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유일한 관계를 위하여

우정,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한 관계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조국도, 친척도, 심지어 이웃도 선택할 수 없다. 직장상사나 학교 선배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 직장이나 학교를 선택할 때 그 모든 인간관계까지 함께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연인이나 부부도, 합리적인 선택의 대상은 아니다. 사랑은 이성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불가해한 빠져듦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에 휘말려 결혼을 결정하곤 한다. 반면 우정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간관계이다. 우정은 이성과 감성의 복합체다. ‘저 친구는 나와 참 잘 맞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판단이고, ‘저 친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을 잡아끌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감성의 끌림이다. 친구는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인간관계가 아닐까. 처음에는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성실한 노력으로 지속되는 관계, 그것이 우정일 것이다.

영화 ‘언터쳐블’ 속 한 장면. 휠체어를 탄 한 남자, 그리고 그 휠체어를 끌고 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유쾌하게 웃고 있다.
영화 <언터처블: 1%의 우정> 속 필립과 드리스. 이들은 서로 너무 다르지만, 바로 그 점에 끌린다. (이미지 출처 : 영화 <언터쳐블: 1%의 우정> 스틸컷)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정은 지키기가 어렵다. 사랑처럼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도 않고, 절교를 하더라도 어떤 도덕적인 제재도 없다. 그 무엇에도 억압되지 않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지키기 어려운 관계가 바로 우정이다. 어릴 때는 관포지교나 지란지교 같은 우정에 대한 멋들어진 고사성어를 믿었다. 친구의 모든 단점과 실수와 실패와 슬픔까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친구,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려도 나만은 그를 다독이고 보듬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우정을 지속하는 일은 상상을 초월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하고, 이해하고, 그리워했던 만큼, 아니 그 절반이라도 그 친구가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실연에 못지않은 상처가 가슴 속에 아로새겨졌다. 특히 오늘날처럼 이사와 유학과 이직과 이민이 많아진 시대에는, 거주지가 바뀔 때마다, 삶의 행동반경이 바뀔 때마다 친구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트콤 <프렌즈>를 보며 가장 부러웠던 것이 무려 6명의 베스트 프렌드가 서로 아옹다옹하면서도 끝까지 우정을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한 명의 베스트 프렌드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에게 가장 깊은 후회를 남긴 인간관계도 바로 우정이다. 때로는 ‘그것이 내 유일한 최선’이라 느껴질 정도로 노력했지만, 지나고 보면 ‘내 마음이 너무 좁았다’는 후회를 남기는 관계. 애인과는 분명한 결별의 의식이 필요하지만, 우정은 꼭 그렇지 않다. 그저 조금씩 멀어지게 된다. 특별한 절교의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조금씩 연락이, 마음이, 인연이 멀어지게 되는 과정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 친구를 만나도 더 이상 예전처럼 신나지 않고, 더 이상 예전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매일 만나던 짝꿍을,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방학 때 서로 보고 싶다며 절절한 편지까지 쓰던 친구들을, 이제는 거의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가끔씩 연락하는 친구들은 있지만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는 극소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믿는다. 우정은 인간을 가장 덜 억압하는 관계라는 것을. 부모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선택하는 관계. 가족이나 의식주처럼 ‘그것이 없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없어도 외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누가 뭐래도 꼭 갖고 싶은 자발적인 관계, 그것이 우정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사랑에 실패해도, 일에 실패해도, 가족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어도, 내가 노크를 하고 싶은 곳은 바로 그 누구의 집도 아닌 친구의 집 창문이기 때문이다.

‘친구 같은’과 ‘친구’의 차이

친구 같은 아빠, 친구 같은 엄마, 친구 같은 스승.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관계상이 되었다. 예의와 규율을 강조하는 수직적인 관계보다 친구처럼 평등하게 서로를 대하고, 장난도 칠 수 있는 그런 인간관계가 각광 받는 시대다. 그런데 막상 ‘친구 같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아직 가치관이 무르익지 않은 아이들에게 ‘친구 같은 부모’는 위험할 수 있다. 친구처럼 재미있게 놀아주고, 깍듯한 존댓말이 아닌 캐주얼한 반말로 이야기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아이들은 협상 불가능한 것을 협상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 친구 같은 부모를 지향하다 보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과 ‘해도 되는 것’ 사이의 경계를 엄격하게 정돈해주는 것이 어려워진다.

친구 같은 부모이기 때문에 더 편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친구 같기 때문에 자칫 만만한 부모가 되어버릴 수 있다. 부모들은 아이가 ‘아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지만, 아이들은 ‘어른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견뎌야 하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 부모 자식 사이는 ‘친구 같은 한때’를 보낼 수는 있지만, 진짜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관계인 것이다. 아이에게는 사랑과 후원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 되는지’에 대한 엄격한 규율과 윤리적 감각이 필요하다. 친구처럼 만만한 부모는 바로 그 윤리적 감각을 길러주는 데 무력하기 일쑤다. 아이에게 멋져 보이고 싶고, 착해 보이고 싶고, 친절해 보이기 위해 ‘엄격한 부모’가 될 수 없는 경우가 속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친구 같은’이라는 말은 ‘다정한, 친밀한’과 유사한 것이지 정말로 ‘친구와 똑같은’이라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진짜 친구라면 의식주를 모두 챙겨줄 수 없고, 교육비를 대 줄 수도 없으며, 시집 장가를 보내줄 수도 없다. 친구는 그렇게 커다란 빚을 지는 관계가 아니다. 그렇게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가없는 은혜를 빚지는 관계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친구라면 어떤 의미에서든 빚을 지지 말아야 한다. 대등한 차원에서 소통할 수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친 연민을 느끼지 않아야 우정을 오래 지속할 수 있다. 친구의 정의는 단지 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친구가 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오래 된 좋은 친구의 모습들은 한결 같다.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가장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지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관계. 어려움이 있을 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해도 다만 곁에 있어주는 관계.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을 때조차도 부담 없이 내 아픔을 털어놓아도 좋은 그런 관계. 실질적인 도움이 아니라 ‘다만 내 곁에 있어줌’으로써 모든 아픔을 씻어주는 존재. 친구는 그런 존재다.

영화 ‘써니’ 속 한 장면. 흰 셔츠에 청바지를 맞춰 입은 일곱 명의 소녀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듯 손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옆에 있을 때, 아니,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은 것이 친구인 법. (이미지 출처 : 영화 <써니> 스틸컷)

우리에겐 더 많은 친구들, 그러나 더 깊은 사귐이 필요하다

베스트 프렌드, 소울메이트, 죽마고우, 지음(知音)의 벗.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아주는 친구를 가리키는 말들은 많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완벽한 친구를 찾기도 어렵고, 그런 친구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내가 그러고 싶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도 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지만, 상대방은 프라이버시를 더 소중히 생각할 수도 있다. 완벽한 연애의 정답을 찾을 수 없듯이, 우정도 ‘완전한 이상향’보다는 ‘순간의 소통’을 중시하는 것이 아름답다. 친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것은 좋지만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한 채권자와 채무자가 되는 것이다. 친구는 문제 해결의 힌트나 실마리를 던져줄 수는 있지만, 직접적인 해결사가 되려고 하면 서로가 부담을 느끼게 된다. 친구 사이에도 서로를 가장 아름다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20대까지는 친밀한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는 어른들의 진지한 조언을 거부했다. 내가 너일 수가 있고, 네가 나일 수도 있는 것이 진정한 친밀함의 요건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구분조차도 모호해지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이었다. 오히려 친구의 ‘너다움’을 지켜주는 것, 나의 ‘나다움’을 지켜주는 것이 더욱 성숙한 우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미 여러 번 친구들과 상처를 주고받은 후였다. ‘너는 나처럼 생각할 거야’라는 낭만적인 환상 때문에, ‘나도 너처럼 생각할 수 있어’라는 치기 어린 환상 때문에 여러 번 서로의 마음을 오해하고 그럼으로써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 후에야 나는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너를 깊이 아끼고 사랑해도, 너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음을. 내가 배려라 믿었던 것이 너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싸우기 직전 갈등이 고조된 모습이다.
우리는 때로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서로를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이미지 출처 : 영화 <파수꾼> 스틸컷)

나는 철없이 지껄인 농담 때문에 친구를 잃은 적도 있고, 친구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친구를 잃어버린 적도 있으며, 내가 그녀를 걱정하는 것만큼 그녀가 나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친구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실수와 어리석음이 내게는 ‘내가 미처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상처받는 사람인지를, 그리하여 내가 극복해야 할 나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아프게 깨닫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가족이나 애인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것을 친구에게 털어놓은 후 위로받은 적도 많고,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울과 비참을 그저 친구와 밤새도록 수다를 떨면서 치유해본 적도 있다. 내가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살아가는 데 가장 커다란 영감을 주고, 응원이 되어주는 것도 친구들의 조언 덕분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 선생님은 평생 100권이 넘는 책을 내셨고, 한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평생을 인정받으며 사셨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100권의 책을 내는 대신 친구를 한 명이라도 더 사귀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자신의 일에서는 늘 최고였지만, 늘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아픔을 껴안고 평생을 견뎌오셨을 선생님의 고독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다. 100권의 책을 내는 것보다도 한 사람의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100권의 책은 위대한 업적은 될 수 있지만 가장 힘들고 외로운 날 소주 한 잔 함께 기울일 수 있는 친구는 되어줄 수 없다.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깊은 우정을 지속하는 것이다. 니체는 친구를 사귀는 일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벗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그 벗을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그 친구와 적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한 친구를 사귀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한 적이 있는가.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그의 철천지원수가 될 위험까지 무릅쓴 적이 있던가.

친구는 때로는 나에 대해 나보다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영혼의 거울이 되어준다. 때로는 친구야말로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 있다. 가장 가까이 있기에 더욱 질투하고, 더욱 많이 오해하는 관계로 변질될 수도 있다. 친구에게서 받는 상처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 받는 상처보다 더 크고 깊다. 모두가 ‘친구의 필요성’에 대해 알고 있지만,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임을 일깨워주는 이들은 드물다. 친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더 멋진 삶을 사는 것. 친구가 나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더라도, 그에게 빛나는 영감을 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내가 직접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내 친구가 가장 원하는 길임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제는 저 머나먼 곳에서 멋진 친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기쁘게 내려놓는다. 내게는 이미 그런 친구가 있다. 내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을 뿐.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 이미 소중했던 바로 그 친구를 위해 오늘도 더 멋진 삶을 살아내고 싶다.

Writer | 정여울
작가.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시네필 다이어리> 등이 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emoticon

스티커 댓글

스티커를 사용해서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달기
  • 감동
  • 부들부들
  • 눈물
  • 두근두근
  • 좋아요
  • 사랑해요
  • 멋짐
  • 하하
  • 신남
  • 행복
  • 멘붕
  • 헉
  • 시무룩
  • 하이파이브
  • 응원
  • 쓰담쓰담
  • 뽀뽀
  • 박수
  • 선물하기
  • 고마워
  • 귀여워
  • 셀카
  • 저요
  • 열공
  • 쓰러짐
  • 씻기
  • 팩

소챌 스토리 더보기

대학생 집콕러를 위한 월간 소비

편지가게 글월, 마지막으로 편지를 받은 게 언제예요?

비전공자를 위한 교양서

비전공자를 위한 전공자의 교양서 큐레이션

일본어 번역가 강민하 | 마음까지 전하는 번역

VEGAN ESSAY 의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입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식생활 실전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먹고 있습니다

VEGAN ESSAY 입문편ㅣ스물 한 살의 비건인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12년, 빙의하고 싶은 영화 속 주인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