 때, 그들이 더욱 타락하기 전에 그들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 윤리적 제동장치가 필요합니다.

드라마 〈미생〉 메인 포스터. 등장인물들이 일렬로 서 있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 〈미생〉.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겨나는, 나의 존엄성에 대해 고민할 만한 순간을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 드라마 〈미생〉 홈페이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고민될 때가 ‘잘못된 것을 말해야 하나, 그냥 침묵해야 하나’ 하는 순간이지요. 저도 때로는 결과가 무서워서,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이 두려워서,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더욱 나쁜 쪽으로 흘러가더군요. 지금은 아주 조금씩이라도, 조금은 소심한 모습이더라도, ‘아닌 건 아니다!’라고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저의 경험에 비춰보면 ‘아닌 건 아니다’라고 표현했을 때의 결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상대방은 당황하기도 하고, 저를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황 자체는 나아졌습니다. 상대방은 저의 솔직한 의견 제시와 비판에 순간적으로 불쾌감을 느끼더라도, 서로 그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상의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결과, 오히려 사이가 좋아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침묵하고, 회피하고, 연기하려고 하면, 관계는 지속되는 듯 보이지만 상황은 훨씬 나빠졌고, 결국은 그 때문에 관계조차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한 번에’ 칠 수는 없지만, 계란이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게다가 여러 개가 한꺼번에 계속 떨어진다면, 바위도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존엄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혼자만 고민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그 아픔을 함께 나누기 시작해야 합니다. 함께 나누고, 함께 슬퍼하는 과정에서, 연대의 힘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완전히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정의와 존엄과 자유라는 가장 소중한 가치들마저 떠나보내서는 안됩니다. 내가 정의와 존엄과 자유를 내 편으로 만들면, 나는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 많은 타인들과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정의와 존엄과 자유, 그리고 한 사람을 향한 개인적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더 큰 사랑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 절실한 때입니다.

Writer | 정여울
작가.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시네필 다이어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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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에 대한 존엄성이 점점 없어져 가는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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