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을 주는 사람, 배움을 얻는 사람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별로 인기 없는 선생님에게 오히려 열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의 표정에는 왠지 모르게 은밀한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난 다른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생님들에겐 관심 없어. 잘 생기고, 옷 잘 입고, 멋있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만 특별한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남들에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바로 그 선생님을 나는 좋아해.’ 바로 이런 ‘나에게만 특별한 선생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의 비밀이었던 것 같다. 내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왠지 소외된 분 같았지만, 조직생활은 물론 남들에게 잘 보이는 데는 전혀 관심 없고 오로지 문학만을 신주단지처럼 돌보고 가꾸는 그 선생님의 수업시간이야말로 고교시절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평가하는 아이들’이야말로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이었다. 누군 수학을 잘 가르쳐서 좋고, 누구 수업을 들으면 영어 점수가 올라간다는 식의 갑론을박이 나는 싫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내 머릿속에는 ‘공부는 결국 혼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었고, ‘선생님이 못 가르쳐서 내가 공부를 못한다’는 생각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게 진정 좋은 선생님은 ‘내게 멋진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영감inspiration을 주는 사람’에 가까웠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나만의 기준으로 선생님의 ‘됨됨이’를 평가하고 있었던 셈이다. ‘잘 가르치고 못 가르치는 것’, 즉 사람을 마음씀씀이나 인격이 아닌 기능이나 효율성으로 평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메멘토, 2014)을 읽으며 나는 나를 감동시켰던 평생의 멘토들을 되돌아 보았다. 거대한 시스템으로 조종되는 사회, 개인의 자율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 ‘나와 너’의 직접적인 관계, 그러니까 온라인이 아닌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대화하고 눈빛을 바라보며 가꾸는 작은 공동체의 소중함을 그린 이 책에는 사제관계의 이상향도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사제관계의 핵심은 여기에 있어요. ‘이 선생님의 훌륭한 점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야.’라는 행복한 착각. 그것 때문에 존경의 마음이 생기고 배움이 가동해요.” “조직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세상의 평가가 낮은 선생에 대해 ‘도대체 왜 세상은 왜 저 선생님을 못 알아보는 거야? 내가 보기엔 꽤 훌륭한데 말이야!’ 하는 식으로 학생은 더욱 진지해지는 법이지요.” ‘나만이 저 선생님의 훌륭함을 알아’라고 생각하는 그 학생이 그분의 훌륭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 선생님께 배운 본인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멘토의 위대함을 진정한 사제관계의 시작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둘 사이의 교감이 일어나는 순간은 멘티 스스로가 멘토의 훌륭함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즉 아름다운 멘토-멘티 관계의 시작을 위한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멘티, 배우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이 통찰과 지혜가 가득 담긴 수업을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받아들이는 이에게 절실함이 없다면, 멘토와 멘티의 교감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영화 ‘굿윌헌팅’의 한 장면. 나이든 남자와 젊은 남자 한 명이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서로를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굿 윌 헌팅>

멘토를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평생 멘토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멘토를 ‘성공한 사람’으로 한정하는 문화도 멘토 찾아 삼만리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소다. 중요한 것은 배움 자체이지 멘토의 스펙이나 성공이 아니다. 요새 ‘공토’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공부하는 토요일’, 그러니까 직장이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바쁜 현대인들이 토요일을 활용해 인문학을 비롯한 각종 배움의 길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은 자기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멘토를 발견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열심히 배우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20대’가 부럽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많은 책임과 의무가 면제되고, 배움 그 자체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는, 인생에서 가장 짧고 찬란한 시기. 이때는 멘티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 수업을 듣는 스무 살 새내기들에게 “여러분들은 365일 인문학을 배울 자유가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행복한 건데요.”라고 말하니 아이들이 피식 웃는다. 수십만 권의 책을 매일 공짜로 볼 수 있는 멋진 도서관과 훌륭한 선생님들,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연이 바로 옆에 항시대기 중인데도, 아이들은 아직 그 ‘배울 수 있는 기회’의 소중함을 모른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 삶을 둘러싼 축복을 받아들일 수도, 누릴 수도 없게 되지 않을까. 바쁜 직장인들은 황금 같은 주말 시간을 간신히 쪼개 인문학을 배우려고 하는데, 막상 365일 인문학에 몰입해도 모자랄 대학생들은 그저 토익 공부와 스펙 쌓기에 골몰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멘토의 절대적인 훌륭함만이 아니라, ‘배움’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존중이다. 배움이라는 것이 내 안의 자만심을 씻어내고, 자신의 한계를 진심으로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때, 아주 평범한 사람조차도 우리 자신에게 멋진 멘토가 될 수 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주변에서 멘토를 지금 당장 찾을 수 없다면 일단은 좋은 책을 읽자. 아무리 인생 2모작, 3모작 시대라고들 하지만, ‘인생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우리는 오직 1인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독서를 이렇게 정의했다. 다른 사람이 힘들게 얻어낸 것을 가장 쉽게 얻어내는 방법, 그것이 독서라고. 저자가 온힘을 기울여 만든 하나의 작은 소우주를, 우리는 하루 저녁이면 쉽게 얻어낼 수가 있다. 독서라는 지극히 사소한 행위를 통해 타인의 인생이라는 최고의 멘토를 오직 책 한 권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셈이다.

멘토를 사람에게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자연이야말로 인간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살아있는 멘토다. 주인을 향해 헌신적인 사랑을 아끼지 않는 반려견 또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깨우치는 멘토가 될 수 있다. 멘토의 훌륭함보다도 멘티의 절실함이 관계를 바꾸기도 한다. 가르치려고 애쓰는 사람의 열정도 소중하지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의 절실함이 없으면 어떤 참스승도 자신의 가르침을 펼쳐낼 수 없다. 삶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내 마음이 멘토의 훌륭함을 결정한다. 얼마나 절박하게 자기 삶의 화두를 던지고 있는지, 얼마나 겸허하게 남녀노소가리지 않고 멘토를 찾으려고 하는지가 중요하다. 심지어 움직이지도 않고 말조차 없는 사물과 미물에게서도 가르침의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사람이 어디서든 멘토를 찾아낼 수 있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영감을 주는 사람이 다를 수도 있다. 늘 성실하게 무언가를 열심히 가르침으로써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을 주지만 창조적 영감은 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 눈부시게 반짝이는 영감을 불어넣는 사람도 있다. 가르침이 지식의 문제라면 영감은 감수성의 문제다. 그 모든 주고받음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태도다. 아무리 멋진 지식을 전달해도, 아무리 반짝이는 영감을 불어넣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심드렁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시니컬하면 그 모든 메시지가 허공에 흩어져버리고 만다. ‘저 사람에게는 별로 배울 것이 없어’, ‘저 사람이 과연 나보다 잘 났을까?’, ‘저 사람의 명성은 모래성처럼 허약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야말로 사람들을 열정적인 멘티가 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오만과 편견의 덫이다.

진짜 멘토는 위험하지 않은 곳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모험을 하지 말라고, 실수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모험의 가치를 알려주는 사람, 지금 힘든 것이 나중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암시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멘토가 아닐까. 심지어 니체는 최고의 멘토를 악랄한 적(敵)에게서 찾았다. 적이야말로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늘 깨어 있게 하는 최고의 스승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멘토는 친절하지 않다. 따스함도 미덕이지만, 그 달콤한 미덕만으로는 우리를 가장 힘겹게 다그치는 최후의 장애물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정함과 친절함과 위로만으로는 통과의례의 가장 어려운 장애물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서 위대한 멘토의 싹을 발견하기도 한다. 얼마 전 내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 때문에 한 달 넘게 머리를 싸매고 가슴앓이를 하던 중이었다. 친구한테 물어보기도 부담스럽고, 선배에게 물어보자니 부끄럽고. 한 마디로 지나치게 꼿꼿한 내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상의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다. 나는 고민 상담을 한다기보다는 그저 푸념하는 기분으로 막내 동생에게 내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것도 서로가 너무 바빠 문자메시지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때 거의 ‘이젠 될 대로 되라’하는 심정으로 털어놓은 것이었는데, 동생은 놀랍게도 지혜로운 해법을 제시했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현재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기 싫고 오직 내 생각대로 하고 싶다’는 것, 그러니까 도저히 남의 말을 따르기 싫은 내 마음 상태였는데, 그 당시에는 그 문제가 내 신념의 문제이기도 했다. 남의 말을 따르는 것이 내 오랜 신념을 저버리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동생은 놀랍게도 ‘그 사람들이 옳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더 커다란 ‘나의 편’이 될 수도 있음을 일깨워준 것이다. 그리고 동생에게 내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오랜 고질병이었던 내 자신의 문제도 환히 보였다. ‘진짜 나의 편’이라고 믿는 사람의 말에만 간신히 귀를 기울이는 내 편협함이야말로 내가 ‘좋은 멘티’가 되는 데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서, 내 눈에는 아직 어린 애 같은 귀여운 막내동생에게서, 내 생애 최고의 멘토를 발견했다.

Writer | 정여울
작가.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시네필 다이어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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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다른 관점으로 쓴 글! 매 문단마다 적어두고 싶은 구절이 많았습니다. 전 이메일로 항해중인 항해사분이랑 계속 글을 주고 받는 데, 그 때 느낀 몇가지 느낌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공감이 더욱 진해졌습니다. 기회가 되면 작가분이랑도 더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 좋은 멘토나 멘티를 만나려 하기 전에 스스로가 준비된 멘토멘티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는 말 같아요~! 평소 제 태도에 대해서 반성해보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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