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두 번째 이야기

언제라도 힘들고 지칠 때면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만보다 그만 눈물이 떨어졌네
고맙다는 말 그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꽃다지의 노래, <전화카드 한 장> 중에서

럽젠 Q 사랑에조차 권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절망합니다. 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어쩔 수없이 약자가 되는 걸까요? 저는 ‘밀당’을 전혀 못합니다. ‘선수’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혐오스럽기도 합니다. 선수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바보처럼 빠져들기도 하지요. 사랑은 진정 승자독식의 권력 게임일까요?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20대 초반의 저 자신에게 돌아가 가장 들려주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은 권력 게임이 맞지만, 그 권력 게임은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권력이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약한 쪽에서도 강한 쪽으로 흘러가며,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의 방향성이 아니라 그 권력의 흐름이 두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길고 깊게 바라보는 눈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관계든 힘이 흘러가는 방향이 있지요. 그것을 권력이라기 표현해버리면 너무 일방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힘이라는 것은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예컨대 더 많이 배려하는 사람의 힘이 상대방에게 흘러가면, 그 배려를 또 다른 감사의 힘으로 따뜻하게 반사하는 상대방의 힘도 따라오게 되지요. 힘의 주도권이 문제가 아니라 힘의 주고받음이 문제입니다.

힘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촛불처럼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전방위로 환하게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에 거짓이 없다면 그 마음의 힘은 끝내 그 사랑이 실패하더라도 당신에게 이로운 에너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사랑에서 가장 결핍된 것이 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정은 참 철지난 단어, 촌스러운 단어처럼 들리지요. 하지만 여전히 순정은 모든 사랑의 가장 절실한 본질입니다. 우리 시대의 연애가 상대방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기술’로 전락해버렸다면 순정은 ‘연애’가 아닌 ‘사랑’에 필요한 마음의 구성성분이지요. 순정도 권력입니다. 순정은 머리 쓰는 강자들의 무지막지한 권력이 아니라, 약하게 보이지만 끝내 승리하는 사람들의 바람직한 권력이지요. 잔머리를 굴릴 겨를조차 없이 그 사람에게로 달려가는 마음, 이것이냐 저것이냐 잴 필요도 없이 당신을 향한 가장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는 마음, 그것이 순정입니다. 순정이라는 사랑의 권력이 기술이라는 연애의 권력을 이길 때, 진짜 사랑은 시작됩니다.

대학시절 좋아했던 노래 중에 <전화카드 한 장> 이라는 노래가 있는데요. 휴대폰이 없던 시절 전화카드로 상대방의 집전화로 연락을 하던 세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죠. 그 곡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소박한 정성이 마침내 누군가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게 만드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어느 날 누군가가 전화카드 한 장을 선물합니다. 언제라도 힘들고 지칠 때면 내게 전화를 하라고 말해주면서. 당황한 ‘나’는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비로소 그 전화카드 한 장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전화카드를 준다는 것은 항상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열려있다는 의미이겠지요. 네가 언제 어디서든 전화를 하면 네 전화를 받아줄 것이라는 상대방의 따뜻한 진심을 알게 되자 굳게 닫힌 나의 마음이 열립니다.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남자 주인공이 공중전화 박스 앞에 서서 바깥의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전화를 하면 네 전화를 받아줄 것’이라는 사랑의 마음은, 90년대의 공중전화 앞에서건 현재의 스마트폰 앞에서건 같은 것일지 모른다. 이미지 출처 : tvN <응답하라 1994>

내 아픔만 생각하고, 내 슬픔만 생각하던 나의 마음이 마침내 바뀝니다. 나도 그 사람을 위해 전화카드를 사고 싶은 마음, 그 사람의 마음에 덧붙여 ‘편지 한 장’까지 부치고 싶은 마음이 되어버리죠. 먼저 출발한 마음보다 다시 반사하여 되돌아오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 이리저리 계산하는 권력 게임이 아니라 ‘좋은 힘’이 ‘더 좋은 힘’을 낳는 아름다운 사랑의 첫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누군가가 나의 안부를 걱정해주면 나 또한 마치 거울에 빛이 반사하듯이 그의 안부를 열렬히 걱정하게 되는 순간. 그렇게 사랑은 시작됩니다.

럽젠 Q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의 숨겨진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심리를 분석한답시고 연애심리학 책을 너무 많이 봤더니 엉뚱한 부작용이 생겨버렸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의 행동패턴이 빤히 보여서 결국 남성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사람들의 마음은 연애심리학 책에 나오는 것처럼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속물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저는 몇 년 전부터 ‘미디어에 비쳐지는 세상’과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차이를
실감하기 시작했는데요. 사회 생활을 오래 할수록,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수록, 미디어가 그려내는 세상에 얼마나 과장과 왜곡이 심한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드라마나 광고나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뭔가 과장된 욕망과 극단적 이미지를 보여주지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막장 드라마 같은 사람들, 인터넷 검색어 1, 2위를 다투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엄청난 대혼란에 빠지겠지요. 하지만 제가 강연이나 집필 활동을 통해서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대 이상으로 순박하고 진지하고 해맑았습니다.

말하자면 ‘트렌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저잣거리의 리얼리티에서 유행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더 자극적인 이미지를 유포시키기 위해, ‘요새 사람들은 다 그래’ 하는 식의 부정적인 담론을 유포하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는 ‘픽업 아티스트’라는 직업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 식의 극단적인 세속성을 강조하는 연애학개론 강의는 상대를 유혹하는 기술에 치중할 뿐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을 오히려 좌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유혹의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혹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방향에서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예쁘거나, 화려하거나, 대단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걱정되고, 아파 보이고, 외로워 보이기 때문에 불현듯 그 사람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뼈아픈 본질입니다.

사람들은 아직 그렇게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미디어가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욱 속물적이고, 탐욕적이고, 말초적인 존재로 가공하여 마침내 더더욱 소비지향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미디어의 대중지배 전략입니다. 진짜 사랑은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살벌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골치 아픈 밀고 당기기를 하며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봉숭아 꽃잎이 손톱 위에 천천히 물을 들이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파릇파릇한 은행잎이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르러 비로소 노랗게 물들어가듯이 그렇게 더욱 천천히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랑의 진정한 시작은 유혹이 아니라 공감이고, 울림이고, 끌어안음입니다.

럽젠 Q 오래 전에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한때 내 전부라고 믿었던 그 사람을 아직도 잊지 못한 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는 나와 아무 상관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결국 ‘그 사람은 이러지 않았는데’ 하며 실망하게 되고 그때의 어리석은 이별의 패턴을 똑같이 반복하며 상처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했던 누군가를 진정으로 잊어버리려면 그와 사랑했던 시간의 세 배는 지나야 한다고 위로하는데, 저는 그 세 배의 시간조차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가 옛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쿨해졌다’고 자평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쿨함’의 포즈 뒤에는 엄청난 자기기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그 사람과 이별해도 나는 괜찮다, 멀쩡하다, 아무 문제없다는 생각. 그건 끔찍한 교통사고의 상처를 성형수술로 성공적으로 커버한다고 해도,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겉으로는’ 바뀌었다고 해도, 밤마다 그 참혹한 사고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잠들지 못하는 사람의 말 못할 아픔과 비슷한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아무런 외상이 남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치명적인 내상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상처는 한꺼번에 날카롭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함께 걸었던 길을 걸을 때마다, 함께 갔던 카페나 식당을 지나칠 때마다,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모든 사물을 마주칠 때마다, 아주 천천히 더욱 깊게 그 거대한 상처의 뿌리를 드러내게 됩니다.

문제는 요즘 사람들이 상처가 미처 아물기도 전에 재빨리 다음 연애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끝나버린 자신의 사랑에 대한 진지한 애도 기간을 갖지 않는 것이지요. 사랑을 잃고 슬퍼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운 일, ‘스타일 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재빨리 다음 연애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깊은 상처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때는 잘 모릅니다. 어느 순간 내가 이 새로운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그 사람에게 예전의 애인만큼 충실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실연에 복수하듯 다음 연애를 시작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앙갚음’이 되어버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 상처는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차라리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마음껏 미워도 해보세요. 신물이 나올 정도로 마음껏 후회도 해야 합니다.

나무 테이블 위에 빨간 색의 하트 모양이 있다. 하트 모양은 반으로 쪼개져 조금 벌어져 있는 모습이다.
사랑이 끝난 후 진지한 애도의 기간을 갖는 것은 결코 ‘쿨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속절없이 끝나버린 내 사랑은 기나긴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밭’을 허락해줍니다. 새로운 사랑의 씨앗을 뿌리기에는 옛사랑의 토양이 너무도 황폐해져 버린 상태에서 다짜고짜 새로운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우리의 마음밭은 더욱 심각하게 착취당하게 되지요. 실연의 토양에 필요한 것은 성급한 다음 연애가 아니라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휴경(休耕)의 시간입니다. 실연의 상처에 아파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상처를 애써 덮어버리고 세련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 척 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내 자신을 속일 방법은 없으니까요. 실연의 상처에 아파하는 당신의 마음이야말로 당신 스스로가 지켜내야 할 진정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Writer | 정여울
작가.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시네필 다이어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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