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화 | 배우가 되고 싶은 배우

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 조국을 위해 죽는 것
이것이 참된 영광이니 나 기꺼이 받아들이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저들의 거짓과 야욕에 속지 마시고
그들의 위선과 우리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주시오!

– 뮤지컬 <영웅>의 ‘누가 죄인인가’ 中

약속보다 이른 시간, 저 멀리서 강건한 풍모를 지닌 한 남자가 다가온다. 가볍게 주고 받은 악수. 그가 웃었고 이내 입을 열었다. 찰나의 움직임 하나하나, 그의 이름이 느껴진다. 개그맨이 아닌, ‘배우’ 정성화가.

사진_정성화 제공
사진_유다솜/제19기 학생기자(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뮤지컬 '영웅'의 무대 위에서 공연중인 정성화의 모습. 덥수룩한 머리와 콧수염, 벽돌로 된 벽 앞에 회색 재킷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보아 감옥에 수감중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옆에는 책상 하나와 그 책상 위에서 책을 보는 검은 제복의 일본 순사가 보인다.

성실함은 의외로 날카로운 법이다

개그맨으로서 그의 첫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가늘었다. 잠시 반짝했다 금새 조기종영해 버린 TV 속 한 프로그램처럼, 그 역시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손을 뻗어준 것은 다름아닌 그의 생애 첫 드라마였던 <카이스트>. 마치 나비효과처럼, 연기와의 우연한 만남은 그의 인생 자체를 뒤바꿔 놓았다.

“<카이스트> 이후로 시트콤이나 아침드라마에 줄줄이 섭외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잘 되는가 싶었지만, 뭔가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죠. 저에겐 어색했던 거예요. 그러다 우연찮게 <아이 러브 유>라는 뮤지컬을 하게 됐어요. 무대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더라고요. 굉장히 새로웠죠. 무엇보다 저를 바라보는 선입견을 제 스스로가 잘 넘어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거든요.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뮤지컬을 하기로 마음 먹게 됐죠”

정성화의 뮤지컬 작품 속에서의 모습들. 왼쪽 사진은 '아이 러뷰 유'의 한 장면으로, 정성화는 요리사복을 입고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레미제라블'로, 십자가가 걸린 교회 건물의 그림자와 함께 홀로 무대 위에서 노래부르고 있는 그의 모습이다.

파도 위 풍랑을 만나 어느 섬에 도착한 배처럼, 그리고 그곳이 자기가 살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덧 그는 자연스레 뮤지컬 배우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뮤지컬은 그에게 있어 숙명이자 운명과도 같았다고.

“뮤지컬 <아이 러브 유>에서 남경주 선배님을 만나게 됐어요. 제가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계속 옆에서 도와주고 동기부여를 해주셨어요. 은인과도 같은 참 고마운 분이시죠. 선배님을 따라서 연기 관련 서적이나 인문학 책들을 보면서 다시 이론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의 습관이 좋은 버릇으로 남아있어서 지금도 가끔 책을 찾아보며 연기를 공부합니다.”

개그맨 시절 막내 생활을 오래했던 탓인지, 그는 여전히 남들보다 연습실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가장 늦게 떠난다고 한다. 연습벌레로 유명한 배우 조승우도 그를 보고 혀를 내둘렀을 만큼, 그는 자기 자신을 지독히 단련시킨다. 데뷔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지금도 그는 몸이 아프건 아프지 않건 연습실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맞이한다. 이러한 산고의 고통이 마치 그를 원점으로 되돌려주어 다시금 초심을 다잡게 만들어 준다고 그는 말한다. 마치 처음 개그맨을 시작했을 당시, 설렘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19년 전의 정성화로 말이다.

정성화식 오래 달리기

2009년 뮤지컬 <영웅>을 시작으로 <맨 오브 라만차>, <레미제라블>, <라카지> 등 굵직한 작품들을 통해 그는 뮤지컬계 톱스타로 자신의 독보적 위치를 대중들 앞에 당당히 증명해 왔다. 2013년 한국 뮤지컬 대상에서 남우주연상 수상을 포함해 그는 작년 한 해 동안 뮤지컬 시상식에서만 무려 3관왕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이 무수한 영광을 얻기까지, 그의 과거는 어땠을까.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사실 뮤지컬 배우를 하며 드라마틱하게 힘든 적은 없었어요. 정말 너무 행복하게 배우생활을 해왔거든요. 하지만 이것이 순탄하게만 성장해왔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에요. 이제야 조금 사람들한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래도 예전에 긴 무명생활을 겪어서 그런지, 그때 받은 조금씩의 설움들이 나름의 절실함으로 나타나서 뮤지컬 배우로서 더욱 매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스스로를 ‘무대쟁이’라고 자랑스레 칭했다. 온몸을 휘감는 관객의 갈채소리, 그 맛에 이미 중독된 지 오래이기에 그는 절대 무대를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뮤지컬은 곧 정성화이며, 정성화는 곧 뮤지컬과도 같은 것이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당시 정성화가 촬영한 프로필 사진. 꽃무늬의 풍성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둘러쓴, 짙은 화장을 하고 손동작마저 여성스럽게 단장한 그가 보인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지구로 보았을 때, 뮤지컬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라고 생각해요. 대기가 있어서 지구는 파랗게 보이는 거잖아요. 뮤지컬 역시 나를 파랗게 해주는 것 같아요. 마치, 정성화라는 취약한 인간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방패막이자, 보호막과 같은 존재처럼요.”

배우가 아닌 인간 정성화는 어떠한 모습일까. 이 물음에 그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때론 남의 손에 이끌려 살기도 한다’고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그러나 작품을 선택할 때만큼은 철저히 까다로운 배우가 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오로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닌 대중을 위해 그는 어떠한 배우로 각인되고 싶을까. 최고의 전성기, 그 한 가운데에 서있는 그에게 물었다.

“자기 할 일 잘 하고 있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배우는 철저히 배우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우가 사회적인 운동가도, 정치나 경제에 심도 있게 관여하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배우는 그냥 배우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배우의 본분을 지키는 것, 그저 연기로 보여드리는 것이야말로 단순하고도 진정한 배우의 길이 아닐까요.”

그는 뮤지컬 외에 또 다른 도전은 해볼 수 있겠지만 배우라는 본질을 버리진 않을 것 같다고 덧붙여 말했다. ‘배우’라는 이름의 끝없는 직선 위를 걷는, 정성화의 인생에 있어서 만큼은 말이다.

세상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다

그의 30대는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운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그 찬란함을 뒤로 한, 그의 새 목표는 무엇일까. 처음 배우로서의 단추를 꿰맸던 당시의 목표와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12년 전에는 제가 이렇게 배우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제가 정말 죽을 때까지 뮤지컬 배우를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게 된 계기는 <맨 오브 라만차>라는 작품을 하고 나서부터였죠. 그 때 ‘아,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구나. 이제 진짜 뭘 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됐었으니까요.”

배우 정성화가 어느 테이블 앞에 앉아 흰 종이 위에 사인을 하고 있다. 그의 손이 클로즈업되어 보인다.
그는 원대하거나 심오한 꿈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저 지금처럼만 행복하게 배우로 일하다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에선 소박하게 보일 수 있는 그의 소망이겠으나, 이것이 그가 향하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꿈의 위치다. 그는 동시에 ‘현재’란 단어를 되풀이했다. 조금은 진부할 수도 있는, 그러나 뼈가 담겨있는 듯한 ‘현재’에 몰입하라는 그의 또렷한 목소리에는 미래에 대한 조금의 두려움도 담겨있지 않는 듯 했다.

“나중에 뭘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지 마시고 뭘 하든 좋으니까 현재 하고 계시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지금 비행을 하고 계시다면 철저히 비행을 하시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해도 그것을 할 때만큼은 집중해서 하세요. 현재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만 안 하시면 돼요. 그것이 자기의 미래를 돌보는 유일한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애초에 설정했던 방향점이 어쩌면 엇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고, 일에 대한 집중력은 그 다음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또한 그는 미래를 염두에 둘 뿐 미래만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했다. 두 발이 서있는 공간 위, 열정을 쏟는데 온전히 시간을 소비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장 높고 안전한 위치에 도달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유한한 시간 속 무한한 가능성을 솎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재의 정성화를 만든 과거였고, 미래의 정성화를 만들 현재다.

정성화의 싸인. 'To. LoveGen. 진짜로 행복한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세요! 행복한 여러분의 현재를 위하여!'라는 문구와 함께 그의 사인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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